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석 '섬기는사람,받는사람 '

clint 2017. 2. 8. 12:56

 

천주교 200주년 기념공연
제작:명동성당
기획:명동성당 "문화 분과 위원회"
섬기는 사람,받는 사람
(연출대본)
"너,사람아,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말이 있다."
-에제키엘 2장 1절-
作(작): 吳泰錫(오태석)
演出(연출): 金相秀(김상수)
장소:명동성당 야외무대

      

이 작품 공연을 준비하면서 연출김상수와 작가 오태석은 2개월의 시간을 한국역사와 천주교회사,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해서 집중적인 토론을 하면서  한국교회의 본질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믿음과 친교는 무엇인가를 서로 질문하고, 어떤 형식의 연극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연출의 과정에서 원작극본을 연출극본으로 재구성하고 각색하였다.       
재극본 작업에서 고려대학교 국사학자 조광 교수의 실질적인 조언과 협력이 큰 힘이 되었음을 밝힌다

 

 

 

 

연극연출가 오태석씨(55). 「천재」 「광인」 「기인」…. 그에게 따라붙는 별칭이 말해주듯 한국연극계의 숱한 화제와 논쟁 속에서 「주연」은 늘 그였다. 「한국인의 심성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연극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자답으로서 그가 발표한 「초분」 「태」 「자전거」 「춘풍의 처」 등 일련의 작품들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연극계에 충격을 던졌다. 상상을 뛰어넘는 연극형식·어법의 파격. 평단에서는 「천부적」이라거나 「귀신이 넘나드는 경이의 무대」라는 찬탄이 쏟아지는가 하면 「자기도취」 「턱없이 난해하다」는 부정적 평가도 난무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연극이 경험한 모든 「실험」의 전위에 그가 있었고, 또 그의 선진성이 결과적으로 「한국적 연극」의 방향을 규정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연극인들은 「오태석」이란 이름을 현존 희곡작가의 최고봉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서울 서초동 삼익상가 5층에 세들어 있는 극단 「목화」의 허름한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작품과 관련된 인터뷰는 여러번 해봤지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그는 무척 신중해 했다. 나이 탓인지 술 탓인지 말을 조금씩 더듬거렸지만 그는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퍽 감칠맛나게 들려주었다.<편집자의 도움말>

 

11살.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내 나이 11살이던 해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닿아 있다. 그 이전의 것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3살되던 해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충남 서천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것, 남대문초등학교에 입학해 4학년까지 다녔던 기억이 고작이다.
한국전쟁이 나로 하여금 상기케 하는 첫 기억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인텔리로 대통령 비서실에서 일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늘 운전수가 딸린 승용차를 타고 다니셨다.
전쟁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을까.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노란 군복에 붉은 완장을 두른 군인 대여섯명이 아버지를 담벼락에 세워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군인들은 사정없이 아버지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길로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의 나로서는 무슨 죄를 짓고 끌려가는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아버지의 옹색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 넋나간 듯 읊어대던 할머니의 넋두리…. 집안은 초상집 같았지만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나이였다. 더구나 아들에 있어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나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장남만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나를 서천으로 내려보냈다. 어머니와 다른 식구는 서울에 남고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피란길에 올랐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경험. 피란길은 11살난 내게 흥미진진한 「여행」이었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는 일도 내겐 즐거웠다. 할머니와 나는 그야말로 등짐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는데 사람들은 그런 우리가 불쌍하다며 밥도 먹여주고 헛간에서 잠도 재워주었다.
8월의 무더운 여름. 우리가 피란을 떠난 때는 전쟁이 일어난지 벌써 두달이 지난 뒤였으므로 전쟁이 휩쓸고간 흔적을 뒤쫓아 내려가는 셈이었다. 그 덕에 나는 물리도록 시체를 구경했다. 신작로고 논밭이고 산비탈이고 온통 널브러진 시쳇더미뿐이었다.
삶과 죽음. 당시의 내곁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삶보다는 죽음이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할머니가 길을 잘못 들어서인지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리(지금의 익산시)로 돌아서 서천을 가게 되었다. 이리역에 도착했을 때 목격한 죽음의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역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만류하는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20대 초반의 여인. 그녀는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아기는 물론 그녀의 머리와 몸에 하얀 구더기들이 꼬물꼬물 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계속 안고 있으면 당신도 죽으니 빨리 아기를 버리라고 다그치는 중이었고 여자는 『내 아기는 죽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었다. 남자들이 달려들어 아기를 빼앗으려 했지만 여인은 발버둥치며 아기를 껴안은 손깍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넌이런 거 보면 안된다』. 할머니는 나를 억지로 끌고 역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 듯한 여인의 두 눈과 파랗게 굳어 끝내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손깍지가 오랫동안 내 눈 앞에 맴돌았다.
