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해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인 사랑과 신념을 대립시킨 작품이 「멜리사」다. 이 작품은 코린토스의 왕 페리안드로스(기원전 627~586년)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그는 크린토스를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던 명민한 왕이자 폭군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헤로토토스의 '역사'에는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자신의 아내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아들 리코프론을 추방한 인물이다. 카잔차키스는 그런 페리안드로스와 리코프론의 관계를 비극작품으로 그렸는데 페리안드로스는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던 아내를 단도로 찔러 죽이고(자신이 상처를 입고 죽을 위험에 처하자 아내를 먼저 죽임) 주술로 그녀를 불러내어 계속해서 그녀에게 사죄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리코프론은 자신과 너무 닮아 사자 같은 용맹과 결단력을 가졌기에 너무 사랑하고 둘째 아들 킵셀로스는 아내를 닮아 유약하고 겁이 많은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런 나날 속에서 두 아들들은 외조부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딸이자 그들의 모친이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음을 알려주게 되면서 리코프론은 아버지에게 복수의 칼을 다짐한다. 그는 약혼녀 알카의 사랑도 거절하고 오로지 어머니의 복수만을 가슴에 품은 채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줄 왕위를 거절하고 아버지를 대신들 앞에서 모욕을 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바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한 리코프론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리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러 왕비의 무덤을 찾은 페리안드로스 왕에게 어머니가 한번도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왕의 분노를 사 어머니를 죽인 황금 단검으로 자신 역시 최후를 맞는다. 페리안드로스는 자신이 너무 사랑한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삶이 무너졌음을 알고 궁에 불을 지르라 명하고 무덤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페리안드로스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다 가졌지만,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여인과 아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가장 불행한 인간이기도 하다. 리코프론 역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고 복수의 칼날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죽어가면서 행복해했다. 페리안드로스는 누구보다 강하지만 또 아들에게 누구보다 약한 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격정을 참을 수 없어 반복되는 살인으로 자신을 죽음보다 더한 지옥으로 몰고 간 왕과 복수를 위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기꺼이 버린 왕자를 보면서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러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카잔차키스는 페리안드로스와 리코프론, 이 두 인물의 갈등을 중심으로,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 상황의 은유로서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를 재구축하고 있다. 페리안드로스가 리코프론을 살해하는 대목은 페리안드로스의 걱정과 리코프론의 결단이 갖는 대조적인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멜리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상시킨다. 햄릿이 살해당한 부친을 위한 복수극이라면 「멜리사」는 살해당한 어머니를 위한 복수극이다. 죽은 자의 유령이 등장하고 범인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가 이용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성의 분위기도 유사하다. 하지만 두 극은 살인이 일어나는 동기도 다르고 극을 진행시키는 행동의 동기도 다르다. 햄릿이 권력 욕망과 질서 회복의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극이라면, 「멜리사」는 더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루고 사람의 행위를 움직이는 요소를 다루고 있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이 극에서 연민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는 탁월한 사람의 고결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상실을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그의 냉혹성은 대체로 질서를 잡기 위한 수단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정도로 광포하고 잔인하지만, 그것은 그가 자신의 격정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삶마저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강한 자이면서도 동시에 약한 자이다. 그의 결함은 그가 자기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는 것과 걱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행동을 선택하고 만다는 것에 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여겼던 사람이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의 무지는 페리안드로스로 하여금 마지막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이게 하는 비극에 이르게 한다. 리코프론은 페리안드로스와 대조적인 인물이다. 페리안드로스가 통제할 수 없는 내부의 격정으로 움직인다면 그는 행동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주어진 문제적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선택해야 할 행동에 대해 고민한다. 그가 선택하는 일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고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다. 그의 과제는 햄릿의 과제와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동기를 해석의 단서로 적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리코프론의 행동에 중요한 것은 주어진 가치를 무반성 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검토한 뒤에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약혼자와 함께 여러 삶 의 가능성을 상상해본 뒤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행동의 방식을 선택하기로 결단한다. 그것은 황량함과 적막과 불길이 있을 뿐인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은 삶이 순전히 우연과 자의성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리안드로스의 호위병들은 왕이 죽었음에도 왕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무덤 안의 여자들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가 제기되자 왕의 명령보다 더 궁극적이라고 여겨지는 운명의 판단에 선택을 맡기고자 동전을 던진다. 이처럼 살육의 행위가 동전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통해 작가는 삶을 지배하는 것이 숙명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숙명의 형식을 취하는 우연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의 제목이 극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 혹은 보이지 않는 유령의 이름인 <멜리사>로 되어있는 것은 작가가 등장인물의 행위들과 함께 그 행위들을 구속하는 실존적 삶의 조건과 상황을 주목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추락은 위대하다. 스스로 선택한 추락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원으로서의 자유이다. 저항마저 신의 뜻을 이루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모순으로 여겨지지만 카잔차키스는 그러한 역설적 인식을 통해 신의 관념을 전통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롭게 이해된 신의 관념은 삶의 원리이자 우주의 원리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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