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은 1864년 노르웨이를 떠나 1891년까지, 서너 번 고국을 방문한 때를 제외하고는 27년간 당시 노르웨이보다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에 머물렀다. 그는 고국에서 자신의 삶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 답답한 것이었고, 그것이 자신의 정신과 의지를 꺾어 놓았으며 '영혼까지도 작게 만드는 옹색한 여건의 저주'였다는 느낌이었다. 뵤른손의 중재로 노르웨이 의회가 입센의 여행을 위한 장학금 수여를 통과시켰고, 보른손이 주선하여 '입센 후원의 밤'을 개최하여 외국여행 비용이 충당되는데 도움을 주자 입센은 자신을 짓누르는 노르웨이의 현실에서 벗어나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 자유로운 정신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입센 가족의 첫 거주지는 로마였다. 로마를 근거지로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위대한 예술품들에 압도당했고 무엇보다 예술품에서의 '크기'를 알게 되었다. 이 지중해 연안 나라의 도시들이 발산하고 있는 삶의 에스프리는 입센에게 삶의 기쁨, 인간과 예술, 그리고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했다. 이제 입센은 춥고 음습하며 신화와 설화에 근거하는 스칸디나비아의 민족적 낭만주의가 기실 절름발이의 지방성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더구나 자신이 북구 민족의 우월성이라는 일루전에 싸여 거기서 파생되는 삶의 위선을 전파하는 작가였다는 사실을 새삼 유감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그런 거짓된 이상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재능을 소모했다는 후회에 휩싸였고, 노르웨이의 공적 사회, 즉 정치와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일상인들의 상투적이고 공허한 언행에서도 혐오감을 느꼈다. 이는 입센의 작가적 안목이 노르웨이적인 지방성에서 유럽적인 세계성으로 변화되고 그 규모가 커진 것을 의미하며 이제 그는 27년간의 정신적 수혈이자 정력적 활동기에 들어서게 된다.
입센의 작가로서의 이런 변화와 인식이 투영된 첫 작품이 1866년 발표된 <브란>이다. <브란>의 주인공은 브란 목사이다. 그는 타락한 세상의 도덕을 바로 세우라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과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려는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사실 작가 입센의 믿음에 다름 아니다. 입센은 지원금 신청을 위해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민중을 일깨우고 크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임무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고, 알고 있으며 그 임무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썼다. 철거한 이상주의자 브란 목사는 자신의 이상을 이룩하겠다는 일념으로 신당에 매진할 뿐 현실과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전부 아니며 무"라는 윤리적 강령을 삶의 명제로 삼는다. 입센은, 브란 목사의 이 강령은 '삶의 모든 영역, 즉 사랑, 예술 등에 들어있는 것"이며 브란은 최상의 순간에 있는 자기 자신임을 187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 있다.
브란 목사는 이러한 철저함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사람들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아들과 아내조차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자신도 눈사태에 묻혀가며 인간의 의지에 조금의 구원이라도 없는 것인지 신에게 묻지만 “신은 사랑이다"라는 소리만이 눈사태의 우레소리보다 더 높이 들리는 것으로 <브란>은 끝이 난다.
이탈리아에서 본 예술품들의 '크기'와 장엄함에서 입센은 《브란》을 위한 막연한 영감을 얻었지만 이 작품의 창작에는 역사적 사실이 직접적 동기로 작용했다. 로마행 중 입센은 베를린에서 프로이센(현재의 독일의 승전행렬을 목격한다. 독일 북부에 있는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두 공국은 덴마크와 접경하고 있으며 독일인들과 덴마크인들이 섞여사는 곳이어서 두 나라 사이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잦았다. 1864년 덴마크-프로이센의 전쟁에서 덴마크를 돕는 나라들이 없어 이 두 공국은 독일령이 되었고 그 승전 행렬을 입센이 목격한 것이다. 입센은 비록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가 과거 덴마크의 속국이었으나 노르웨이가 스칸디나비아에 속한 덴마크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와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그 결과 소명의식과 원칙주의의 광신자인 브란이란 인물이 창조된 것이다.
<브란>에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다양한 일상의 범인(凡人)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언행을 통해 노르웨이 국민과 국민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있다. 그런 점에서 <브란>은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사랑과 결혼의 관습을 비판하고 있는 <사랑의 희극>이 그 선구이 된다고 입센은 밝혔다. 본 옮긴이의 입센평전인 졸저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에서도 <브란>은 '노르웨이 비판작'으로 분류되었다.
