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태웅 '불티나'

clint 2025. 1. 15. 21:09

 

 

 

<불티나>는 8년째 고시 공부를 하고 또 떨어진, 병수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언제나 자신의 삶이 치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은 일부터 처리하는

습관을 갖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의지는 아주 작은 라이터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제 흔적조차 의심스러운 삶의 불꽃, 그 씨앗을 찾아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게 없어 누군가에게 빌려야만 했던 라이터.

그 라이터를 구입하면서, 그 작고 초라한 불꽃에 절실한 삶의 기운을 새겨 넣는다.

 

 

 

 

 

대학을 같이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동참했던 일단의 무리가 지금은 고시에 실패하고 이혼하는 자, 동창끼리 결혼했지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 개그맨이 된 변호사, 자살하는 자, 자살을 방조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박하게 폭로된다. 작가의 정직한 자기 성찰을 부각하면서 아파할 줄 모르는 이 시대의 무감각, 파괴성을 예리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병수란 사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8년째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데다, 교사인 아내에게 얹혀사는 꼴이 되어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쓰라린 패배의식이지만, 알량한 자존심과 오기, 궁색한 자기변명 또한 만만치 않다. 아내 인옥과의 관계는 병수의 이런 이율배반적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에게 최대한 상처를 줄 작정으로 일부러 골라내기라도 한 듯한 온갖 멸시와 야유로 가득 차 있다. 아내는 번번이 고시에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을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으며, 정부가 있다는 사실도 전혀 숨기려들지 않는다. 병수는 병수대로 그런 아내를 자신 못지않은 속물로 간주하면서, 그녀의 불륜장면을 찍은 필름을 미끼로 해 그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내에게 있어 병수는 ‘미친 놈’에 ‘좆같은 새끼’,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파렴치한’이고, 아내는 병수에게 있어 ‘씨발년’에 ‘개폼이나 잡고, 소비를 해야 살 것 같고, 시나 소설로 치장해야 살아있다고 느끼는 부르주아 쓰레기’일 뿐이다. 아내를 파괴해버리고 싶고 아내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갖은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그녀의 지갑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돈을 꺼내 나가는 병수의 모습에서는 최소한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를 부르주아로 몰아붙이는 끝에 세상의 부르주아들을 향해 퍼붓는 병수의 욕설에는 객관적 타당성에 앞서 낙오자로서의 그의 패배의식과 열등감이 더 많이 깔려있다. 확실히 병수는 속물에 가깝다. 그 스스로도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들지 않는다. 아내에 대한 그의 뜨겁고 절실했던 사랑을 말해주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이제 나이트클럽의 나타샤에게나 더 그럴듯하게 어울리게 되었고, 젊은 시절 철학도로서 품었던 근원적 고독이나 순수는 돈을 주고 산 여자에게서나 잠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또 시대니 고문이니 획일성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은 만나는 여자들이 도대체 유방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그의 호기심에 가려져 무의미해진다. 병수의 대사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무의미한 잡담들은 그 잡담들만큼이나 사소하고 가벼워진 그의 삶을 대변한다. 20대에 가졌던 꿈과 사랑, 이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로는 병수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시에 패스한 동현, 변호사를 그만두고 개그맨으로 나선 윤재,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아직까지 지난날의 이념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있는 추배, 고시에 실패한 충격으로 정신이상자에 거지가 된 나만이 그리고 사랑 없는 결혼에 시들어 가는 윤재의 아내 진숙과 병수의 아내 인옥.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 모두는 삶에 대한 타협과 안주, 내지는 적당한 자기변명과 체념만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독립된 개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병수의 내면에 숨겨진 조각난 상처들과 치부들을 상징하는 기호들이다. <불티나>는 비루한 일상 속에 갇힌 30대의 현주소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단순히 386의 정체성 문제나 이념부재의 현실을 운운하는 차원을 벗어나 보다 복합적인 내적 깊이를 확보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연극의 중심 모티프가 되는 ‘불’의 이미지를 풀어내는 작가와 연출가의 방식 덕분이다. 이 연극에는 병수의 라이터에서부터, 비즈니스클럽 이름, 강원도 산불, 과거 6월 항쟁 당시 시청 앞 광장을 수놓았던 불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작가와 연출가는 이 불들을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병수의 의지가 담긴 라이터 주변으로 끌어 모음으로써, 일상이란 어둠 속에 가려져 병수조차 느낄 수 없었던 갈등과 고민의 실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즉 과거와 현재, 역사와 개인의 시각에서 직, 간접적으로 비춰주는 매개체로 활용하고 있다. 고시에 떨어진 병수는 잠깐 동안의 망설임 끝에 돈을 주고 라이터를 구입한다. 그러나 그는 이 라이터에게 처음부터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병수 : 라이터 간수도 못하는 놈이 뭔 놈의 고시냐? … 내가 이 라이터 가스 닳기 전에 잃어버리면 인간이 아니다. 그래 작은 일부터 마무리를 짓는 습관을 짓는 거야. … 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쓰고 만다. 잃어버리는 날이면 고시고 뭐고 없다. 그는 라이터를 끝까지 쓰고 못 쓰고를 통해 남자로서의 위신과 자존심뿐 아니라 자신이 과연 고시공부를 계속해도 될 정도의 인물이 되는지를 확인받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라이터는 주위의 비웃음과 내면의 패배의식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 된다. 그 때문에 병수는 라이터에 극기정진(克己正進)이란 이름을 붙여주는가 하면, 변기에 빠졌을 때에는 드라이기로 말리고, 행여 잃어버릴새라 전전긍긍하는 등 유별난 애착을 보인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하필이면 일회용 라이터를 통해 확인하려는 병수의 모습은, 전자의 무거움이 후자의 더없이 사소한 가벼움과 충돌하고 어긋나는 가운데 묘한 비극성을 자아낸다. 동현의 사시 패스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술자리에서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이 친구에서 저 친구의 손으로 넘어가는 병수의 라이터는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불들을 불러낸다. 6월 항쟁 때 시청 앞 광장을 수놓았던 불꽃, 분신자살하던 친구의 몸을 뒤덮었던 불꽃, 즉 젊은 시절 그들을 뜨겁게 에워쌌던 혁명과 이상의 불꽃이다. 병수와 그의 친구들은 그 불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병수 : 그것이 너희들의 불꽃이라면 우리도 불꽃은 있다. 시청을 가득 메운 인파들, 하늘에서 뿌려지는 유인물들 … 아 뜨겁다. 속에서 올라오는 이 불길을 주체할 수 없…. 어둠이 깔린 시청, 광화문, 종로, 수많은 라이터 불이 반짝인다. 승리의 불꽃이 반짝인다. 수천수만의 불꽃들이 반짝인다. 이렇게, 이렇게!

