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피의 혼례

clint 2024. 6. 5. 17:56

 

 

 

 

결혼식 날, 신부는 유부남인 옛 애인과 함께 도망친다. 
신랑은 그들을 쫓아가 피의 결투를 벌이고, 
결국 신부의 옛 애인과 신랑은 죽음을 맞는다. 
신부는 신랑의 어머니에게 다른 사내와 도망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옛 애인의 아내는 넋이 빠진 모습으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다. 

 



《피의 혼례》(Bodas de Sangre)는 스페인 낳은 대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비극 3부작 중, 그 첫 번째 작품이다. 결혼식 날 옛 연인과 도망친 신부로 인해 피로 물드는 결혼식을 격정적이고도 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인간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의 정수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단순한 줄거리의 배경에는 스페인 내란 속에 폭력으로 덧없이 희생된 남성들과 홀로 집을 지키며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들의 한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무엇보다 끓어오르는 사랑의 열정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는 젊은 로맨티시즘, 살아있는 날들을 위해 어떤 절망에도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불굴의 의지가 전달하는 강력한 삶의 리얼리티는 환상적이면서도 시적이면서도 사실적이다.

 

 

 

1933 3 8일 마드리드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희생물을 바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던 도구인 칼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신랑에게는 단지 포도를 자르는 도구이지만 그 길에 남편과 큰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처음부터 그리고 작품 전체에 걸쳐 아주 을씨년스러운 존재다. "입에 꽂을 문', '포도밭으로 가기도 하고, 올리브 밭으로 가기도 하는 아름다운 남자의 몸을 잘라 버렸던 칼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위에서 보듯 항상 식물이나 꽃과 연관되어 있다. 뒤이어 어머니는 자기 남편에게서 카네이션 냄새가 났다고 했다. 죽은 남편과 아들을 "두 송이 제라늄"이라고 했다. 연이어 그들을 밀에 빗대 있고, 신부와 신부 어머니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그 여자들에 대해 들먹이지 않는데 때가 되면 찌르는 "두 개의 엉겅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의 아내는 자기 아이를 '카네이션', 또는 '달리아"라고 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자장가에서 아기를 "장미원"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밀감 꽃, 월계수, 재스민 등의 이미지로 등장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부인은 사촌의 결혼식 날 남편의 행동에 마음이 상해서 집을 나설 때 자기의 결혼식을 기억하며 "나도 내 집에서 그렇게 나갔어 들판이 온통 내 입에 들어갈 것만 같았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로르카가 꽃과 밀, 들판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스페인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꽃과 대지에 대한 기호, 즉 그들을 둘러 싸고 있는 세계인 자연과 인간 삶 간의 밀접한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곧 뿌리 깊은 스페인의 농경문화와 그 민족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강조되는 달에 대한 로르카의 인식도 그러하다. 농경문화는 달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달을 의식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염려, 출생의 신비, 죽음 등이 본능적이자 자연적으로 자연의 흐름에 맡겨져 있다. 인간은 인 간을 품고 가는 자연의 리듬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미 예정된 곳으로만 가야 하는 맹목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은 생장의 리듬을 관할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밀물과 썰물을 통해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며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옛날에는 특히 더 생성으로 이어지는 달의 현상이 신비하고도 마술적인, 달의 신이 총괄하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다. 동물과 인간의 번식이 달의 힘에 달려 있었고 대지에서 움트는 식물의 성장도 그러했다. 그래서 특별히 달의 신에게 봉헌된 식물도 있다. 그래서 로르카의 <피의 혼례>에는 식물의 이미지와 달이 여러 번 동일시되어 나타난다.

 

 

 

<피의 혼례>에서 난해한, 그러나 비극이 되는 충분조건을 이루도록 작가가 장치한 부분이 있다. "말의 자장가". 1 2장에 나오는 이 자장가는 어린아이가 아직은 모르는, 그러나 곧 길들어가야 하는 삶의 고통과 폭력을 이야기하면서 극에서 일어날 극적인 일을 암시하고 있다. 옛 그리스인들은 '오이디푸스' '()'를 보러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일어날 숙명적인 일이 어떻게 전개될 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현대에 들면서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피의 혼례>에서 로르카는 '말의 자장가'와 그 밖의 징후, 예를 들어 칼에 대한 집착 등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숙명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그 일의 결과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풀어나갈 지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갖고 있는 레오나르도. 이 인물은 우선 그의 이름에서 '사자(Leo)'를 연상할 수 있고 또한 로르카 작품에서 늘 상징적으로 언급되는 말과 그는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들판 저 끝"에서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말은 세상 끝에서 온 것처럼 눈의 초점을 잃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1 3장에서 하녀는 새벽3시에 말을 탄 한 남자를 보았으며 그가 레오나르드라고 확신한다. 결혼식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도 그였으며, 그가 말을 죽을 정도로 몰아왔다는 하녀의 말에 그는 "죽을 땐 죽는 거죠!"라고 대답한다. 신부는 레오나르도에게 "자기 말을 갖고 있는 한 남자는 많이도 알고 사막에 갇혀 있는 한 여자를 많이도 옥죌 수 있지"라고 고백했다. 교회로 가기 위해 모두 집을 나섰을 때도 그는 자기 부인과 함께 마차로 가기를 거부하고 말로 가기를 고집한다. 난 마차를 타고 다니는 남자가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당신 눈에 가시가 있어요"라고 했다. 2막에서 레오나르도 부인이 그를 찾지만 발견하지 못하자 그를 볼 수가 없어요. 마구간엔 그의 말도 없어요"라고 했고. 신부와 레오나르도가 도망간 것을 알았을 때 부인은 "도망갔어요! 도망갔어요! 그 여자랑 레오나르도가 말을 타고, 서로 얼싸안고, 바람처럼 갔어요"라고 알렸다. 그들은 ''을 타고 갔고 그 말은 ''이 기다리는 을씨년스러운 숲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눈에 광기가 서린 이 말은 본능세계의 상징으로서 레오나르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의 본능이 찾는 대상을 쫓아 달렸다. 로르카의 세계에서 본능의 힘은 자 연 세계의 일부인 으스스한 파괴의 속성을 갖고 있다.

