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강월도 작 '주인과 그의 착한 세입자들' (문의 희비극)

clint 2017. 2. 8. 14:32

 

 

줄거리
'문의 희비극' (2막, 16장)은 국적 없는 "신곡"이 아닌, "인곡"이라는 부제가 지적하듯, 지상의 어느 국적 미상의 현대 도시에서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희비극적 양상을 보여준다.
현대 생활조건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문 13개로 구성된 무대에서 연극은 문이 열리고 닫히고,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오는 의식적 춤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문 뒤에는 세입자들이 들어 살고 주인이라 할 건물주는 무대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하면, 세입자들은 그들을 관리하는 대리주인이라 할 임대계약자가 그들을 "착취"한다는 주장으로 그들의 갈등은 현대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주인공 바실은 근래에 입주하여 그들의 아파트를 인수하게 되는데, 그는 어딘지 "덜 떨어진" 인물이라 할까. 그의 세심한 자질이 다른 세입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전에 있던 "관리자"에 비해 그의 세입자들과의 갈등은 처음부터 극심하고 점점 악화되어 간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그의 덜 떨어짐의 시행착오는 그 비극적 결말을 예측하지 못하는 한에서 우리를 웃긴다. 이러한 희비극적 상황 속에서 젊은 세대의 세입자들은 사랑을 추구하고 오해해도 하고 그러다가는 싸우기도 한다. 이들의 얽혀 사는 모습에서 세 쌍의 극적 대조를 볼 수 있다. 연극의 초점은 바실과 세입자들 간 불화의 관계이다. 그가 그들을 관리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착취한다는 실정에서 그의 좀 덜 떨어진 자질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의 선의의 행동이 오해되고 호의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가 벌리는 모든 일이 그에겐 벅차기만 하다. 결국 그는 수습을 못하고 쓰러진다. 이 연극에서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가 와 봤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실과 다른 세입자들은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인생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었다.

 

 

 

 

