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의 전작 중 가장 방대하며 "세계의 역사극"이란 부제가 붙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은 <청년동맹>이 발표된 지 4년 후인 1873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흥미롭게도 작가의 전작에서 한가운데를 정점처럼 위치하고 있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은 2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부는 공히 5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세자르의 배교(敎)>, 2부에는 <황제 율리안>이란 제목이 붙어 있으나 전체 제목에서 분명 세속의 권력자와 인간의 영혼에 존재하는 종교적 인물 사이에 일어나며, 그 둘이 갈등하는 작품임을 곧 알 수 있다. 이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100여 명에 이르고, 극 중의 장소들이 각 막마다 바뀌며 12년간에 걸쳐 극중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 작품은 적어도 그 규모 면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I, II부, 폴 클로델(Paul Claudel)의 <비단 신>(Le soulier de satin), 스트린드베리의 <다마스커스를 향하여>(Till Damaskus) 3부작 등과 비견된다. 자신의 희곡 중 정점을 점하게 될 이 대작에 대해 입센은 1871년 일찌감치 컬덴달 출판사의 사장 헤겔에게 '자신의 걸작'(mesterverk)이 곧 나올 것임을 알렸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의 창작은 입센의 로마 체류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자주 중단되었기 때문에 완성에는 9년의 시간이 걸렸다. 로마 체류 초기에 입센은 여전히 어느 정도 스칸디나비아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청년동맹>이 발표되던 1869년쯤 입센은 본격적으로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적 행사들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공식 사절로 참석하기도 하면서 세계 역사에 대한 관점이 넓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황제와 갈릴리 사람>의 창작동기 중 하나였다. 특히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가 루터파 개신교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혐오하며 그들을 방문하는 일조차 꺼려하던 입센은 이 시기 인간과 종교에 대한 시각도 넓어져 기독교적인 것을 극복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입센은 실존했던 로마 황제로 기독 교리에 따라 교육받았던 인물이 기독교에서 돌아섬으로써 시대의 반동자였다는 사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이 '배교자'라 불렀으나 결국엔 기독교, 즉 갈릴리 사람을 인정한 황제 율리안(Flavius Claudius Julianus, 331-363)에게 관심을 가졌고 교회의 역사가들이 쓴 책자들에서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고 다양한 자료를 모으며 창작을 위한 메모를 했다. 율리안은 361년 황제 콘스탄시우스II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20세에 황제위를 계승한다. 그는 363년 콘스탄시우스 황제가 시작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대승하는 듯했으나 퇴각전에서 치명상으로 전사한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율리안은 갈릴리 사람, 즉 나자렛 예수의 승리를 인정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그는 일반적으로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교만함의 표상으로 여겨졌으나 입센의 당대에는 문제적 인물로 평가되었다. 입센은 특히 이교도였지만 개방적인 심성의 소유자로서 율리안의 숭배자였던 마르첼리누스(Ammianus Marcellinus)의 책자들을 가장 많이 참조했다. 또한 율리안 황제가 스승으로 삼는 신비주의자 막시무스가 언급한, 기독교도 아니고 이교주의도 아닌 "제3의 제국"이라는 개념은 독일 작가 레씽(G. E. Lessing)이 그의 책 『인류의 교육』(Die Erzichung des Menschengeschlechts. 1780)에서 무조건적인 윤리에 따라 끊임없이 보다 높은 도덕적, 정신적인 상태가 되고자 하는 인류를 설파하며 주장한 관점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가 영원히 유효함을 주장하게 될 곳은 바로 이 제3의 제국에서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재의 인간사회에선 그런 상황이 이룩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체 제도, 혹은 종교적 커뮤니티인 제3의 제국을 주장한 것이다.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의 1, 2부에서 율리안의 생애 마지막 12년 간의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들에 엄격하게 충실했다. 율리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기독교화된 로마에 고대 그리스의 문화, 즉 이교주의를 다시 도입하려 하나 결국 실패한다. 제1부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시작으로 아테네, 에페수스, 루테티아와 갈리아 지방의 비엔나까지 이동하면서 10년 간의 시간이, 제2부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안티오키아, 동방의 영토, 그리고 티그리스강 너머의 평원까지에서 사건들이 펼쳐지는 2년간의 시간이 실제 역사와 연대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제1부 <세자르의 배교>는 독백과 방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매우 사실적인 언어로 율리안의 배교를 생생하고도 논리적으로 그린다. 율리안의 속성은 질문하는 것이며 예술가적 속성을 지닌 그는 현세가 아닌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기독교에 끝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배교 과정은 그의 내면의 혼란스러움과 고독, 그리고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톱니바퀴 물리듯 함께하며 진행된다. 그러나 그의 배교가 그 의 내면적 필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마지막 획을 신비주의자 막시무스가 긋도록 함으로써 율리안이 그리스의 이교에서도 기독교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결국 무(無)로 떨어지는 비극을 배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부 <황제 율리안>은 콘스탄시우스 황제가 죽고 율리안이 황제위에 오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황제위가 불편하다. 그럼에도 현군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모델로 삼고 스스로도 현군이 되고자 한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며 그리스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 즉 이교도와 기독교도가 함께 조화롭게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 함께 조화로이 살아갑시다. 나의 조정은 어떤 견해를 가졌든 모든 유능한 사람들에게 개방될 것이오. 위선이 없는 조정의 범상치 않고 고결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줍시다- 아첨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여기는 분명 유일한 조정이 될 거요.“