그 기억도 잠깐. 서천에 도착해서 나는 또 하나의 기이한 죽음을 경험하게 됐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이면 거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듯 그날따라 동네는 무척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날 밤 읍내쪽에서 벌겋게 달아오르던 화염과 광채. 다음날 할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주고받는 얘기를 통해 나는 그날의 일을 알게 되었다. 국군에 밀려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서천군 등기소에 마을 유지 120여명을 가두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간혹 통곡소리만 새어나오는 동네는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뒤덮고 있었다.
인민군이 물러가자 마을사람들은 조심스레 암매장된 시체들을 파내기 시작했는데 시체들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가 한동안 마을에 진동했다.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나는 서천에서 3년을 살았다. 더이상의 죽음을 경험하는 대신 나는 시골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토속신앙, 삶을 엮어가는 방식, 그들이 지키는 규범 등을 몸에 익혔다.
조상이 죽으면 조석으로 음식을 갖다 바치고 3년 뒤에야 탈상하는 의식. 망자와도 대화를 주고받는 할머니들. 충청도의 늘어지는 사투리와 저속하지만 진솔한 시쳇말들을 입에 달게 되었고, 굿·판소리·탈춤·산대놀이 등 신명나는 볼거리도 질리도록 구경했다.
그러니까 나는 11살부터 13살 때까지 인간사의 가장 참혹한 광경과 가장 아름다운 삶의 무늬를 동시에 목도하고 체험케 된 것인데, 이것들이 그로부터 불과 십여년 뒤 생업으로 삼게 되는 내 연극의 모티프를 이루게 된다.
수인처럼 짧게 자른 머리. 단신의 빈약한 체구. 날카로운 눈매. 초여름 날씨인데도 그는 스웨터에 조끼까지 걸치고 목엔 두툼한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학교 강의 말고는 바깥 출입을 잘 안합니다. 극단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사니 날씨가 추운지 더운지 알 수가 있나요』
자신의 말대로 극단에서 아예 살다시피하는 그는 그렇게 30여년을 극작과 연출작업에만 몰두해 살아 왔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꽤나 장난기 많고 대범한 아이였다. 친구들 앞에서 치기어린 「힘자랑」을 할 정도로 뱃심도 좋았다.
아버지의 납북과 전쟁의 체험으로 자칫 우울하고 내성적일 뻔했던 내가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밝게 자란 것은 다 어머니 덕분이다.
아버지를 찾아헤매다 포기하고 뒤따라 서천으로 내려온 어머니는 빨래비누를 팔며 생계를 잇기 시작하셨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머니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포탄에 쓰러진 옛집을 다시 지어놓으셨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갔을 때 집안은 거의 예전의 모습으로 복구된 상태였다.
평범한 공무원 아내였던 어머니는 생활력 강한 가장으로 변신해 당구장.양품점 등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셨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험한 세상에 겁없이 뛰어드셨지만 다행히 사업수완이 좋은 편이어서 자식들 눈에 어머니는 언제고 당당하게 비쳤다.
어머니의 걱정거리는 생계보다는 당신의 아들딸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업신여김 당하며 기죽어 자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고 자연히 장남인 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도 매우 크셨다.
중학교 때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신식교육은 누구보다도 앞서서 배우게 하려는 어머니의 열성적 지원 때문이었다. 졸지에 나는 전란후 배재고 아이스하키팀을 부활시키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선수 뺨칠 정도로 스케이트를 잘 탔는데 그 얘기를 들은 어느 한 아이가 내게 희한한 귀띔을 해왔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고에는 전쟁 이전부터 아이스하키 팀이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아펜젤러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아이스하키 장비를 교내 어디에다 숨겨놓고 갔다는 것이다. 스케이트 잘 타는 네가 찾아서 써먹으면 어떻겠느냐는 뜻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이잡듯 뒤지고 돌아다녔다. 교실은 물론 수위실.창고.화장실까지 샅샅이 훑었다. 「보물」은 어느 반 천장에서 쏟아져내렸다. 그때까지 아이스하키 장비를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제법 값나가게 보이는 묵직한 장비들을 손에 들고 얼마나 가슴 설레었는지 모른다.
나는 당장 체육부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리가 이 많은 장비를 찾아냈으니 유니폼만 사주십시오. 다시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해 전국대회에 나가겠습니다』고 자신만만하게 주문했다.
