한국희곡

김승철 '셋톱박스

clint 2023. 12. 7. 20:56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리는 회사원 '남자'. 과중한 회사업무와 결혼준비까지 더해져 그의 컨디션은 요즘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복통을 더욱 심하게 하는 원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셋톱박스. 집에는 있지도 않은 셋톱박스에서 신호가 잡혀 TV요금이 나가고 있다.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복잡한 절차와 ARS시스템의 긴 대기시간을 견뎌가며 통신사에 문의해 보지만 통신사는 '셋톱박스'에서 잡히는 신호를 근거로 그의 민원을 묵살해버린다. 신사 남자'의 복통은 점점 심해지고, 참다 못한 그는 결국 병원을 찾는다. '의사' '남자'의 위와 소장에 오랫동안 소화되지 못하고 굳어버린 음식물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다는 소견을 보인다. 갈수록 심해지는 복통, 자꾸만 번복되는 상사의 업무 지시, 점점 다가오는 결혼식 날,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의 셋톱박스... '남자'는 점점 지쳐간다. 그의 뱃속을 가득 채운 ''을 시원하게 배설하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다 못해 마치 새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기만 하다.

'남자'는 과연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의 셋톱박스는 잘못된 신호를 멈추어줄 수 있을까?

 

 

 

'셋톱박스'는 작가 김승철이 실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2020 창작산실 대본공모 당선작이다. 주인공 '남자'가 시청하지 않는 TV요금이 청구된 것에 대해 문의하면서 겪게 되는 억울한 사연이 바로 작가가 직접 겪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런 체험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진실'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기록'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코로나팬데믹이 앞당긴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어딘 가에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기록을 남긴다. 기록과 정보로 ''를 입증해야 하는 조직화된 현대정보화 시대'셋톱박스'는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웃기고 아프게 보여준다존재 그 자체가 아닌 기록된 정보만이 진실인 세상, 인간들이 만든 비대면 시대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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