 

 

 

2막에서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이 신부의 집에 가까이 올 즈음 하녀가 부르는 노래는 창조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 앞으로 신부가 꾸려 나갈 꿈들이다. 신부와 레오나르도의 의지에는 그들의 이성에는 각자의 의무와 명예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다. 레오나르도는 고통스럽지만 다시는 신부와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서로에 대한 적의가 역설적이지만 그들 본능의 치료약이자 창조의 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변의 힘이 설명할 수 없는 가차 없는 마력이 레오나르도와 신부를 잇는다. 

3막은 1, 2막에 걸쳐 나왔던 모든 예언들이, 즉 신랑과 레오나르도 가문 간의 적대감을 표현하는 길에 대한 집착과 꺾어질 목숨을 대변하는 꽃의 이미지, 레오나르도의 불길한 광기가 서린 말을 언급하는 말의 자장가 그와 대조적으로 레오나르도와 신부에게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분위기를 던져주는 꽃의 이미지들로 가득 찬 결혼축하 시. 그리고 이것과 또 대조적으로 죽을 남자들과 혼자 남게 될 여자들의 가차 없는 운명에 대한 예언 등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곳이다. 3막의 제의를 위해 아주 조심스럽고도 신중하며 단계적으로 준비된 위의 것들이, 3막에 들어서면서 현실의 세계를 떠나 초자연의 암울하고도 의인화된 세계로 들어간다. 이제는 나무꾼들과 달과 지문에서 지시한 대로 '배역에는 나타나지 않는 죽음의 세상으로 우리는 들어간다.

 

 

 

마지막 장은 파국이다. 여기서도 인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희생되는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전달되고 있다. 어머니의 집은 교회 예배당의 느낌을 주듯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밖에서 한 어린 계집아이와 두 명의 소녀가 붉은 실패를 갖고 논다. 그리스신화에서 인간의 목숨은 상징적으로 실패를 조종하는 여신들에게 달려 있었다. 두 소녀 중 하나가 천진난만하게 모든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그러고 나서 장모와 레오나르도의 부인이 들어오고 그 뒤로 음침한 숲에서 나온 여자 거지가 어떻게 레오나르도의 운명적인 말 앞에서 신랑과 레오나르도가 죽었는지 이야기하기 위해 들어온다. 어머니와 이웃 여자가 함께 들어오며, 어머니는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픔을 꽃의 이미지를 빌려 이야기한다. 신부는 자기가 저지른 일이 저항하기 불가능했던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자기에게는 죄가 없노라고 한다. 비극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사실 신부는 죄인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힘에 희생당한 제물일 뿐이다. 로르카는 그녀의 입술 밖에서는 어떠한 해명도 하고 있지 않다. 운명의 세계에는 도덕적인 의미,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해명은 없기 때문이다. 달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나타났고, 운명적인 요소로 등장했다는 걸 안다면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명의 세상에서 빠져나와야만 한다. 도덕적인 해명은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로르카는 신부에게 피할 수 없는 동기를 만들어 줬다. 물론 신랑의 어머니 편에서 봤을 때 그러한 동기는 이해될 수가 없다. 신부는 자기의 육체적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대담하고도 원시적인 불의 시험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로르카는 작품을 그런 명예의 문제로 끝내지 않고 미해결로 남겨둔다. 마지막은 비극적인 희생의 도구로 사용된 칼에 대한 어머니와 신부의 노래로 되어 있다.

 

 

 

<피의 혼례>는 비극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카타르시스적 효과가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효과가 있으며, 그것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이나 내면에는 숨겨진 파괴하고 미치게 하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시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극은 상징적이거나 환상적이라기보다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서정적인 현실의 세계로 작품의 인물들을 이끌고, 그들을 통해 우리를 그 세계로 들어가게 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로르카 자신이 인간 내면의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해 희생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적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