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현화 '카덴자'

clint 2023. 12. 1. 11:21

 

 

 

 

막이 오르면 명확한 때와 장소도 없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네가 네 죄를 알렷다!>하는 왕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무대 위에는 처참한 몰골의 선비가 실신해 있다. 왕은 위엄있게 무릎을 꿇라고 명하나 선비의 지조는 대쪽같다. 사연인 즉, 왕위를 찬 탈한 왕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솟은 왕은 망나니를 시켜 모진 고문을 가한다. 철퇴로 뼈를 으스러뜨리고, 단근질로 살을 태우고 급기야는 입까지 지진다. 부당하게 권력에 오른 왕과 그것에 거역하는 신하, 그리고 왕명에 따라 움직이는 망나니들이 벌이는 진부한 사극과 같다. 그러나 다음 장면, 망나니들이 객석을 휘젓고다니다가 여자 관객을 느닷없이 무대 위로 끌고가 철제의자에 포박을 하게 되면, 예측못할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포박당한 여자에게 왕이 다짜고짜<네가 네 죄를 알렷다!>고 외치자, 움찔한 여자는<이거 왜이러세요>하며 장난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하는 명과 동시에 망나니들이 눈을 부라리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여자 관객은 객석을 향해<이 사람들 좀 말려주세요>하고 애원한다. 사극속으로 뛰어든 원피스 차림의 여자 관객은 선비가 당한것과 같은 단근질을 당하고, 옷은 갈기갈기 찢겨 풀어 헤쳐지며, 화장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두세번의 물바가지를 뒤집어 쓴다. 무대위에서는 왕위 찬탈장면이 재현되고, 여자 관객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 끌고 애무해대는 장면이 펼쳐진다. 숨돌릴 틈도 없이 휘몰아가는 다그침 끝에 여자는 마침내 극의 진행을 현실로 받아들여 <내가 내 죄를 알겠소>하며 목을 매달면서 막이 내린다.

 

 

 

 

 

'카텐자'는 음악 용어로 '급격하게'라는 뜻이다. 1막의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에서 성삼문을 마구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두로 지지는 등 세조가 친국(親鞫)을 한다. "니 죄를 니가 알렸다!" 하고 진혹한 고문이 이어진다.