<브란>은 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레제드라마인 시극(詩劇)으로 쓰였기 때문에 무대의 한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입센은 말 그대로 '크기'가 있는 작품을 썼으며 입센 생애 최고의 성공작이 되었다. 비록 죽음의 침상에 있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아들과 아내를 희생시킨 채 종국에는 자신도 파멸하고 말지만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신에게 도전하는 브란이라는 인물에게서 자신들의 크기와 이상을 읽어냈기 때문에 <브란>은 대성공이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정점을 치닫던 때에 개인의 양심에 따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 이 되어야 한다는 <브란>의 메시지는 스칸디나비아인들에게 폭발적 매력을 주었다. 모이(Mai)는 브란을 극단적인 낭만적 영웅, 예언자이자 추방당한 자, 새로운 가스펠과 인류의 새로운 유토피아적 비전의 전달자라는 양면적 해석을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독자들은 브란이란 캐릭터에 내재된 비극적 결함, 즉 편협하고 소심하며 아내와 아들은 물론 추종자들에게 보여주는 혹독함 때문에 그는 "새로운 종류의 반영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진리추구와 소명의식 및 그 실천의지에서 전혀 굽히지 않는 브란의 강렬한 개성과 캐릭터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입센은 군소국가였던 노르웨이의 지방성에서 벗어나 <브란> 으로 북유럽에서 영향력 있는 강력한 작가이자 인물로서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이상과 자유의 시대를 전하는 전령이 되었다.
<브란>은 "종교, 애국주의, 인간관계 등에서 자기만족과 인습에 대한 공격", 즉 인정된 권위에 대한 집중포화였다. 입센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개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며 '자기 자신이어야 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에 양보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악의 법칙이며 커다란 적이라는 것이 <브란>에 들어있는 작가의 세계관인 것이다. 그 세계관을 형상화한 브란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모토인 '전부 아니면 무'에 매달리도록 한 것은 작가의 절절한 의도이다. 보통사람 들의 일상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 모토의 실천, 즉 브란의 이상주의가 과연 이 세상에서 그 의미를 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입센은 이 시극에서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에 브란을 죽게 함으로써 이상주의가 인간을 고양시키고 조화를 가져오는 장점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들을 파괴하고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입센은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의 시험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독자/관객 각자의 판단에 달리게 된다.
<브란>의 주인공인 브란의 직업이 목사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때로 정통 기독교를 비판한다는 오해도 있었다. 그러나 <브란>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혹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크기는 그 스펙터클에 비해 너무 작아진다. 입센 평전도 쓰고 그의 드라마 여러 편을 번역한 마이클 마이어의 말대로 입센이 당시 스칸디나비아에서 "죽은 사상과 전통에 반대하는 저항의 개척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브란>을 그렇게 좁은 의미로 해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덕에 입센은 이후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출판하는, 노르웨이의 가장 유수한 출판사 귈덴달 보고한델 출판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에는 극작품의 무대화뿐 아니라 독자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 출판사와의 인연은 입센이 세계적 작가로 부상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출판사에서 출판된 <브란>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4판이 나왔다. 외국어로의 번역은 19세기가 마감되기 전까지 독일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핀란드어, 러시아어, 영어로 번역됨으로써 입센의 어느 작품보다도 작가를 해외에 널리 소개한 작품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성공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브란>은 문학적으로 큰 인정을 받았다. 독일 슈베린의 극장장이자 <브란>의 번역자였던 볼초겐(Alfred von Wolzogen)은 <브란>을 파우스트와 비교하며 괴테의 걸작 이후 사상적으로 가장 도전을 주는 작품이라 평가했다. 두 작품 모두 마지막에 그레트헨과 아그네스라는 구원의 여인들을 등장시킨다는 점만으로도 비교의 가능성은 있다. 마이클 마이어는 <브란>의 마지막 막은 <리어왕> 이후 어느 극작가도 쓸 수 없을 만큼 가장 위대하다고 보았다.
발표 이후 <브란>은 워낙 대작이기 때문인지 아그네스의 죽음으로 관객의 감성을 가장 깊게 어루만지는 4막만 축하 공연 형식으로 무대화된 경우가 많았다. 전작의 세계 초연은 발표 9년 후인 1885년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어 번역본으로 이루어졌고 공연시간은 거의 7시간이었다. 1895년엔 뤼네 포가 브란 목사 역을 맡으며 테아트르 드뢰브르에서 공연되었고, 이후 크리스티아니아와 베르겐을 비롯해 노르웨이의 여러 도시에서 무대화되었다. 입센 작품들이 가장 많이 수용된 독일에선 1898년 입센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 실러 테아터에서 공연되었다.
2022년 현재, <브란>은 쓰인지 156년이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브라네스의 말처럼 독자/관객의 가슴을 차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인물들, 내용, 상징들까지가 운율이 있는 시문을 통해 절절히 전해진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상주의자 브란의 꿰뚫어 보는 눈초리와 극단적 철저함 속에 들어있는 소명의식에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잔소름이 돋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제 이득을 취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조차 없는, 인간의 존엄함을 감히 운위조차 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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