아이스하키의 「아」자도 모르는 나의 똥배짱으로 배재고 아이스하키팀은 다시 태어났다. 코치도 감독도 없이 우리는 중랑교 논바닥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시합에 나가는 족족 졌다. 8전8패.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창단 1년만인 이듬해 겨울 드디어 전국 고교 아이스하키대회에서 준우승의 쾌거를 올리는 악바리 팀으로 부상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이렇게 노느라고 세월을 다 보냈다. 고3이 되자 큰일났다 싶었다. 뒤쳐진 교과성적을 끌어올리느라 허덕거렸다.
대학 첫 시험에 나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 있는 대학은 어느 학교라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실망도 내가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실망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순간 내 앞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8년 전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 아버지. 그분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호통치셨다.
『이자식아,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 네 애비를 기억하고 있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애써 외면해왔던 유년시절의 상처. 상처를 마주하는 대신 헛된 자존심과 치기로 공연히 거들먹거리며 살아왔던 청소년기. 태어나 처음 맛본 절망의 순간 나를 찾아온 아버지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정면에서 바라보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제야 전쟁을 통해 겪은 삶과 죽음의 체험들이 의미와 색깔을 갖고 내 앞에 벌떡벌떡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헛된 욕망과 포부가 빠져나간 내 몸과 마음은 지식에 굶주릴 대로 굶주려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생 텍쥐페리 등 세계 유명작가들의 명작을 순례했다. 국내고 국외고 전후문학이 성하던 시기였으므로 전후 세계 문제작들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황순원.김동리를 비롯한 국내 작가들의 단편들은 나도 경험한 바 있는 6.25의 아픔을 다시금 절감케 했다.
재수 공부는 뒷전이고 밤낮으로 책만 읽는 아들을 어머니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해 6월 나는 급기야 책보따리를 싸짊어지고 절로 들어갔다. 수덕사의 어느 암자. 인적 드문 그곳에서 3개월간을 책과 자연에 파묻혀 살았다.
한번은 장마가 져서 보름간 사찰을 드나드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무엇보다 담배를 구할 수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책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날마다 무료하게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웬 여인네 한사람이 멀리서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막에 추락해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던 생 텍쥐페리가 파리의 화려한 사교장을 떠올리며 다시 살아야겠다는 힘을 얻었다더니 내가 꼭 그 처지였다. 그 여인이 팔순 노인네인지 꽃다운 처녀인지 분간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바람에 살짝 펄럭거리는 치맛자락에 공연히 마음이 설레고 얼굴마저 붉어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렇게 외롭고 힘든 것이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지금의 후배들은 연극인 오태석이 오늘의 자신들을 있게 해준 은인임을 전혀 몰라주지만 나는 2학년 선배들에게까지 대장 노릇해가며 아이스하키팀을 이끌던 생각만 하면 괜시리 목에 힘이 들어가곤 한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노트없이 공부하는 애」로 소문날 정도로 꽤 영특한 축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절에서 내려온 후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인간이 만든 것은 하루아침에 뒤집어질 수 있다.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한순간에 무너져 폐허가 된다. 뒤집어지지 않는 무엇은 없을까. 내가 믿을 수 있는 원초적인 어떤 것…」 대학에서 전공을 「철학」으로 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61년 연세대 철학과 입학. 이 무렵 우리 집안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머니가 계주로 있던 계가 깨지는 바람에 집과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리고 만 것이다. 가난한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학비를 벌기 위해 국문과 과장댁에서 가정교사 노릇도 했다. 중2와 고2 두 자매였는데 몇 달 가르쳐보니 돈버는 것도 좋지만
내 황금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뼈저린 생활고의 연속이었다. 친구들의 자취방을 넘나들었고 대학의 빈 강의실을 잠자리로 삼기도 했다. 아웃사이더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한가닥 희망을 심어준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당시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학보에 글을 기고하라고 종용해온 것이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연세춘추에 두 달간 글같지도 않은 글을 연재했다. 비구니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소설로 절에서 지낸 3개월간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 소설이 내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첫 작품이다. 2학년 때부터는 그야말로 생계가 막막했다. 담배 한 개비 피우기도 어려웠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 한 사발이 눈앞에 오락가락했다. 담배와 라면. 엉뚱하게도 나는 배고픔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해 5월 학내 연극단체인 「연희극예술회」에 나는 막을 올리고 내리는 「막잡이」로 들어갔다. 지금은 중견 탤런트가 된 오현경씨가 꼭두각시 연극에서 박첨지 역할을 할 때 나는 막잡이 노릇을 하며 그가 연기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는 신세였다. 「유진 오닐」이라는 이름도 들어보고 배우들의 대본도 훔쳐보곤 했지만 그때만 해도 연극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막잡이 노릇 해주고 그들이 연습 도중 끓여먹는 라면 한 끼만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명동의 어느 다방에 갔다가 중앙대에 다니는 배재고 동창들을 만났다. 그들이 퍽 분주한 모습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내일이 「신인예술제」 희곡 원고 마감 날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연극인 활성화 방안으로 신인예술제라는 걸 만들어 공모된 희곡중 9개 작품과 극단을 뽑아 매년 무대를 마련해준다는 방침을 내놓았었다.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물론 연극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30만원」이라는 엄청난 상금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곧 통금시간이라 문방구도 문을 닫을 텐데 내겐 원고지가 없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바로 연세춘추의 친구였다. 그 아이한테는 분명 원고지가 있으리라. 한걸음에 그 집으로 달려가 나는 밤을 새워 작품을 하나 만들어냈다. 「영광」. 나는 이 작품만 떠올리면 푸하하 웃음이 터져나오면서 얼굴이 확 붉어진다. 내용은 밝히지 못하겠고 아무튼 괴상망측한 얘기였다. 9개 작품이나 뽑는데 고만고만한 축에 들었다가는 영락없이 떨어질 것 같아 괴상한 얘기를 하나 만들어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하룻밤만에 써낸 작품이 그야말로 당선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되고 나니 큰일이었다. 당선작품은 다른 8개 단체와 더불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갖게 되어 있었다.