제2막에서는 고문 기구들은 무대 위에 그대로 놓아준 채 포졸들이 관객 속으로 내려오더니 불문곡직 여자 관객 하나를 잡아간다. 그런 다음 성삼문을 앉혔던 그 의자에 앉혀 묶은 다음, 또 살이 타도록 지지면서 고문에 나선다. 트릭이기는 하지만, 인두로 지지고 까무러치면 찬물을 끼얹는 등 목불인견의 상황이 연출된다. 여자가 아픔의 비명을 지르는데, 주로 에로틱한 목소리를 내는 등으로 이상한 기분에 젖어들게 만든다. 성도착적으로 보이게 하면서 "니가 니 죄를 알렸다!" 하는 소리가 반복되는데, 나중에는 여주인공을 마땅히 구할 수 없어 연출가의 여동생을 캐스팅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강력한 후레쉬 불빛을 쉴 새 없이 비추는 등 온갖 고문을 해대니까 "예, 제가 단종 복위의 획책했습니다."라고 죄를 고백하면서, 극이 끝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연극일까. 이현화의 작품이 있기 전까지는 무대 따로 객석 따로였다. 객석에서는 그저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을 볼 뿐이었다. 그런데 이현화는 무대와 객석을 터버렸다. 물론 배우를 한 명 심어놓기는 했지만, 관객을 하나 잡아다가 데려다놓은 것 역시 배우와 관객을 터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오백 년 전에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참형을 당한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합쳐 버렸고, 그 사건을 동일하게 만든 것이다. 「카텐자」를 보면서 그 연극적 방법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현화의 <누구세요?>역시 이와 같은 현대성의 맥락 위에서 파악될 수 있는 연극이었으며,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나 핀터처럼 형이상학적이며 원형적인 진실에 대한 물음과 경고는 아니지만 현대 한국인의 생활과 의식상에 노출된 위기를 경고해 주는 작품이었다. 그 것은 첫째 현대 부부의 소외감이 위기요, 둘째는 현대 아파트 생활의 획일성이 낳은 위기다.
남자와 여자는 부부지만 이미 그들은 부부간의 애정의 진실과 윤리를 지켜갈 수 없는 그런 부부였다.
"옆 집 여편네 얼굴은 몰라봐도 그 남편 생김새는 기억할 거예요. 원래 아파트에 사는 여자들이란 자기 남편 보다 옆 집 남자에게 더 신경을 쏟는 법이니까."
이는 주거의 획일화가 의식의 획일화를 낳는 단적인 실례라 하겠다. 획일화된 생활과 개성의 상실은 윤리와 가치 의식마저 평준화 시켜 선택이 아니라 기회가 행동의 기준이며 동기가 된다. 결국 행동하지 못한 자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면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든 도덕적 가치를 무시하고 무차별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끔찍한 현대의 논리를 작가는 주장하고 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은 아이덴티티를 밝히는 일차적인 질문이다. 그 것은 근원적인 질문일 수 있거나 아니면 매우 피상적인 질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누구세요?>하는 질문은 다만 상대방이 쓰고 있는 가면을 두고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은 그 질문이다. 이현화는 처음부터 부부가 서로를 알고 보지 못하는 남이라는 가정에서<누구세요?>를 묻는다. 이는<나는 남편이다.>,<나는 이 집의 주인이다.>하는 식의 답변을 요구하는 그런 질문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부부라는 피상적 관계의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관계를 묻는 질문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수립해 주는 일이야 말로 이 작가의 앞으로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 작가는 남달리 뛰어난 것 같다. 간결하면서도 시니컬한 대사는 그러한 감각과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분위기에는 희극적인 면과 비극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는 것도 특징의 하나다. 섬뜩할이 만큼 차가운 그의 작가적 기질은 그와 주위의 모든 것을 냉정하게 객관화 시키고 때론 조롱하면서 감추어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다.

 

 

 

 