여기서 "세상에 보여주자는 말은 그의 궁정이 곧 아첨꾼들의 소굴이 되고 그렇더라도 그런 상황을 덮고 연극을 하자는 말에 다름아니라고 토릴모이는 지적한다. 율리안은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어도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고, 현군으로서의 정치철학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배교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진실을 멀리하며 결국 연극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 "세계의 역사극"이란 부제를 붙였다. 그 이유를 그는 이 작품이 세계의 삶에서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개의 힘 사이의 투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그 투쟁은 어느 시대에나 반복될 것이라”는 이 작품의 보편성까지를 주장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격변의 시대였기에 입센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힘"과 그 사이의 "투쟁"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들, 1866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보오) 전쟁, 1870년 프러시아-프랑스(보불) 전쟁과 프러시아(독일) 통일 등의 역사적 사건들과 우주 속 인간의 위치를 재인식시킴으로써 기독교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다윈의 『종의 기원』(1871), 헤겔,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후자 두 철학자의 영향을 받은 염세주의 철학자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 그 뒤엔 니체 등의 철학이 입센이 살고 있던 격변의 시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입센의 당대인들은 인간과 인간관계, 제도들, 관습들 및 인간 삶의 제반 현상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뜸과 동시에 많은 것들을 의심했다. 그들은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많은 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입센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럽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불확실의 시대에 살면서 입센은 황제 율리안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철학을 통해, 로마가 기독교 화되는 과정에서의 혼란과 불확실함이 자신의 당대를 은유하기에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가적 관점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지 않다. 그는 역사 속한 실존인물의 성쇠, 그 과정에서 있었던 그 인물 의회의, 고민, 갈등을 그린 것이다. 율리안에 대한 입센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다. 역사와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부정자의 역할과 부정의 정신을 입센이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부정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현 상황에서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객관화하면서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 입센이 평생에 걸쳐 고수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런 부정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로 “고립과 고독"이라고 입센의 역사극을 천착한 뵤른 헴메르(Bjorn Hemmer)는 매우 적절히 지적했다. 로마 시대의 율리안이 그랬을 것이고, 입센 역시 그랬다. 입센은 특히 황제 율리안이 생의 마지막에 경험한 것을 자신이 경험한 것과 동일시했다. 죽어가는 황제가 특히 가슴 아파한 것은 자신의 업적은 냉정한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반면, 자신의 대척자들, 즉 나자렛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따뜻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이 넘치는 마음속에 깃들어있다는 점이었다. 발표되는 작품들마다 특히 고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오해와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는 것을 타국에서 경험해온 입센은 업적을 쌓았지만 백성들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황제 율리안의 영혼의 변화에 공감했다. 이런 점은 입센이 자신이 창조한 극적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한 측면이지만, 많은 연구자는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서 위에 거명한 철학자들의 영향을 읽어냈다. 브라네스는 "확신을 가지고 전파력과 발전을 위한 이상의 힘을 믿는 입센의 낙관주의적 속성을 전제로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 이런 철학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미 <브란>이 키르케고르를 그린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서도 이 덴마크 철학 자의 영향을 브라네스는 보았으며, 당시를 풍미하던 결정주의, 그리고 저항 할 수 없는 "세계의 의지"(Weltwille)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영향도 읽어냈다.