 

 

 

연극 <불티나>의 탄탄한 극적 구조는 한편의 단편소설을 연상시킨다.
라이터란 단순한 모티브를 통해 한 인간의 심리를 이끌어감은 물론,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라이터 "극기정진"과의 우연한 만남은 

잊고 살았던 80년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기억은 현재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갈피 잡을 수 없는 나약한 미래의 우리를 마주하게 한다.
우연한 만남이 인생에 부여하는 그 어떤 필연성, 라이터 "극기정진"의 순탄치 

않은 행로가 병수에 삶에 대입되면서 느끼는 인생의 처연함.
이렇듯 뚜렷한 극적구조,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감하고 섬세한 솜씨,
개성이 강한 캐릭터는 한번 작품을 보게되면 눈을 뗄 수 없는 강력한 
흡인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또한 유려하고 힘있는 대사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연극적 언어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작가의 글 / 김태웅
라이터 불꽃은 절대절명의 의지처다. 

의지! 
어떤 남자가 걸어간다.
생활에 찌든 그의 삶에도 사랑은 있고 열정은 있다.
그리고 추억할 과거도....
21세기, 이념은 이미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욕망에 충실한 노예들만 활보한다.
어떤 남자의 삶을 불을 통해 읽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끈끈이처럼 달라붙는 삶에 대한 미련은
예상치도 못한 행동들을 유발한다.
그것이 일상의 배면이다.
그 일상의 배면에는 어떤 붐이 있는 것일까?
유년시절 온돌방의 아랫목에서 느끼던 열기, 
처음 여자를 안았을 때 그 안온한 온기,
변혁의 불길 속에 뛰어들지도 못하고
주변에서 느껴야 했던 그 미지근한 열기.
좌절에 끝에서 쓴 담배를 빼이 물고 느꼈던 라이터의 온기.....
살려면 라이터의 온기라도 있어야 하고
라이터 하나 만의 의지나 일정은 있어야 한다.
그것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존재
그 라이터 불꽃은 절대절명의 의지다.
그 라이터를, 그 의지를, 그 열정을 지키려는 의지.
그리고 그것만이 개그만이 지는 현실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개의 불꽃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의지들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이념보다도 어떤 명분보다 강하다.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