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미리 '역할 없는 사람들'

clint 2023. 10. 20. 08:24

 

"다 이해하는 척, 다 아는 척하지만 자기만 이해하고 자기만 알잖아, 엄마는."

엄마 '해은'이 오랜 친구 '원영'과 만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서우'.

서우는 '학준'과의 만남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처음의 확신은 흔들린다.

해은과 원영 역시 헤어짐을 결심한다.

관계의 끝에서 다시 만난 네 사람.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우린 늘 주인공이란 생각 속에 살고 있다. 역할에 대한 기대도, 부담도 크다.

역할이 없는 인생은 '루저'에 다름 아니다.

현실은 막상 그렇지 못하다. '역할 없는 사람들'이기에 역할에 목마르다.

부재와 갈구는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역할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막장드라마에 가깝게 보인다.

<역할 없는 사람들>의 인물들이 막장드라마 주인공의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솔까' 막장드라마 아닌 인생이 또 얼마나 될까? 그 상투적 결말을 어떻게 세련되게 빠져나오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지만 거기서 인생의 리얼리티를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드라마의 힘이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인물들, 그것이 <역할 없는 사람들>의 힘이기도 하다. [이성곤 드라마투르그]

 

 

<역할 없는 사람들>은 마치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등장인물들의 엄청난 대사가 아무것도 없는 무대 위를 빈틈없이 채우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는 엄마 세대의 불륜 상황, 딸 세대의 연애 상황 등을 엄마 커플과 딸 커플을 통해서 보여준다. 주로 대사를 통해 인물의 감정 중심으로 그려낸 작품인데, 연극 대본의 지문도 굉장히 상세했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자리한 장소와 상황, 배경 등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말 - 김미리 2022 <집으로 가는 길>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역할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실패에 대한 번듯한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잘못을 해명하거나 상대를 탓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모른다.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다. 이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대화한다. 그럴수록 관계는 점점 끝을 향한다. 대화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화의 시도는 역할에 실패한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믿고 있던 생각이 바뀔 수 있고, 상대에 대한 마음이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할이 없더라도 함께하는 시간은 연장할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