다음으론 헤겔의 영향이다. 이 독일 철학자의 철학 체계에 따르면 이 세계는 이원성의 각축장이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서 이 이원성의 각축은 분명하다. 기독교와 이교, 영과 육, 신의 요구와 황제의 요구, 도덕적 선과 감각적 미, 자유와 필연, 세계의 의지와 개인 의지의 이원성이 각축을 벌이는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이것들은 서로를 껴안고 화해하여 합일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제3의 제국"이 탄생되어야 한다고 입센은 이 "세계의 역사극" 에서 주장했다. 물론 이 제국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미래에 와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논리를 펴면 입센은 비관주의자이며 입센 자신도 가끔은 그렇다고 인정했다. 또 한 가지, 극작 계획 자체에 변경이 올 정도로 큰 영향은 니체에게서 왔다고 연구자들은 보았다. 니체의 첫 저서인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은 1873년 봄에 출간되었고 이때 입센은 이 세계역사극의 2부까지 쓰기를 마친 상태였다. 애초 이 작품을 3부로 쓸 계획이었으니 2/3가 쓰인 셈이었다. 니체의 책이 발간된 후 입센은 극작의 계획을 바꾸었고 <황제와 갈릴리 사람>은 궁극적으로 2부의 세계 역사극으로 발표되었다. 입센 자신은 니체에 대해 잘알지 못했다고 했지만 연구자들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의 1부와 2부에서 보이는 차이에 주목한다. 1부는 구성도 견실하고 율리안을 긍정적으로 그린 반면, 2부는 거칠고 논리적 구성에서도 허술한 점이 창작의 중간과정에 니체의 영향이 끼어들어 급하게 변경되어 쓰였기 때문이라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의 집필에서 니체가 끼친 영향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논란은 있지만 이 세계역사극이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보다 나중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어떤 연계점이 읽히는 건 분명하다.
1870년대 초 니체와 입센 두 사람에게서 더욱 중요한 것은 연극의 발전에 대한 견해의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디튀람보스 축제에 서양연극의 연원이 있으므로 두 사람은 당시 유럽에서 연극이 어떠해야 하는지, 넓게 말해 유럽 문화의 모더니티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더니 티는 "역사와 역사 속의 관습들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을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릴 모이는 <황제와 갈릴리 사람>을 입센의 전작에서 '모던'의 시작으로 본다. 그녀는 특히 이 작품에 들어있는 '연극성'에 주목하 는데 그 이유는 바로 전 시대의 연극과는 다른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입센 이 이 작품에서 매우 사실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도 '모던'과 관련이 있다. 그가 창조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 '세계 역사'이기보다는 생생하게 움직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리얼리티의 일루전"이었다. 이 일루전은 인물들의 구어체 대사들을 통해 강화된다. 특히 군중들이 운집하는 장터라든가 축제 마당 같은 장면들에서 보통 시민들인 사회 구성원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매우 현실감이 높으며, 율리안이 세자르 시절 만나는 인물들, 그의 궁정에 오고 가는 인물들 모두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여 결코 스테레오 타입들이 아니다. 입센 자신도 자신이 그리고자 한 것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신의 언어로 말하게 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고, 그렇기에 이 대작은 고전적 의미의 비극이 아니"라고도 밝혔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인물들의 대사들에도 너무 많은 역사적 사실들, 인명, 지명 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도 읽기에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속성과 허무함, 인생의 무상함, 권력자가 되었을 때 변하는 인성, 충성과 배신 등을 주목해보면 어렵지 않게 현대적 읽기를 할 수 있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을 통해 입센은 자신에 대한 그간의 부정적 평가를 불식시키고 독자들이 자신의 긍정적 세계관을 읽어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고국 노르웨이에선 다른 작품들보다 더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판 4,000부는 날개 돋친듯 판매되어 곧 2,000부를 더 찍어야 했으며 1982년까지 4판이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1876년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입센 작품 중 첫 영어 번역이었다.
애초부터 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레제드라마로 쓰인데다 <브란>이나 〈페르귄트〉보다 두 배 정도 길기 때문이었겠지만 <황제와 갈릴리 사람>은 초판이 출판된 후 곧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낭독공연만이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무대화는 1896년 라이프치히 슈타트테아터(Stadttheater, 시립극장)에서 실현되었다. 아들러(Leopold Adler)가 번안한 공연대본은 모두 6막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4막은 '세자르의 배교’에, 2막은 ‘황제 율리안'에 할애되었고 공연시간은 4시간이 넘었다. 1898년, 작가 탄생 70주년에는 베를린의 벨레 알리앙스(Belle Alliance) 테아터에서 기념극의 형식으로 무대화되었는데 서막과 5막으로 구성된 이 공연에는 멘델스존(Ludqig Mendelssohn)이 음악을 썼고 공연시간은 거의 5시간이었다. 스칸디나비아 극장들에서는 20세기가 되어서야 <황제와 갈릴리 사람>을 레퍼토리에 넣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에선 1903년 제1부 '세자르의 배교'만이 크리스티아니아 국립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전체를 공연한 것은 번안 버전으로 1955년 오슬로의 국립극장에서였다. 이 두 극장은 노르웨이 수도의 명칭이 변경되었으므로 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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