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헨리크 입센 '청년동맹'

clint 2022. 10. 2. 15:31

 

 

입센 가족은 3년간 머물던 로마를 떠나 1868년 독일 남동부 엘베강가에 위치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작센주의 주도였던 드레스덴은 철도의 교차점으로서 외국인 거주자들이 많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높은 교육수준과 문화를 꽃피워 '엘베 강변의 피렌체'라 불리던 도시였다. 입센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지루할 정도로 질서가 잘 잡힌 나라"에 머물게 되면서 그가 로마 체류 시와는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드레스덴에 머물게 된 지 1년 후인 1869년 입센은 대작이었던 <브란> <페르귄트>와는 달리 규모가 작아진 5막 희극 <청년동맹>을 발표했다. 노르웨이 남부의 도시 근교를 극적 장소로 하는 이 작품을 입센은 "그냥 희극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청년동맹>은 입센이 당대의 삶을 소재로 해서 쓴 최초의 드라마이다. 입센은 노르웨이보다 여러 면에서 선진인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 소도시들의 삶과 그 삶 속에 뿌리박힌 전통과 관습이라는 '유령'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청년동맹>에서부터 입센은 운문을 포기하고 산문, 즉 일상의 구어체로, 입센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짜 현실에서 쓰는 단순한 언어로 극작하기 시작한다. 드라마에서의 일상적 구어체는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입센이 그간의 운문을 버리고 일상적 구어체를 사용한 것은 무엇보다 <청년동맹>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당대 삶의 흐름과 갈등을 다루고 있어 강한 현실적 색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강한 정열도, 심오한 분위기도, 또 사회와 단절된 어떤 사상들도 들어있지 않다,"고 입센 자신은 브라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대작도 아니고, 운문으로 쓰는 것도 아니었지만 입센은 <청년동맹>의 창작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된 드라마로 무대화에 적합하게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세기 들어 노르웨이에서조차 거의 공연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아마도 <청년동맹>에 주로 옛 풍속희극에 쓰이던 구식 테크닉들, 예를 들어 잘못 전해진 편지, 대화 엿듣기, 잦은 우연의 개입 등의 테크닉으로 서브플롯의 그물망이 짜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동맹>에는 작품에 활력을 주는 생생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겁한 선동가이고,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선 언제든 누구하고든 타협하는 대단한 웅변가인 주인공 스텐스고르, 파산은 했지만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은 영리하고 약간은 심술궂은 다니엘 헤이레, 소심하면서도 대중의 됨됨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언론인 아슬락센 등은 입센이 대가적 솜씨로 탄생시킨 인물들이다.

그러나 <청년동맹>에서 입센이 창조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결코 크지 않은 역인 셀마이다. 남편 에릭의 파산을 늦게야 알게 된 셀마는 남편에게 항변한다: ", 당신은 날 제대로 대하지 않았어! (...) 난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지, 주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난 여기서 가장 거지였어요. 한 번도 내게 무언가를 희생하라고 한 적이 없어. (...) 당신이 걱정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같이 하길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그렇지만 내가 물어보면 당신은 농담하며 웃고 치웠지. 당신은 날 마치 인형처럼 입게 했어. 마치 아이를 데리고 놀듯 날 데리고 놀았고. () 난 당신을 떠나겠어! 차라리 거리에서 연기하고 노래할 거야! 날 내버려 둬요! 내버려 두라니까!"

셀마의 이 항변은 나중에 발표되는 <인형의 집>의 노라가 한 말로 착각할 정도이다. 브라네스는 셀마가 충분하게 묘사되지 않았다며 그걸 보충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드라마를 써야 할 것이라 했는데 이런 의미로 보면 노라의 창조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른 인물들인 스텐스고르와 아슬락센의 대사에도 후에 창작되는 인물들의 싹이 그대로 들어있다. 선동가이자 웅변가이며 소명의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청년동맹'을 결성하는 스텐스고르는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고 자유를 설파하는 소명을 받은 인물이며, 이 세상에 울려 퍼질 "하나의 목소리"라고 확신한다며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 공기 중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빛과 공기만이 있어야 할 곳에 우울함과 억압이 만연하게 하는 과거의 부패라는 유령 말입니다. 우리 이 유령을 다시 몰아냅시다!“

스텐스고르의 입을 통해 나중 <유령>에서 알빙 부인이 말하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이 언급된다. 신문을 읽는 대중을 비판하는 아슬락센의 말엔 나중 <민중의 적> 에서 스토크만 박사가 주장하는 것, 즉 늘 다수가 그르며 진정으로 옳은 쪽은 소수라는 작가 입센의 견해가 비슷하게 언급된다: "나 스스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신문은 지지해 줄 많은 대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많은 대중은 나쁜 대중이다. 그 대중은 모두 지역의 지방성의 일부이다. 나쁜 대중은 나쁜 신문을 요구한다."

 

 

 

<청년동맹>은 노르웨이의 지방도시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지방색 짙은, 나중에 입센이 쓰게 되고 대가로서의 솜씨를 인정받게 되는 사회문제극의 효시가 된다. 입센의 전작을 영어로 번역하고 작품해설들을 깊이 있게 붙인 멕팔레인(J. W. McFarlane)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며 이 관점을 강하게 한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특권의 오만함, 고관의 오만함과 부패; 여성들의 사회적 좌절; 투기꾼들의 무책임함; 요란스레 떠벌이는 이상주의 이면의 이기심: 요란한 말의 무의미함과 그 말을 발설하는 자의 공허함; 언론의 위선과 '좋은' 언론 매체는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 마지막으로 아들들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려는 아버지들의 죄악." '희극'이라는 부제가 붙었기 때문인지 여러 쌍의 약혼이 발표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청년동맹>은 현재의 독자/ 관객에겐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기회주의자이긴 하나 타지역 출신이 등장하여 지역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더라도 그 지역민들 개개인의 인식의 총화가 모아진 변화가 아니라면 결국 케케묵은 지역의 구습은 사라지기 어렵다는 것을 이 작품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년동맹>의 세계 초연은 1869년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있었다. 관객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했다. 그러나 상연이 시작된 지 이틀째부터는 극에 찬성하는 관객들과 반대하는 관객들의 논란이 요란했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자신들이 공격당했다고 생각하는 측에서의 데모도 이어졌다. 이 논란은 이후로도 팸플릿과 신문들에서 뜨겁게 이어졌다. 그 때문인지 이후 30년 동안, 19세기가 마감될 때까지 <청년동맹>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입센의 작품이었다.

<청년동맹>은 스톡홀름에서도 세계 초연과 같은 해에 공연이 이루어졌고, 18702월에는 코펜하겐에서도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덴마크에서 상연된 입센의 첫 작품이었다. 독일에서는 뮌헨과 베를린에서 계획이 되었지만 실제로 프로덕션까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초연은 20여 년이 지난 1891년 베를린의 프라이에 폴크스뷔네(Frcie Volksbiühne, 자유 민중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선 이보다 늦게 1900년 런던의 보드빌 시어터에서 초연되었으나 별 주목을 끌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