대학 연극회의 일개 막잡이일 뿐인 내가 무슨 밑천으로 공연을 올린단 말인가. 될대로 되라지. 나는 희곡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극단을 하나 급조했다. 「회로무대」. 주위에 나처럼 공부 안하고 껄렁껄렁거리고 사는 친구와 선후배들을 규합해 어찌어찌 극단을 만들었다. 9개 극단 중 회로무대는 유일한 대학생 집단으로 화제가 되었다. 실험극장같은 유서깊은 극단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공연을 했으니 말이다.
내 연극의 주연은 요즘 「쓸기담」 광고에 나오는 이영후였다. 철학과 동기로 그맘때쯤 『나는 왜 사는가』 어쩌구 하며 자살한다고 오도방정을 떨기에 그럼 이거나 한번 해보라고 연극을 시켰는데 그는 데뷔작에서 주연상을 거머쥐는 발군의 실력을 토해냈다. 이듬해에도 우리는 공연을 했다. 의무적이었으므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학생 집단인 회로무대가 일개 극단으로 굴러가기는 퍽 힘들었다. 국립극장의 대관은 공짜지만 제작비는 스스로 충당해야 했으므로
우리는 정말 힘겹게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렸다. 두 번째 작품인 「사중주」는 무사히 넘어갔다. 문제는 세 번째 공연이었다. 공연날짜가 임박하도록 제작비가 마련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마침 학교에서 동문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연세찬가」 노랫말을 응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의 「연세교가」는 백낙준 박사가 지은 것이었는데 한편의 장편소설과 같았다. 교내 행사때 교가를 부르기만 하면 끝까지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길어 민망하던 차에 대신 부를 찬가를 응모한 것이었다. 제작비가 급했던 내가 상금에 눈이 또한번 뒤집힌 건 당연지사. 「사랑」과 「형제자매」란 말만 잘 섞으면 될 것 같아 몇 시간 만에 노랫말을 써서 제출했다. 이게 또 웬일인가. 대상을 따낸 것이다. 「반세기 지켜온 민족의 얼/자유와 진리 심어온 모습…」으로 시작되는 지금의 연세교가는 내가 쓴 노랫말에 작고한 나운영선생이 곡을 붙인 것이다. 그 상금으로 세번째 작품인 「조난」을 무사히 무대에 올렸다. 우리의 회로무대는 극작가 정하연씨가 주연한 4회 작품 「문밖에서」를 끝으로 해체됐다. 3년이었지만 제법 실력을 발휘했다고 믿는다. 또 나로서는 「연출가」로서의 초기 경력을 쌓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비록 얼떨결이었지만…. 고교시절부터 내가 글나부랭이를 끄적거리던 것을 알고 있던 친구는 너라면 소설을 하나 연재할 수도 있을 거라고 부추겼다. 학교다니기에 별 재미를 못 느꼈다. 내가 기대했던 철학과의 공부란 것도 공염불이요, 소시적 내가 두들겨패던 놈들이 나보다 한 학년 위에서 선배노릇하는 것 또한 보기 역겨웠다.
연세찬가 덕분에 수위실 아저씨들도 나를 알아볼 만큼 나는 학교 안에서 유명해졌다. 회로무대에서의 연출 경력도 어느 정도 인정 받았고 친구들은 언제부턴가 나를 예술가로 대접하는 눈치였다.
4학년이 되자 연희극예술회에서 내게 연출을 의뢰해왔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야말로 막잡이에서 연출가로의 화려한 변신이었다. “야 거기 좀 앉아봐!” 나는 제법 호통까지 쳐가며 단원들을 지도해갔다. 당시 영문과생이었던 수필가 오해영씨도 내 밑에서 배우로 있었다.