'작가의 말'
'문의 희비극'에 붙여 - 문의 역학
1. 연극과 춤
춤을 연극 못지않게 즐기는 한 사람으로, 나는 이번에 춤에 가깝게 접근하는 작품을 구성해 보았다. 언젠가는 어느 기발한 안무가가 이 작품을 "문들의 춤" -한때 '문들의 난무'를 이 연극의 제목으로 생각해 보았다 - 으로 완전히 시도해 볼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현대 생활조건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문 13개로 구성된 무대에서 연극은 문이 열리고 닫히고,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오는 의식적 춤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아래와 같은 문의 역동적 현상의 변형을 춤으로 생각해 본다.
1. 문을 열고 들어간다.
2. 문을 열고 나온다.
3. 문을 두드린다. 열린다. 들어간다.
4. 문을 두드린다. 안 열린다. 기다린다. / 돌아간다.
5. 문을 두드린다. 안 열린다. 문을 부순다.
6. 문이 열리고 아무도 안 나온다.
7. 문에 가면 문이 열리는데 멈춘다. 돌아간다.
8. 문에 간다. 잠시 멈췄다 돌아간다.
(제9막 후막 1 참조.)
연극을 음악이나 미술처럼 듣거나 보라고 하면 이 말은 쉽게 이해될 수 없을지 모르니, 연극을 춤처럼 보라고 말하고 싶다. 연극의 말을 일상 언어와 같이 듣는 것이 아니라, 춤의 몸짓과 움직임, 그리고 춤의 음악으로 먼저 듣고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다음으로 문예(시와 소설)에서의 말과 같이 듣고 이해하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일상 언어를 듣는 이해관계에서가 아니라 한걸음 물러서서 말의 음률과 광채를 느껴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발성이 좋은 배우가 중요하다. )연극을 춤과 같이 또는 음악과 같이 보라 했다고 해서, 그럼 왜 춤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러 갈 것이지 연극을 보러 가는가, 하고 반문한다면, 그야 연극을 보러 가서 춤도 보고, 음악도 듣고 미술도 보고 문예도 들으면서 연극을 그와 같이 보라는 것이다. 아, 물론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연극의 이러한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고 미숙한 또는 사기 치는 연극을 올리며 비싼 표를 팔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 공연엔 관객은 가지 말거나, 거기서 걸어 나올 식견과 대담함이 있기를 바란다
2. 문의 비극 그리고 희극
이 연극의 제목을 짓는데 있어서 원제"주인과 그의 착한 세입자들"은 사르트르의 작품 [악마와 착한 주님]을 연상하려 하였다고 기억한다. 두 제목 다 너무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을 반영한다고 보겠다. 한국에 돌아와 기독교적, 관념적 제시를 벗어나 좀 더 극적인 제목을 찾으려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 연극의 무희 적 요소를 감안하여, "부서진 문" 또는 "가시문의 희비극"이니 등의 제목을 생각해 보았다. ("가시문"은 가시 돋친 문일지도 모르지만, "갔다"는 뜻에서 낡았거나 부서진 문을 뜻할 수도 있고, 또 우리 옛말에는 저승에 가는 길에 이승을 떠날 때 나가는 문이라고도 한다.) "문의 희비극"은 누가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어 줄 것이지, 문을 잠그고 버티다간 문이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은 부서진 문의 비극이요. "희극"은 부서지는 문의 희극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촌락의 공동생활 속에서 현대적 뜻에서의 문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집단적 공동체로 성에 성문이 있거나 부락의 입구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보초가 서 있었지만, 성이나 부락 안에서의 문들은 바람을 막고 햇빛을 차단하는 물리적 목적이 그 주된 기능이었다.
현대에 와서 문은 개인의 고유한 공간의 상징이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아파트와 같은 생활조건에서는 문은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작고 깊은 세계의 성문이요 출구이다.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문은 원시적, 생물적 지역소유의 인간화, 문화화의 상징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가족제도를 벗어나 소 가족제도 속에서, 더욱 개인 단위로 주거를 마련하는 실정에서 문은 그 모든 현대적 생활조건의 상징이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로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마련해서 그 문 뒤에서 사는 solipsist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괴로울 때 우리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홀로 위로한다. 문을 잠그지 못할 때, 문이 부서졌을 때는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길을 걸어야 하듯 부끄럽거나 세상이 두려워진다. 편하게 잠들기 위해 단단한 문을 잠그고 잔다. 기독교 성서에서 문을 두들기면 열릴 것이라 했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문을 두드린다. 어떤 땐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그 문을 두들겨 부수고 싶다. 어떤 땐 문을 두들겨 부수기도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참고 기다렸어야 했을지 모른다. 당신의 문을 누가 두들길 때 당신은 문을 열어 줄 준비가 되여 있어야 한다.
(이조 말 우리는 우리나라를 개방할 준비가 불행히도 되여 있지 않았었다.) 어떤 땐
우리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을 거부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잠시 누릴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문을 잠그고 안 열어 주는 고집, 문을 두들겨 부수고 쳐들어가는 정당성, 문은 부서지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절망,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실망 --- 우리 인생이 문을 열고 닫는데 걸려 있는 것 같다. 한때 이 작품에 "문을 열고 닫는 연습"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나는 모국을 떠나 30여년 미국에서 살기도 했다. 이제는 미국을 떠나 고국에 돌아와 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문을 두들겼다. 개인적으로 내 집 문에는 특이한 경고를 붙여 놓았다. "전화하고 오세요!"그래서 나는 기대하지 않은 방문객들(특히 안기부에서 온 불청객 등)이 문을 두들겨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문의 역학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구축해야 할 과제이다. 개방된 사회와 개방된 개인, 동시에 독자적으로 고유한 시간과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와 개인의 공간, 이런 이상을 살려가는 창조적 과제인 것이다.
3. "보이지 않는 주인"
이 연극의 원제가 "주인과 그의 착한 세입자들"이라 했는데, 그때 60년대에 젊은 마음에서 연극을 쓸 때 그 원제로 제시하려던 것은 이 연극에서 주인이라 할 건물주가 전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극적 여건은 그의 등장을 요하지 않았고, 관객도 그의 등장을 기대하지 않는다. 극이 끝나고 그 다음날 그가 법원에 출두할 수 있겠으나, 아마 그는 출두하지 않고 그의 변호사가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하였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베케르의 유명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도 불구하고,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어딘지 멀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는 우리가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차라리 그가 없다고 가정하고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 연극에서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주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가 와 봤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실과 다른 세입자들은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인생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고도"가 와 봤자 노상에서 평생 떠돌이로 살던 두 인물들에게 큰 수가 날 것 같지 않다. "고도"라는 분이 뭐 기적 같은 것을 믿을 것 같지도 않고, 또 그 가련한 두 인물에 무엇을 해주겠는가? 한국의 어느 연극 평론가를 위해 덧붙이겠는데, "보이지 않는 주인"이 이
연극의 "주제"가 아니다. 단, 그런 현상이 연극의 배경에 있다는 것 일뿐 연극을 즐기는데 있어서도 절대로 필요한 부분도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문의 역학" 또는 그것의 사회 심리학이라 할 측면도 연극의 전개에서 볼 수 있지만, 그런 것도 "주제"가 아니다. 예술 작품으로, 주인공 바실의 삶과 죽음, 그 주변의 운명이 이 연극의 "주제"라면 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