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지일 '영웅 만들기'

clint 2023. 11. 30. 17:40

 

 

이 작품 <英雄 만들기>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의 전제로 시작된다.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가 24시간 이내에 7쌍이나 참변을 당하게 된다. 설정은 비현실적인 우화이다.

부의 축적을 인간지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재벌총수. 그것은 재벌이라는 특정한 인물만이 아니라 지배욕을 가진 모든 인간, 계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예식장에서 결혼하면 죽는다는 소문이 확산되어 그룹 전체에 타격이 크자 회장은 엄청난 경품을 걸 듯 아파트에 월급까지 무상으로 주는 이벤트를 크게 내걸고, 무엇이 옳고 그름을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회장의 막내딸은 우리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아 온 창백한 지식인의 유형이다. 아빠의 이런 결정을 반대하지만 어쩔 수 없다. 끈적끈적한 밑바닥 인생으로부터 신분적 탈출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근달과 권영자는 오직 잘살기 위하여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그들은 각자 결혼 상대자도 없는 와중에도 결혼 신청을 하다가 알게 되어 1순위로 이 예식장에서 결혼을 올리게 된다. 그룹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매스컴의 선정주의, 센셔날리즘에 의하여 엉뚱한 인물이 영웅처럼 우상화 되어지는 사건. - 그것은 매스컴이 어떻게 지배자에 의해 대중조작에 이용되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리고 결말은 우화가 된다. 조작에 의하여 신분적 탈출에 성공한 강근달과 권영자가 회장 막내딸의 폭로로 자기들의 모든 사생활이 감시되고 조정된다는 말에 자각하고 여기서의 탈출, 즉 죽음으로써 지배자의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린다. 거대한 재벌과 막강한 매스컴이 연출하는 영웅놀이는 건달과 날라리가 죽음을 통해 스스로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데서 막을 내린다. 대중조작의 허위를 깨뜨리는 역할. - 영자와 근달이 분신한 누구처럼, 투신한 누구처럼 열사가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우화일 수밖에 없다.

 

 

 

극단 미추의 『영웅 만들기』는 1990년도 한국일보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작품상과 대상을 받았다. 90 3월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무력한 개인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조직의 치부를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김지일씨가 극본을 쓰고 극단 미추의 대표인 손진책씨가 연출을 맡았다. 이 작품은 창작 뮤지컬 불모지인 우리 연극계에서 민간 극단이 독자적으로 2억이라는 제작비를 투입하여 제작하고, 1주일 공연 기간 동안에 6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면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작가의 글 김지일

연출가 손진책과의 11째 작품이 바로 이 <英雄만들기>이다. 한 연출가에 의해 같은 작가의 열개 작품이 연출되어 진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같이 작업했던 마당놀이나 창극에서 이미 느꼈던 것이지만 이번 작업에서 손진책의 또 다른 능력과 열성을 발견한 기분이다. 특히 몇차례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면서 출연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기에 감동하였다. 많은 뮤지컬의 제작 현장에 있었던 나로서는 또다른 경험이다. 만일 이번 공연에서 작품은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공연만은 평가받게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 작품에서의 문제는 두 주인공의 죽음이 당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극적 리얼리티가 살아나지 못하고, 따라서 연극적 힘을 맥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결말을 연극적으로 유보하고 관객에게 이런 경우 열사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우화를 선택했다. 발단이 우화라면 결말 역시 우화일 수밖에 없다는 이치에 앞서서 그들의 우화적 행동- 죽음을 이 시대와 우리 모두가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극적 힘의 문제, 관객의 납득에 의한 동의의 문제는 남는다. 그런 것을 위한 몇가지의 장치를 설정했는데 그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 또는 사족에 불과할 것인지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다. 만일 내가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우화의 기미를 발견한다고 하면 그것은 변명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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