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정숙 'made in Japan' (부제) '배정자를 아시나요'

clint 2023. 10. 21. 21:24

 

배정자를 기억하는 사람라면 배정자라는 이름 앞에 요화라거나 매국노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훨씬 더 배정자를 떠올리는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친일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보면 배정자보다 더 친일적인 행위를 한 자들이 몸 빠른 변신으로 해방정국의 공신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회의 요직에 있으므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관을 흐리게 하고 있다. 흔히 아는 대로 배정자는 우리나라의 여인 분남이로 태어나 역적의 딸로서 아비의 벌을 받아 노비가 되고 그 어미가 밥이나 먹고 살라고 관기를 만들었으며 남자들의 노리개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항한 조선의 여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중이 되거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 되어서도 남자 중들의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었던 배정자는 드디어 이 땅의 삶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김옥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하니 김옥균이 그녀를 이토오에게 양녀로 소개한 것이다.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할 일 만을 넘보는 이토에게 조선을 등진 아름다운 여인은 활용가치가 대단히 높은 재원이었던 것이다. 배정자를 첩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밀정교육을 시켜 조선에 대해 갖고 있는 원한을 십분 활용하여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켜 나간 것이다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독립논리로 배정자를 볼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생존논리로 그녀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택할 수 없었던 조선 여인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원하든 원치 않든 할 수밖에 없었던 매국의 행위들은 그녀가 자신의 잘잘못을 논하기 이전에 망국의 조정과 그 대신들의 부정부패와 어울려 번질 수밖에 없는 곰팡이와도 같은 운명이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다시 배정자의 삶을 산다면 그 옛날 믿음 좋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 부인했던 것처럼 우리의 생존을 담보로 우리의 선택이 어떡하겠노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누가 돌을 들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통일을 바라는 20세기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돌을 들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친일을 말하고 용서를 빌고 화해로 우리의 처음을 찾아 대망의 21세기로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손가락질하기 쉬운 여자 배정자를 다시 보고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배정자는 누구인가?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배정자의 본명은 배분남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 집안이 산산조각 나고 눈까지 먼 어머니는 어린 배정자를 데리고 유랑생활을 하다 관기로 만들거나 통도사에 맡겨 그녀는 여승이 된다. 그러나 일년도 못되어 그녀는 뛰쳐나오고 1885년에 아버지 친구였던 밀양부사 정병하의 도움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 그녀에게 도움을 준 이들이 개화파 인물인 안경수와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다. 배정자는 김옥균의 천거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후, 이토오에게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는다. 그때 이름도 배정자로 개명한다. 1894년 귀국한 후, 본 격적으로 일본 세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앞잡이 노릇을 한다. 1910년 이후에는 아카시의 앞잡이노릇을 하여 한민족 탄압에 앞장섰다. 1920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였을 때는 봉천 총영사관 촉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를 왕래하며 군사첩보자로 활약하며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만주일대를 차지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 지령을 받고 간도, 상해 등지에서 항일 독립투사를 붙잡는 일을 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70세의 늙은 나이로 종군 위안부를 징집하는데 앞장섰다.

 

 

해방 후, 1948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통과되자 검거되어 감옥살이하다 반민특위 해산으로 풀려난 후 불행하게 살다 1951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81세로 사망하였다.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에 걸맞게 늙은 나이에도 항상 파마머리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녔다.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서울과 일본에서 술한 염문을 뿌리고 다닐 만큼 남성편력도 화려했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인 현영운과 1년 살다가 이혼한 뒤, 동생으로 부르던 박영철과 다시 결혼하여 또 1년만에 헤어졌다. 이와 함께 일본인 오하시, 은행원 최모, 전라도 갑부 조익헌, 대구 부호의 2세 정경진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57세로 은퇴할 때에도 25세인 일본인 순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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