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테세우스는 크레테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고 아테네를 크레테의 복속에서 벗어나게 한다. 카잔차키스는 이 이야기를 약간 번안하여 크레테 문명이 쇠퇴하고 고전 그리스 시대가 수립된 역사적 전환을 다루면서 이 전환기의 역사에 신화적 상징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이 소재를 소설 형식으로 써서 어느 청소년 잡지에 연재한 적이 있는데 「쿠로스」는 이 소설의 희곡판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그리스에 늘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카잔차키스는 조국의 신화와 역사를 자신의 철학으로 해석하고 싶어 했다. 정체성을 수립해가는 그리스 역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테세우스는 이 극에서 동물과 신을 자신의 몸 안에 상징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 혹은 이상적인 문화의 창시자로 다시 태어난다.
극의 전개는 신화의 기본 얼개를 따라간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그 얼개에 상상과 이미저리로 날줄과 씨줄을 짜 넣어 오래된 문명의 몰락과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설명하는 새 신화를 창조해 낸다. 아리아드네가 아테네 왕자의 사내다움에 매혹당하여 그를 미궁에서 살려낼 수 있는 긴요한 도움을 제의한다는 것은 원래의 이야기에 있는 것이지만 카잔차키스는 거기에 크레테의 운명과 관계된 계책을 포함시키고 아리아드네를 미궁에 동행시킨다. 미노스는 도전자로서 나타난 테세우스와 타협하려고 하지만 테세우스의 승리와 자신의 몰락이 운명 지어져 있음을 예감한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의 가장 중요한 변경은 미노타우로스와의 싸움의 의미를 재해석한 부분에 있다. 이 극에서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동물적 차원에 구속되어있는 신격으로 본다. 미노타우로스의 상황은 크레테가 처해있던 역사적 수준을 암시한다. 미노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동물성에서 해방하려고 하였지만 그 일을 완수하지 못했고, 그것이 미노스의 한계이자 크레테의 한계가 된다. 테세우스는 미노스가 완수하지 못한 일을 완수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를 동물에서 해방하여 신격을 되찾게 함으로써 과업을 완수한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만남은 동행했던 아리아드네에 의해 묘사된다. 그들의 싸움은 싸움이라기 보다 에로틱한 씨름처럼 보인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동물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미궁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크레테를 그것이 구속당하고 있던 역사적 한계(국가의 부패와 무능화)로부터 해방한다. 이것은 전통에 갇혀 있던 문화가 더 넓은 역사의 지평 속에서 새롭게 진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의 탈을 손에 들고 미궁의 입구에 나타난다. 그의 모습은 테세우스와 모습과 똑같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해방된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쿠로스>라 지칭하고 있다. <쿠로스>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청년운동가의 모습을 한 조각상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동물의 감옥에서 해방된 신과 쿠로스와 테세우스의 모습이 같다는 것은 테세우스가 동물-인간-신의 면모를 모두 갖춘 이상적인 청년으로서, 새로운 역사의 건국자로서 그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쿠로스」는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함의를 가진 줄거리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정치와 역사보다 더 원형적인 신화적 함의와 상징을 그것의 언어와 제의적 형식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 자체가 제의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극의 형식도 제의적이다. 테세우스는 제물로서 왔다. 그가 어떤 제물의 기능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테세우스에게 주어진 프로타고니스트로서의 과제이다. 시작 부분의 긴 독백은 테세우스가 제물로서, 그리고 역사 앞에 선 인물로서 자신의 자격을 반성하고 점검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정화를 거치는 예비 의례 과정의 일부이다. 역사의 해방자이자 수립자가 되기 위해서 그의 육체와 정신은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고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신의 희생 제물이 되어 신과 하나가 된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노스는 제의를 관장하는 사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죽어야 할 곡물신의 역할을 맡고 있다. 고대 풍요의 식에서는 후계자가 새로운 곡물과 함께 살아 돌아오면 왕은 죽어야 한다. 쿠로스는 고대 중요 의식에서처럼 신입자initiate가 지하로 내려가 괴로움을 겪고 난 뒤 불멸의 존재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제의적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극의 후반부에 선장이 이끄는 처녀 총각들의 유사 제의는 무대에서 볼 수 없는 지하에서의 희생 의식을 묘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테세우스가 해방된 신과 함께 사제가 있는 미궁의 입구에 나타나면 크레테의 역사가 새로운 그리스의 역사로 태어나는 제의가 마무리는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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