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황수아 '마지막 포에티카'

clint 2023. 10. 14. 19:16

 

“여보, 잘 있어요. 난 포에티카로 가요.” 라는 쪽지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아내를 쫓아 포에티카로 떠나려는 남자가 있다. 그는 시인이다. 시인이 포에티카로 떠나려는 이유는 아내가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아내를 뒤따라 포에티카로 가는 것은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에티카 행 열차는 태풍 출몰지역인 뢴트겐에서 운행을 멈춘다. 고군분투하며 암표를 구하는 사이 시인은 조금씩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를 쓰고 모든 걸 버리고 포에티카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난다.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승무원, 주인, 고아, 약장수, 이민자, 남자, 여인, 노인, 승객이 그들이다. 이들을 만나면서, 그들과의 대화로 시인은 초조하고 불편한 마음에서 한결 여유롭고 차분한 모습으로 변한 것 같다. 그리고 벚꽃이 핀 그날 아내를 다시 만난다.

 

 

캐나다의 신경외과 의사였던 와일더 펜필드는 측두엽에 전기를 흘려 보내는 실험으로 특정기억이 되살아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환각을 보는 듯한 환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실험 이후, 인간의 뇌는 점점 베일이 벗겨졌다. 우린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뇌안의 뉴런이 시냅스를 통해 다른 뉴런과 연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성된 회로가 사라져버리는 일도 있지만, 때론 지식이나 지혜가 되기도 하고, 때론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포에티카>는 마치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살아남은 시냅스가 만들어준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기억일까, 아니면 환각일까?

(이홍이 드라마투르그)

 

 

작가의 말 - 황수아(2022 <가로묘지주식회사>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포에티카"라는 곳에 대해 규정짓지 않았다. 관객 저마다의 삶의 형태에 따라 그 의미가 변주되기를 희망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관념을 공간화 시키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무대 위의 많은 오브제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뢴트겐에 출몰하는 태풍처럼 삶에는 고난과 역경이 끝없이 불어닥친다. 그 태풍 속에서 우리 곁의 누군가와 함께이기를. 그런 작은 희망을 담아 이 작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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