이현화의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게임놀이라 하겠고 그 것은 매우 재기에 넘친 게임놀이라 할 수 있다.<누구세요?>나<쉬-쉬-쉬잇>은 다같이 게임을 그 기본 구조로 삼고 있고 그 게임 자체에서 현대인의 삶과 풍속이 날카롭게 풍자되고 있다. 이러한 게임은<카덴자>에서도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다만 그 내용이 현대 도시인의 삶이라는 한정된 테두리를 벗어나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상당히 확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얼른 보면 사극 같지만 오히려 사극의 고정된 패턴을 해체하고 그 것을 희화화 시키고 있는데 역시 이 작가 특유의 날카로움과 차가움은 이 보다 앞서 쓴 몇 개의 작품에서와 같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격이다 주자나 독창자가 1악장 마지막에서 즉흥적으로 자신의 테크닉을 현란하게 펼쳐보이는 카덴자처럼 이 극도 긴 역사의 한 순간에서 연기자들이 즉흥적으로 역사를 놀아보고 야유해 보는 내용이야 어떻든 연극적으로 매우 매력있는 형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상세계의 이면을 감지하지 못한 채 현실에만 매달려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 유령을 볼 능력과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과학문명과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적 사고가 뿌리를 내린 지 오래인 오늘날 ·西를 막론하고 발밑을 보기에 급급하여 드높이 뜬 달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그 몇이나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 달의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할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의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의 삶 속에는 결국 인간이란 조건을 규정짓는 몇 가닥의 맥락만이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섬칫할만큼 분명하게 감지할 때가 있다. 이 짙은 느낌의 울림이야말로 한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는 능력과 여유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과 여유의 소지자야말로 예술가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그 자신이 터득한 깨달음의 세계를 설득력있게 타인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술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예술가가 터득한 그 깨달음의 진동이 얼마냐 짙고 강렬한 것이냐 하는 요소와 그 깨달음의 진폭의 여운이 전달과정 속에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느냐가 결국 한 예술작품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의 측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李鉉和 作, 鄭鎭守 演出의 민중극장 공연작품인 카텐짜는 여러 가지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단종애사라는 한 특정한 역사적 사실 속에 인간적 삶의 조건을 범세계적 차원에서 규명 짓고자 한 李鉉和의 투지가 비록 부조리극의 형태 속에 애매하게 감추어져 있어 유령을 감지할 수 있는 안경을 쓰지 않고는 자칫 그 이면에 숨어있는 진리를 깨닫기에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연출가의 예리한 視力을 통하여 투시된 이 작품은 관객의 잠자는 의식을 불현듯 일깨워 줄 수 있는 향기를 뿜고 있다. 상대에 따라서는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겠고, 또는 작품 속에 깃든 사회적 고발정신만이 스쳐가는 별똥인양 곁눈질 속에 스러져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분명 이 작품은 70년대에 상연된 연극작품 중 연극인들과 관객의 마음속에서 그대로 놓쳐 버리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특히 독창성에 가득 찬 의상과 작품의 상징적 기능을 대신해준 투영 무대는 희곡이 감당해 내지 못한 부분을 잘 보완해 주고 있다. 1978년도 大韓民國연극제에 참가했다가 아깝게도 입상에서 탈락한 이 작품은 비록 완벽하게 대중적이거나, 승화된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연극작품이긴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창착극의 다양성을 넓혀 주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전통극의 형태가 아닌 다른 차원의 예술성에서 우리의 정서에 보탬이 되어주는데 한몫을 단단히 하리라고 믿는다. 전통의 옷을 빌려 입지 않고도 오늘날의 한국 연극의 自我를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으리라는 한 가닥 섬광의 빛을 우리 연극계에 비쳐 준 작품이기에 70년 대를 보내면서 모두와 함께 기억 속에 되새겨 보고자 한다- 양혜숙

 

 

작가의 글 - 이현화

읽어보신 적 있어요? 이조실록. 거 참 대단하더군요

아무튼 지난 그 무지막지한 불볕더위를 새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요. 그 엄청난 분량의 페이지들이 온통 드라마로 꽉 채워져 있더군요. 정말이지 "사실"그 자체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는 없을 것 같아요 역사. 그 속엔 비극도 희극도 없는 게 아닐까요? 슬프지도 우습지도 않은 극. 오직 관조만을 요구하는 순환의 기록일 뿐이 아니겠느냐 한다면 어체가 있겠죠? 그렇죠? 헌데 기가 찰 노릇은 그 으시시한 전제군주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도 겁 없이 붓끝을 달렸던 그 선비님들의 기개였죠. 물론 성은을 칭송하는 과장된 미사여구가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영장따위 없이도 얽어매다 포도청에 가둘 수 있고 재판이란 게 그 시대에 있었건 없었건 손가락질 까딱 하나로 어느 누구의 생명이라도 걸어갈 수 있었던 지엄한 생존 군왕의 치부까지도 기침소리 하나하나 숨소리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해 내려갔으니 목덜미가 서늘하도록 끔찍하게 느껴질 수 밖에........

하여간 그 시대에 그런 기록을 남길 수가 있었다는 그 자체가 기록 못지 않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닐런 지요. 아무튼, 이조 실록, 거기 다 있더군요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극단 민중극장 단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복근 '산넘어 고개넘어'  (2) 2023.12.03
전진호 '밤에만 날으는 새'  (1) 2023.12.02
김지일 '영웅 만들기'  (1) 2023.11.30
이재현 '사파리의 흉상'  (2) 2023.11.30
곽노흥. 김흥우 공동작 '하늘의 울림'  (2) 20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