어느새 졸업. 실은 졸업도 제때 못하고 코스모스(2학기초에 하는 후기졸업)로 하게 됐다. 종교학 때문이었다. 연세대학은 필수과목으로 반드시 종교학을 이수해야 했는데 어느날 수업시간에 내뱉은 말이 교수의 눈총을 사게 돼 학점이 안나온 것이었다.
교수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성서적 교훈을 열변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직후라 잔뜩 졸음도 오는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않는 대목이 있어 나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타락한 도시라지만 착하게 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죄없는 어린 아이들도 불에 타죽었다면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교수는 뜻밖의 질문에 할말을 잃었는지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급기야 화를 냈다.
학생 이름이 뭐야? 하고 묻더니 내가 이름을 대자 출석부의 내 이름에 빨간 줄을 죽 긋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명령을 내렸다. “나가!”
까마득히 잊고 지낸 그 일이 졸업 때 말썽이 될 줄이야 한학기 학비를 또 어떻게 구하나 싶었다. 연세찬가 덕분에 재수강의 고역은 간신히 면하고 리포트로 대체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교수는 그렇게 할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내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절충하면 될 일이었다 나의 질문 태도가 불손해서 그랬다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의 대학 4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가난한 떠돌이 생활이었지만 연극이라는 인연을 만나 하루 아침에 인생이 전환된 중요한 시기였다. 좋은 사람도 여럿 만났다. 연세춘추의 그 친구, 회로무대의 식구들, 그리고 전 연세대 총장이었던 박영식 교수등. 논리학을 강의했던 박교수가 내 시험답안지를 마음에 들어 한 이후 그는 나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정신적 힘이 돼주었다. 연극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고 회로무대의 활동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비록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연극은 가난과 절망에 허덕이던 나를 구원했다.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세워질 수 있는 세상. 이 줏대없고 허약한 세상에 살면서 삶의 어떤 지표도 지닐 수 없던 내게 연극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세상을 무대위에 만들면 되었다.
무대위에 내가 자유롭게 꾸미는 세상 그것이 진짜 세상이었고 내겐 희망이 되었다. 삶의 공허함이 커질수록 나는 스스로를 더욱 연극으로 내몰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동가식서가숙의 연속이었다. 간간이 대학 연극반에 초청받아 연출을 하긴 했지만 거의 백수건달 신세였다.
이대 앞 파리다방을 들락거리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김현.김승옥.김치수 등과 어울리며 문학과 연극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이 좀 괜찮았던 박태순 같은 친구도 있어 여러 번 신세도 졌다.
나는 이시기에 죽기살기로 글을 썼다. 일단 등단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여기저기 신춘문예작품을 응모했다. 67년 한국일보 장막극 모집에 화창한 남자로 가작을 수상했고 같은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웨딩드레스가 당선됐다.
이듬해에는 경향신문과 국립극장이 공동으로 공모한 꽤 큰 규모의 작품 모집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서 환절기란 작품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이 환절기에 얽힌 추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다.
68년 2월 쯤이었을게다. 당시 나는 뜨내기 생활을 견디다 못해 염치를 무릅쓰고 이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서울음대에 연극반을 만들어주고 연출을 맡아 해주곤 있었지만 밑바닥에 가까운 생활고가 나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글쓰기에도 지칠대로 지쳐 환절기를 끝으로 펜을 꺾어 놓은 상태였다.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2월의 어느날 나는 한쪽 주머니엔 소주를, 또 한 주머니에는 오징어를 구겨넣고 이모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우편배달부의 오토바이가 내앞에 서더니 누구누구네 집을 아느냐고 물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 이모부 댁이기에 상세히 길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들키지않기 위해 소주가 든 주머니를 꼭 움켜쥐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날 따라 온 집안에 훤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더욱이 생전 얼굴 한번 보자 안하시던 이모부가 나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다. 당시 어머니는 몹시 편찮으셔서 절에 들어가 계셨는데 필시 어머니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내 앞에 이모부는 전보 한 장을 내미셨다. 나는 마음의 큰 각오를 하고 전보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전보에는 또렷한 타자 글씨로 ‘축당선’이라고 쓰여 있었다.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경향신문에 보낸 내 작품환절기가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했다. 이모부 내외는 내가 너무 좋아 미친 줄 알았을 정도로 나는 안방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다시금 생의 의욕을 찾았음은 물론이다. 고마운 작품 환절기는 경향신문에 3개월간 연재되었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지금 환절기의 숨은 사연을 비롯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경향신문에 낱낱이 밝히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대학시절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지금도 기자들이 나를 인터뷰해 기사를 쓸 때면 모두에 「기인」이니 「광인」이니 하는 수식어를 다는 걸 본다.
