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오네스코 작 양정웅 각색 '의자들'

clint 2024. 9. 26. 17:39

 

 

 

어떤 섬에 노부부가 탑 꼭대기에 살고 있다. 
그들의 인생은 실패로 점철됐으며 보잘것 없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삶의 권태를 달래기 위해 망상속으로 도피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과대망상속에서 부부는 씁쓸한 인생을 서로 위로한다. 
이윽고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손님들이 차례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손님을 맞이하면서 현재의 불안과 욕망, 과거에 대한 그리움, 
이루지 못한 사랑 등을 떠올리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를 드러낸다. 
점점 더 많은 손님들이 오고 어느 순간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마침내 황제가 등장하고 둘의 감격은 절정에 달한다. 
남자는 자신의 성명서를 초대한 손님들과 전 인류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용한 직업 대변인이 올 것이라며 초조하게 그의 출현을 기다린다. 
드디어 대변인이 등장한다. 남자는 전 인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성명서 전달을 부탁한다. 
노부부는 초대 손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황제 만세>를 외치며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대변인은 뭔가 전달하려 애를 쓰지만 
이 시도는 절망으로 끝난다. 그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님들과 황제에게 정중한 인사한 뒤 퇴장한다. 
텅 빈 무대에 최초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극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실패와 굴욕의 긴 세월을 보내며 권태에 빠져 사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외딴섬은 노부부의 고독이 상징화된 공간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친구도 없이 밀폐된 방에서 인생을 결산하며 과거에 대한 회한, 사랑에 대한 향수 등을 풀어놓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노인은 아내를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아시리아 여왕의 이름인 ‘세미라미스’라고 부르고 노파는 남편을 장군이자 대장부로 칭한다. 이는 그들이 처한 ‘지금 여기’의 비참한 상황을 뒤로하고 타인으로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부재한 그들은 쉽게 타자들의 세계에 입장해 타인이 될 수 있다. 이들의 대화에서 특별한 내용이라곤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이전 연극 <대머리 여가수>에서처럼 무의미한 일상의 편린들을 나열하거나, 과거에 대한 넋두리만을 반복할 뿐이다. 대화 속에서 노인은 아기처럼 울며 엄마를 잃어버린 고아의 모습을 보인다. 노인과 노파에게는 각각 그들만의 죄의식이 있는데, 먼저 노인에게는 과거 춤추러 가기 위해 죽어가는 어머니를 방치한 것이고, 노파에게는 아들의 떠남을 만류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모두는 책임이 없는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죽음과 연결되는 복잡하고도 본래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이 두 늙은이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통해 시간과 죽음의 함수를 체험한다, 허무와 죽음의 두려움이 어린시절의 노스탤지어에 어두움으로 채색됨을 본다. 

 



의자들에 관한 短想 - 양정웅
내가 <의자들>을 처음 만난 것은 그로토프스키의 공연연보에서다. 내가 가장 흠모하는 이 위대한 예술가의 행보에서 첫 작품인 <의자들>에 주목한 나는 오래된 번역서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이오네스코의 그 강렬한 연극성에 매료되었다. 수년 뒤 어느 국제연극제에서 동유럽 라트비아의 젊은 연출가가 연출한 <의자들>을 보게 되었다. 젊은 남녀가 등장하는 그 연극은 수없이 등장하는 의자들의 행렬을 멋지게 그리고 있었다. 또 다시 몇 년이 흐르고 나의 첫 대학로 첫 연출작은 <의자들>이 되었다. 그때는 현대무용가와 함께 내가 직접 출연한 넌버벌 공연이었다. 대변인은 마네킹이었고 의자도 오직 2개만 사용해 두 남녀의 놀이성을 강조했다. 이오네스코의 시적인 대사만이 간간히 나레이션으로 흐르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또 수년 후 혜화동 1번지 3기동인 첫 번째 페스티발에서 다시 막을 열었다. 그때는 인정받지 못한 젊은 청년의 절망 속에서 쓸쓸함과 유머를 그리려 애썼다. 이오네스코의 그 탁월한 상상력 앞에서 내 상상력의 한계를 각인하며 각색하였다.... 그리고 다시 또 수년이 흘렀다. 쾌락과 욕망으로 가득한 30대, 그 황금기에 고독과 절망, 죽음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것이 부조리다. 아이러니다. 아오네스코의 천재성 앞에서 다시 한번 절망한다. 거의 수정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사뭇 배우들도 나도 다른 분위기로 이끈다. <의자들>이 젊은 예술가의 가슴에 이제 상처를 남긴다. 고독은 처절한 기다림이다. 어둠 속에 절규하는 외로움이다. 두 사람은 욕망으로 얼룩진 삶의 끝에서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린 다. 오랜 갈구는 환상을 마치 진실처럼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무대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독한 몸부림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건 나의 모습이다. 나의 망상이다. 우리의 실존이다. 그러나 빈 가슴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오직 다 찼다는 착각과 위안 뿐이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섬이다. 그곳에 사랑하는 단 한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건 행복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끝없이 상처를 주며 또 위로한다.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 역시 종국에는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함께 기쁨과 슬픔을 노래했건만, '우리 의 갈 길은' 서로의 갈 길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림 역시 어쩌 면 환상일지 모른다.... 언젠가 수년 후 나는 다시 또 이 <의자들>의 막을 열고 싶다. 모든 아쉬움을 곱씹으며 새로운 탄생을 상상한다. 무대에 수많은 방석들이 쌓이고, 상복을 입은 두 남녀는 弔燈 아래 말없이 수많은 손님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