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고장' (희곡버전 초연작품)

clint 2024. 6. 8. 13:21

 

 

 

방송극본과 소설, 그리고 그후에 각색된 연극희곡 버전이

각기 결말이 틀림을 유의해야 한다.
작가 자신이 여러 버전을 만들었고 그후 여러번 전 세계를 통털어

많이 공연되는 작품이다. 원본 방송극 버전 (고장으로 번역됨) 뒤렌마트 자신이

자기 방송극 중에 가장 훌륭한 것으로 손꼽는 '고장'(Die Panne) (1956)은

사실상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작품이다.

소설형식으로도 쓰여 진 이 이야기는 방송극에서는 두 개의 세계,

즉 부도덕하고 방탕한 인간 트랍스의 세계와 흰 별장에 사는 그로테스크한 노인들의

세계가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다.

트랍스가 자기 경쟁자인 기갹스를 살해했다는 검사의 비난에

그는 "사업은 사업이다”라고 대답하며,

검사는 "살인은 살인이다"고 반박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트랍스가 고문기구와 단두대률 바라보고 두려워하면서도

다음날 아침에는 건강하게 무시무시한 꿈에서 깨여나며,

다시 사업을 쫓아 줄달음친다.

그러나 간통죄를 지은 그는 청취자들에게서는 사실상 처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 괘씸한 인간에게 제기된 함정은 놀라운 비유상이 되었다.

 

 

 

이 작품은 후에 뒤렌마트 자신이 TV 각본으로도 개작했을 뿐아니라,

결말이 다른 소설버전을 각색해서도 여러 번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작품으로 뒤렌마트는 1956년 독일 전쟁 맹인 협회상을 받았다.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후기에서,

“이 세상에 아직도 작가가 쓸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는 걸까?'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아주 우연적이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사건을 소재로 잡아

글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은 경이롭고 흥미롭다.

뒤렌마트의 아주 짧은 사고. 이것은 단순한 엔진 고장으로 시작해,

내 머리에 사고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방을 따로 하나 만들어 놓고 가버린 듯하다.
독일의 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키는 [사고(事故)]를 '1945년 이후

독일어권에서 발표된 책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주지하다시피 마르셀 라이히-라니키는 현재 독일 평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서평은 엄정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좋게 평가한 작품은 곧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먼저 희곡버전이 국내 번역이 안 되어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차,

한양대학교 들꽃 극회 재학생들이 완역을 하여 공연했다. (2017년 9월. 김명은 연출)

그 노력과 도전에 먼저 큰 박수를 보낸다.

한 작품을 방송극-> 소설-> 희곡 등 작가 자신의 손으로 세 장르를 모두

썼다는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일인데 뒤렌마트는 이루어냈고

이 세 작품을 형식만 다른 게 아닌 내용도 등장인물도 또한 작가의 의도도

구체화 되고 광범위 해져가면서 완결판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방송극이 단막의 ‘한여름밤의 악몽’ 이라면 소설은 중막의 그로테스크한 재판극,

희곡은 20여년 뜸을 들여 장막의 ‘고장’ 완결본으로 만들어 놓았다. (2시간공연)

방송극과 소설은 생선 가운데 토막은 같은데 머리와 꼬리를 바꾼

마이너 체인지이지만 가운데 토막엔 색다른 맛의 양념을 적당히 뿌리고

확 바꾼 결말 때문에 전혀 다른 작품 같은 체감을 느낀바 있다...

그런데 이 희곡버전은 또 확 틀리다.

가운데 토막마저 고등어에서 청어쯤으로 바뀐 느낌이랄까....?

 

 

 


캐릭터의 구체화와 확장이 이뤄지면서 불변일 것 같았던 트랍스와 법조인들의

과거가 기존의 소설과 방송본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스포일러라 약간만 표현하자면 소설에서는 자신의 과거사를 유죄로 단정하고

목을 매는 트랍스라면 희곡에선 더 깊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첨가하여

마치 정신이 고장 난 듯한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과시욕으로 자살하는 것과

사건도 직장상사의 부인과 놀아난 건 맞지만

자신의 부인과 기각스가 불륜을 저지르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죽는 거라

전작에서의 직접 범죄에서 벗어나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확 줄어들었는데...
희극적이면서도 냉철한 전직 법조인들도 그들의 과거 행위에 결격사유들을

복선으로 깔아놓고....
또 ‘돌싱‘으로 팜므파탈로 나오는 판사의 손녀인 유스티네도

희곡에서는 적잖은 비중으로 관심이 가는 역할을 하고,

마지막에 법조인들의 입을 통해 뒤렌마트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 

 

 

역자의 글 : 김나연(독어독문학과 16)
단순한 '고장'들로 시작한 어느 평범한 행상인 알프레도 트랍스의 비극.
그 비극을 이끌어 내는 일상적인 듯 한, 뒤틀린 사건들.
작가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문체와 희극적 표현들을 사용해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를 하나의 무대로 가져옵니다.
독일어와 한국어.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른 이 두 언어를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은 

마치 맞지 않는 두 퍼즐 조각을 무작정 끼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현지의 뉘앙스를 우리나라 관객들도 이해할 수 있게
희극적이지만 그 기괴함을 놓치지 않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였지만 많은 생각들과 해석을 통해 

최대한 있는 그대로, 퍼즐 조각을 돌려 가며 맞추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대화 속의 이질감, 비극의 시작과 끝.
작품의 모든 과정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어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