아마도 술과 도벽 때문이었을 게다. 술에 취하면 무엇을 훔치는 버릇 때문에 나는 여러 번 곤욕을 치렀다. 물론 악의가 있어서 한 짓은 아니었다. 장난삼아 한 것인데 재수가 없어 문제가 커지곤 했던 것이다.
한번은 점심 대신 탁주나 한잔하자고 친구 몇을 꼬드겨 낮술을 마시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의시간이 되자 녀석들은 나만 남겨두고 강의실로 뛰어갔다. 남아있는 탁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나는 적잖이 취기가 돌았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그 순간 내 눈에는 탁자 모서리에 턱을 괸 우산 손잡이가 보였다. 저걸 가지고 강의 끝난 친구들 마중이나 가자 하고 우산을 죽 펴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가 소란스러웠다. 술집 주인이 소리소리 지르며 주먹을 쥐고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배움의 길에 있는 신분」이라고 간신히 훈방되었는데 그때 처음 손장난이 간단치 않은 것이로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술이 한창일 때는 매일 3∼4차까지 퍼마셔대는 게 보통이었다. 4차까지 마시고 나면 대개 4차를 마신 집에서 잠을 잤는데 내가 입고 있던 옷에 술을 엎지르고 오물을 토하는 통에 할수없이 이튿날은 친구의 고급 양복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아하, 요것이로구나. 비록 낡았지만 내것 주고 대신 가져오는 것이니 도둑질은 아니었고 또 그 맛에 재미가 붙다 보니 이후 십수 년 동안 나는 내 옷을 가져보지 못했다.
일찌기 글보다 승한 내 도벽은 결혼주례를 서주신 한태동 박사의 파이프를 훔치는 불상사까지 일으켰다.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하러 갔다가 길이가 자반이나 나가는 「더 메이플라워」를 주는 것 없이 가져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선생은 「도둑제자」의 결혼을 축복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 도벽을 잘 아는 친구들은 체념하여 이렇게 말하곤 한다. 『2∼3년 후엔 돌려주라』
이처럼 손버릇 나쁘고 욕 잘하고 술독에 빠져 사는 내게 여자들이 따를 리 만무했다. 대학시절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았기에 미팅이라는 건 꿈도 꾸지 못했고 졸업해서도 연애는 엄두도 못냈다. 그런 내게 색시 맞을 기회를 준 것 역시 연극이었다.
몇 군데 신춘문예의 잇단 당선으로 필력을 인정받은 나는 신문 잡지 등에 기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서울아카데미(현 서울예전)의 동랑 유치진선생이 나를 부르셨다. 당시 나는 작고한 김동훈씨와 「롤러스케이트를 탄 오뚜기」를 무대에 올리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보고 나를 보자 하시는 거였다.
선생은 대뜸 내게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분부하셨다.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치지 않습니까』고 되물었더니 『니 연극 맨드는 방법 그대로 가르치면 된다』 하셨다. 내 주제에 선생질이라니 얼토당토한 일이었지만 오죽 의지할 데가 없으시면 나같은 놈한테 맡길까 싶어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동랑선생이 혼자 이끌다시피 한 서울아카데미에는 라디오&텔레비전과와 연극과 두반이 있었는데 나는 연극과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더불어 나는 유치진 선생이 만든 동랑극단에 합류해 이호재.전무송 등과 함께 활동을 했다.
「루브(Luve)」를 공연할 때의 일이다. 본래 유치진선생이 연출하기로 돼 있었는데 강효실.신구 등 캐스팅만 해놓으시더니 그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제부터 태석이가 해』 하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유선생에게 「시달리는」 신세였지만 분부대로 수행을 했다.
그 작품을 우리는 25일 동안 무대에 올렸는데 관객 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달리 눈에 띈 것이 아니라 그녀가 거의 매일 연극을 구경하러 왔기 때문이다. 얼핏 낯익은 듯해서 붙잡고 물어보았더니 서울음대 연극반을 가르치던 시절 가수 조영남 등과 어울려 다니던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최난선」이란 이름의 그녀는 25일 동안 15회의 공연을 보았다고 했다. 하도 기특해서 왜 그랬느냐 물었더니 연극을 무척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선뜻 얼마든지 와서 배우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사람에겐 팔자라는 게 정말 있는 모양이다. 얼마를 가르치다 보니 영 배우될 소질이 안 보였다. 평소엔 수줍음도 잘 타고 얌전하다가도 무대에만 서면 얼굴에 철면피를 척 깔 줄 알아야 배우인데 그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허드렛일 거드는 일만 아주 잘했다. 한편으론 딱했다. 이대 비서학과까지 나와서 다른 좋은 데 취직이나 할 것이지 고생길 빤한 연극판엔 왜 뛰어들었나 싶었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히 연기연습을 하고 틈나는 대로 극단 잡무를 거들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더니 좀 이상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연극이 좋으면 연극하는 사람이랑 평생 같이 지내면 어떻겠나 하고 내심 바라게도 되었다.
