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근삼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演技'

clint 2016. 10. 15. 22:11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는 작가가 2년여의 난산 끝에 태어난 작품으로 어느 늙은 배우가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에 겪는 고단한 삶을 통해 인간이 황혼기에 느끼는 고독감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세속적인 명배우의 굴절 많은 화려한 삶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이름 없는 배우의 일상적 삶을 특별히 꾸임이 없이 그리는 가운데 인간이 노년기에 겪어야 하는 사건이 무엇이고 그들이 이 사건을 통해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이 어떤 것인가를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88년 극단 성좌가 《아카시아 흰꽃을 바람에 날리고》라는 제목으로 권오일 연출과 윤주상 주연으로 공연한 바가 있는데 희곡의 우수성과 주인공 역을 맡은 윤주상의 열연에 힘입어 좋은 평가를 얻었다. 관람자 중에는 잔잔하게 울려오는 초라한 인생의 비애감과 진한 감동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오래 전에 신파극 무대에서 엑스트라에 가까운 작은 역할만을 맡으면서 배우인생을 마감한 노배우 서일은 이제 은퇴하여 서울대학의 넓은 교정이 마주 바라보이는 언덕바지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마지막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그는 생활비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과도 같이 살지 못하고 얼마 전에 죽은 아내가 유일한 재산으로 남겨놓은 점방에서 매월 받는 30만원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별로 하는 일이 없이 한가하게 낡은 대본을 읽으며 가끔씩 옆방에 사는 김밥집 과부가 자기 방에 들어와 김밥을 주면서 원로배우라고 치켜세우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들으면서 혹시 그 여자가 자기에게 청혼을 하지나 않을까 하고 잔득 기대하고 있다. 어쩌다 결혼식 주례 청탁이 들어와서 기분이 좋았다가는 주례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졌다는 전화를 받고는 실망하기도 하고, 옛날의 극단동료가 연극을 하자고 해서 연습을 하기도 하지만 금방 그것이 허무맹랑하게 이루어진 일임을 알게 된다.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외가가 있는 도시에서 소극장을 꾸미고 의욕적으로 연극활동을 벌리겠다는 소리를 들어도 자식을 도와줄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매달 솔솔하게 들어오던 원로배우 보조금도 이유 없이 지급이 중단되지만 융통성이 없어서 달리 손을 쓰지도 못한다. 그는 우연히 굴러 들어온 연극상의 상금으로 잠시 생활이 펴는가 했는데 신문기자의 농간으로 본인의 의사와 달리 상금을 받지 못하고 지조가 있는 예술가라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중에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김밥집 과부는 돈 많은 은방 주인에게 시집 을 가버리고, 외로운 마음에서 얼마 전에 연극동료들이 자신을 지조 있는 예술가라고 칭송했던 술집에 다시 찾아가 보지만 사람들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지조 있는 영웅에서 패잔병이 되었다는 심한 좌절감에 휩싸여 혼잡한 네거리를 횡단하다가 마침내 질주하는 자동차 에 치여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이 허위적인 유명인사에 의해 망쳐진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외아들에게 5000만원 짜리 보험금을 타도록 하기 위해 지금까지 생명보험금을 지불해 왔다는 김밥집 과부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들으면서 그런 대로 안도감에 싸여 다시금 망각의 황천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그가 생의 마지막에 보여준 인간적 연기가 매우 능숙하였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창문 앞의 아카시아 꽃이 화려한 태를 뽐내며 만개하여 있다.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는 몇 년 전 ‘아카시아 흰꽃을 바람에 날리고’라는 제목으로 초연됐던 작품. 악극단 출신 노배우의 쓸쓸한 말년을 작가 특유의 유머와 풍자, 위트 있는 대사로 담아냈다. 모노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주인공 비중이 크고 연기력을 필요로 해 중견 남자배우들이 한번쯤 탐낼 만한 작품.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나를 외면한 사람들, 그리고 관객 여러분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독백과 같이
이승부씨는 “이 작품은 삶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느껴지는, 인생이 흐르는 희극”이라며 “30여년간 연기를 해왔지만 이승부 하면 이 작품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근삼 작가는 요즘 연극에 대해 “인간 부재”라고 비판했다. “관객을 깜짝 놀라게만 하려다 보니 무대에 테크닉과 쇼 의식만 가득해. 어떤 인간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는 없고 사건만 벌어진단 말이야.”
대중문화에 밀려 점점 설 땅이 좁아지는 연극계. 어쩌면 이 작품은 평생 연극계를 지켜온 노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연극 속에서 기자가 원로 배우에게 묻는다. 왜 연극을 했느냐고, 후회는 없느냐고.
“…좋아했으니까. 후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해. 인생은 살다 보면 말년기는 후회하기 마련인데. 그리고 결국 이건 내가 택한 일인데, 수많은 역 중에서 내가 맡은 역이 연극이야. 그럼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 역을 해야 하는 게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