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천야셴 '조조와 양수'

clint 2022. 10. 9. 16:08

 

 

- 닭갈비, 그까짓 게 뭐라고.

닭갈비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닭갈비를 잘못 먹고 죽은 것이 아니다. 닭갈비 때문에 조조는 양수를 죽였다. 닭갈비를 먹었다고 죽인 것이 아니다. 조조가 죽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사람을 죽인 이유도 참으로 다양한데, 양수를 죽인 이유는 닭갈비 때문이었다. "닭갈비"를 말한 조조의 심중을 읽었다는 이유로 양수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게 어디 사람이 죽을 일이고, 사람을 죽일 일인가? 당연히,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황제의 무능과 간신의 횡포로 한의 황실이 유명무실해지고 각지에서 군웅이 들고 일어나 천하가 크게 셋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이른바 삼국 시대의 이야기다. 원래 나라에는 훌륭한 지도자와 함께 유능하고 충성스런 인재가 필요하다. 특히 나라가 분열되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는 인재의 필요성과 인재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극중에서 한의 승상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고 자신의 정치 생명은 물론 국세가 치명적으로 기울어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자신의 심복이자 책사였던 곽가(郭駕)가 죽지만 않았어도 그런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어서 죽은 곽가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은 더욱 크다. 그러한 조조에게는 인재 지혜롭고 능력 있는 선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촉의 유비에게는 제갈량이라는 탁월한 지략가가 있었고, 오의 손권에게는 주유와 노숙이 있었다. 황실을 등에 업은 권세가 아무리 크고 병력이 아무리 많이 주어지고 용맹한 장수가 즐비하여도 이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결국 능력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인재를 모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조조의 눈앞에 조조가 그렇게도 초빙하고 싶어 하는 인재 양수가 나타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 권력과 지혜, 그 속성과 딜레마

"난세의 간웅" 조조는 근대 이전의 소설, 희곡 작품에서, 그리고 현대의 온갖 드라마와 영화에서 대부분 지략은 뛰어나지만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흔히 "삼국지"라고 일컬어지는 <삼국지연의>의 보편적 영향력으로 인해 실제 역사 속의 조조가 원래 어떤 인물인지에 관계없이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 부정적인 이미지는 조조의 역량보다는 선악의 이분법적 도덕률에 입각한 것으로 그동안의 대부분 문학작품에서는 이 도덕률에 입각하여 다소 극단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조조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례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아예 색깔이나 도안으로 표상화하여 배우의 분장에 활용하는 경극에서는 조조를 가늘게 찢어진 눈과 사악함을 상징하는 흰색 얼굴로 분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조조는 그러한 극악무도의 화신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군림하고 명령하며 처단하는 서슬 퍼런 권력자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어렵사리 구한 인재와 나란히 거닐며 원대한 포부를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후회하기도 한다. 좀더 아슬아슬한 고비도 있다. 천낭과 양수를 선택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인재를 얻기 위해 자신의 애첩을 죽이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자존심을 무릅쓰고 자신의 지략이 양수보다 훨씬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기도 하고, 한술 더 떠서 계급과 연령을 무시한 채 눈 속에서 양수의 말을 끄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조조의 모습이다.

양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역사서와 여러 가지 야사 기록들, 그리고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삼국지연의> 등을 통틀어서 양수는 비중 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그나마 소개되는 일화들도 양수에게 우호적이지 못하다. 그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로 조조의 심중을 헤아리는 데는 남보다 뛰어나지만 주로 잔꾀에 능하여 제 꾀에 제가 빠지고, 자기 재능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며, 자기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나머지 결국 조조의 신뢰를 얻지 못 하고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양수는 벗과의 의리를 지키고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책무에 전념하며 대업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역사 속의 인물상이나 독자 관중들 마음속에 이미 조성된 인물의 모습은 극작가나 배우, 연출 등 예술가가 경우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예술적 자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가 극복해 야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조조와 양수>의 작가 천야셴() 은 두 인물에 대한 기존의 다층적인 예술적 자원을 적절히 활용 하여 오랜 세월 동안 고정되어 있었던 두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해냈다.

조조와 양수라는 두 인물은 권력과 지혜(또는 지성)를 대표한다. 이 두 가지는 각각 인류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동력이 되는 속성이다. 권력이 올바로 사용되지 못할 때 수많은 부조리와 비극이 탄생하지만 정확하게 사용될 경우 이러한 부조리와 비극을 예방할 수 있다. 지혜는 진리를 발견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부조리와 우둔함이 빚어내는 비극은 또한 지혜를 이반한 결과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과 지혜는 얼마나 유한하고 부조리한 것이었는가?

이 작품은 역사나 소설의 한 사건을 서술한 것이 아니고 조조와 양수 두 인격의 상호 관계와 갈등과정을 그리고 있다. 조조와 양수 두 사람이 미래를 약조하며 신뢰와 존경을 다짐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다짐이 무너지고 양수가 처형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과정은 바로 권력과 지혜를 상징하는 두 인격이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치명적 허점을 찾아내다가 결국에 가서는 파열음을 내게 되는 과정이다. 권력이란 자신의 과오가 명백한 경우에도 비난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조조는 근거 없는 의심으로 공문대를 살해하고도 몽유병적 살인이라는 터무니없는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또 다시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조는 자기 생명이나 다를 바 없는 애첩을 희생해야 했고, 그로 인한 원한이 극에 달한 순간에도 수양딸을 선물처럼 내주어야 했고, 부하들 앞에서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권력의 눈속임은 지혜 앞에서는 간파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혜는 그 속성상 이러한 눈속임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지혜가 자기의 본성 을 저버리고 권력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가장해 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조와 양수는 결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수는 지혜의 화신으로 조금의 타협도 없이 진상을 추구하고 털끝 하나도 놓치지 않는 절대적인 통찰력을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진상 추구 정신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조조가 스스로 거짓말을 꾸며내고 애첩을 죽이도록 몰아붙였으며, 권력자의 마지막 보루인 통수권의 신뢰를 부정하는 엄중한 과오를 저지른다. 지혜의 추구가 자기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제한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양수가 지식인의 인격과 도덕적 순결을 방기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진상을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는 또 다른 한 명의 장간이나 공손함이 될 뿐, 그런 양수를 조조가 그렇게도 갈구하며 찾아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권력과 지혜의 속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딜레마를 조조와 양수라는 두 인물로부터 찾아내어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진 일화와 캐릭터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여 절묘하게 엮어낸 이 솜씨는 참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 세 번의 "발굴', 작가 천야셴(이야기)

 

198812월 톈진(天津)에서 열린 창작 경극 페스티벌에 출품된 <조조와 양수>의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할 때 객석에서 터져 나온 박수가 이십여 분 지속되었고 관중들도 기자도, 전문가와 심사위원들도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조조와 양수>는 이 연극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은 물론이고 극본, 배우, 연출 등 전 부문의 상을 석권하였다. 연극계는 들끓었고 언론은 대작의 출현을 알렸으며, “문제작의 출현에 늘 따라오는 전문가들의 토론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고, <조조와 양수>에 대한 시상과 전국 순회공연, 그리고 해외 초청공연 등이 마치 공식처럼 이어졌다. <조조와 양수>는 거의 신드롬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