그렇다고 내 성격에 유별난 사랑고백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꿨다. 단지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다행히 그녀도 나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고 해서 어찌어찌 잘 지내보자 한 것이 혼삿말까지 오가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의 집안에선 광대한테 시집보낼 수 없다고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마음그릇이 큰」 장모 덕에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장모는 『자네 가난한 처지를 생각하면 딸을 줄 수 없지만 다른 것보다 자네가 글을 쓴다는 것이 미더워 눈 딱감고 보내는 걸세』 하고 말씀하셨다.
9살 연하의 어린 아내와 나는 경기도 변두리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되었다. 결혼식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 올렸다. 처음엔 결혼식 올릴 필요 뭐 있느냐 싶었지만 을지병원에서 첫딸 준현이가 태어나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결혼사진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35세 되던 74년 세종호텔에서 뒤늦게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사실 아내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연애시절부터 환갑을 바라보며 같이 늙어가는 이즈음까지도 아내에게 나는 늘 죄인일 뿐이다. 돈도 없고 통금에 쫓기느라 오붓한 데이트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데이트를 하더라도 늘 단원들과 한데 어울려서 했다. 연극은 반쯤 정신나간 사람마냥 파격적으로 만들어도 여자 대하는 일에서만큼은 유난히 충청도 기질이 발휘돼 남사스런 짓도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죽었다 깨도 내 입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원체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그저 내겐 「썩을년」 하고 내뱉는 것이 사랑한다는 표현이었다.
「오태석」이란 내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3년에 발표한 「초분」 이후였다. 풀무덤이란 뜻의 「초분」은 어느 외딴섬을 배경으로 우리의 현대와 전통, 동양과 서양이 맞부딪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다룬 연극이었다.
주인공은 수인번호 1970의 기결수. 이 연극의 시대배경도 1970년이었다. 외딴섬 출신의 이 죄수는 죄를 짓지 않고는 뭍으로 나갈 수 없다는 섬 안의 불문율이 있었기에 뭍으로 나가고 싶어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뭍의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 이 죄수가 모친상을 당해 뭍에서 섬으로 간다.
섬에는 또하나의 특이한 풍습이 있었는데 「초분」이 그것이다. 땅이 습해 한 자만 파도 물이 고여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므로 초분에 건조시켜야 했다.
그런데 섬은 폐수가 밀려들어 생활기반인 미역밭이 병들어 황폐화되고, 섬의 치안관은 주민들에게 초분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이곳에서 떠나라는 「법령」을 내린다. 섬사람들은 갈등한다. 그간 자신들이 지켜온 섬의 관습과 질서를 지켜야 하느냐, 법에 따라 섬을 떠나야 하느냐.
내가 희곡을 쓰고 유덕형(현 서울예전 이사장)이 연출한 이 작품은 70년대 연극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연극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이야기에 긴장과 서스펜스를 가미해 극적효과를 내는 방식의 리얼리즘 연극이었다.
그러나 「초분」은 이러한 연극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줄거리는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 스토리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주목적으로, 한국적 관습의 세계와 서구적 법의 세계간의 충돌과 갈등을 통해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심성을 「직감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 연극에 「제의」 형식을 취했다. 제의야말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가장 잘 표출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감성, 언어의 논리성보다 소리 그 자체, 주술, 군무와 동작 등 추상적인 장치및 도구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내게 중앙문화대상 등 몇개의 크고작은 상을 안겨준 「초분」은 한국 최초로 해외공연(미국)을 갖기도 했다. 기자들과 「인터뷰」란 것도 숱하게 했다. 62년에 데뷔했으니 10여년만에 공인을 받은 셈이다.
「초분」의 파란은 74년 「태」로 이어진다. 「태」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 내가 「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역사적 교훈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수많은 죽음을 초래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권력관계. 그러나 그 잔혹함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끈,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생명 끈으로서의 「태」의 의미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무대를 충격적으로 형상화했다. 기괴하고 잔혹한 사육신 처형장면. 피가 흩뿌려지고 엉겨붙는 듯한 농도 짙은 색조. 음침한 축문. 필사적인 신원의 몸짓. 인간의 헛되고 나약한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의 의상을 모두 후줄근한 백색의 한지로 만들어 입히는 파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 두편의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우리 연극사에 일대 전환점을 형성한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내 연극에 고유명사처럼 따라붙는 「한국적 연극」이란 칭호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처음부터 내가 이런 「괴상한」 연극을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나는 서양의 드라마투르기를 철저하게 따르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연극을 만들고 있었다.
