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재서 '운수대통, 만사형통'

clint 2023. 10. 18. 10:39

 

사내의 현직은 고물장사이다. 어느 날 사내는 고물을 정리하다가 저마다의 고물들에 얽힌 사연들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상상에 빠져든다. 처음에는 자신이 연기자가 되어 관객들을 모아 놓고 굿한판을 신명 나게 벌이며 사람들의 운수대통을 빌어준다고 한다. 비나리를 비롯해서 타령. 대중음악. 여러가지 노래를 하며 여흥을 돋은 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상과 부부상. 또한 경제· 정치· 윤리, 도덕,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좌충우돌하며 기염을 토하는데 마침 고물수집에서 돌아온 마누라는 그 모양을 보고 발길로 힘껏 걷어찬다. 아뿔사! 일장춘몽이었던 것이다. 번쩍이던 물건들을 모두 다시 고물로 변하여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허황되게 우쭐대었던 자신은 다시 본래의 고물 장사이고…

 

 

한 시대의 정치·경제·종교·문화를 한데 모아 재조명해보는 "운수대통, 만사형통는 그것들이 어떻게 변형하여 퇴색하여 어떻게 왜곡 날조되어 부패하며 또 어떻게 진실을 사실이란 덮개로 위장하는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보는 한판의 "씻김굿"이다. 무릇 역사를 호도하려는 지배자와 이를 거부하려는 피지배자와의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합리로 위장된 모랄과 자연 그대로의 반모랄은 늘 충돌하여 피를 흘린다. 이를 씻김으로 풀어보는 한 남자의 익살과 해학은 웃음으로 넘실거리고 그 웃음 뒤에는 일그러진 자화상처럼 흉한 세태가 자리를 잡는다

 

 

작가의 글 / 박재서 : 고사라도 지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암울하고 캄캄한 시대의 이야기였다. 악몽도 지나친 악몽이었다. 거리에는 매케한 폭력이 난무하고, 나라는 완전히 두 패로 갈려서 한패는 짓밟히고, 뚜드려 패고 또 한패는 눈 짓물러 눈물도 못 홀릴 정도로 터지고, 잡혀가고 끌려가던 시절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한데 모자이크 했던 것이다. 공륜이라는 괴물 앞에 벌거벗겨서 떨며 손 비비며 공연 만하게 해달래야 했던 치욕스런 과거의 기록이다. 그 잘난 걸 써 놓고 잡혀가면 어쩌나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한대라도 덜 얻어 터질까 하고 비겁하게 움츠려 들어야 했던 시절의 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나쁜 놈들의 모습을 겉만 슬쩍슬쩍 그려본 것이다. 뭐 그들에게 인간성이 있다고 속 깊이 그려야 하는가, 사람이 아닌 자식들의 인간성을 표현하는가, 하기도 싫고 할 실력도 없었다. 그래서 욕질반, 침질반 썼다. 그걸 가지고 정직하게 연극하는 어느 신사들이 내게 욕설을 돌려 댔었다. 입맛이 썼다. 오장육부까지 죄 꺼내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꿈같은 악몽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뭐 그때보다 더 나은가? 나아진 건 사실이나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걸 난 증명할 수 있다. 어떻게 한나라와 민족을 특별선언, 또는 특별법이라는 어린애 같은 수작으로 눈가림하고 아옹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의 직업을 일컬어 <특별선언전문가>라고 했다. 특별시대 전문가들의 어처구니없었던 어제의 이야기였다. 어른이나 선생이나, 왕초나, 조무래기나 다 비슷하게 술에 취해서 음주운전, 음주보행, 음주성교, 음주 취침, 음주양육을 하던 갈지자의 어지러운 시절의 모자이크, 별 거 아니란 말이다. 원이 있다면 그런 걸 한데 모아 고사 지냄으로 다 잊어버리고, 다 씻김을 받고 싶을 뿐이다. 열차의 레일처럼 쥔 자와 놓친 자가 영원히 달려가는 그때의 모습이 안타까왔다. 특히 남북의 사정은 더 했다. 영원히 서있는 언덕 위의 하얀 두 집, 명색만이 부부, 남남인 진실로 남남인 남과 여로다. 네가 먼저 내 잠자리로 들면 못이기는 체 끌어안겠다고 되뇐다. 절대 죽어도 나보다 먼저 네게 가지는 않으리라는 게 속셈이다. 그쯤이면 좋다. 그걸 자꾸 엉뚱한데 써먹는다. 한참 묵혔다가 요상하다 싶으면 툭 터뜨려서 온통 나라의 미련한 상하가 통일이 되서 고향 가는 줄 알고 짐 꾸리게 한다. 그것도 싱거우면 물이다, 불이다 하며 돈 걷는다. 바보상자에 얼굴비치는 걸 목적으로 그 아까운 돈 싸 들고 줄 서게 만든다. 그런 엉터리 시대의 모자이크, 자화상, 보기 싫은 이야기들, 뒈져버려라! 왜 공연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보는 사람 신나게 웃기는 게 아닐 것이다. 신경질만 바락바락 나게 하는 독약 같은 정경일 게다.

 

박재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