내 안에 잠재돼 있던 한국적 문법의 가능성을 끌어낸 것은 동랑 유치진 선생이었다. 「초분」을 발표하기 한 해 전인 72년. 내가 속해 있던 동랑레퍼토리는 몰리에르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는 큰 행사에 한편의 공연을 올리기로 돼 있었다. 유치진 선생은 나를 불러 『몰리에르의 작품 「스카팽의 간계」를 우리식으로 만들어보라』고 말씀하셨다.
원본 그대로의 번역극도 아니고 「우리식」으로 재구성하라니? 그것도 이태리 최고의 명연극을 나같은 애송이가 어찌 손을 댄단 말인가. 머리가 띵해지며 어리둥절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곰곰 생각했다. 궁리 끝에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 서천에 피난가 있을 때 보았던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었다. 광대놀이와 산대놀이, 탈춤, 마당굿 등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을 서양연극의 틀에 접목시키면 어떨까.
나는 마침내 「스카팽의 간계」 중 하인들이 주인을 골려먹는 장면이 우리 전통탈춤의 「말뚝이」나 「쇠뚝이」 마당과 유사하다는 점을 착안해냈다. 그렇게 해서 몰리에르의 대작 「스카팽의 간계」는 「쇠뚝이 놀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비록 몰리에르를 핫바지로 만들긴 했지만 「쇠뚝이 놀이」는 나로 하여금 우리 연극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귀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우리 선조들의 놀이 문법에 천착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우리식 연극이란 다름아닌 「놀이」였다. 우리에겐 본래 서구식 연극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연희, 즉 놀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극적 유산이었다. 그게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았다.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논리적인 서양식 연극이 아닌 즉흥적이고 순간순간 직관에 의한 비약이 넘치는 우리식 연극.
나는 도서관에 파묻혀 살며 「사미인곡」등의 고전과 춘향가.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바탕을 섭렵했다. 봉산탈춤을 비롯한 전통 탈춤과 여러 형식의 마당굿을 미친듯이 파고들었다. 특히 굿은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의 보고로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또 나는 이 시기에 우리말의 입심과 고운 결, 아름다운 무늬를 새삼 발견하게 됐다. 한국인의 성정과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용해되어 있는 우리말. 사투리는 물론 웃음 넘치는 재담, 종횡무진의 요설, 사설 등 우리말이 갖는 무한한 리듬감과 다채로운 언어 구사에 흠뻑 빠져들었다. 나는 그속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우리말과 우리 놀이 문법에의 깨달음은 「쇠뚝이 놀이」 이후 나로 하여금 한국인의 삶의 근원을 보다 철저히 실험하게 하는 여러 작품을 잉태하게 했다. 76년에 발표한 「춘풍의 처」는 「초분」 「태」를 잇는 세번째 문제작. 나는 이 작품으로 「한국 연극계의 문제아」로 철저히 낙인찍히게 된다.
「태」이후 발표한 내 연극은 공연되는 족족 「문제작」이 되었다. 「태」가 나온지 2년만에 발표한 「춘풍의 처」(1976)가 그러했고, 유년시절의 전쟁체험을 담은 「자전거」(1983)가 그랬다. 「비닐하우스」(1988)와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1990), 「백마강 달밤에」(1993) 같은 작품은 평론가들의 도마에 숱하게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그중 가장 논쟁이 심했던 작품은 87년에 발표한 「부자유친」이다. 아버지 영조대왕에 의해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 이야기. 이 연극은 뒤죽박죽 진행된다.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종잡을 수 없는 충격의 장면 장면이 이어진다.
왕은 흰 두루마기, 제자는 팬티바람, 신하는 왕의 명령에 응석을 부리고 울다가 파안대소…. 죽은자가 기지개를 켜는가 하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가 풀죽은 마대처럼 바닥에 널브러진다.
어느 한 구석도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 「탈논리」의 연극이 노렸던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학살하는 데 논리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문제의 언쟁은 이 작품이 그해 「서울연극제」에서 대상을 탔을 때 벌어졌다. 나를 향해 퍼부어진 몇몇 평론가들의 집중포화는 대단했다. 그들은 신문지면을 통해 『자기 연극에의 도취』 『일본취향』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이런 류의 연극이 나오는 것은 오태석사단에 빠져든 광신도집단 때문』이라는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솔직히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나는 연극을 만들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내 언어로 말할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너에게 연극은 무엇이며 네가 보여주는 그 해괴하고 낯선 연극의 형식들은 대체 무엇을 뜻하느냐』고.
내게 연극은 「사람들 사이 말길을 터주는 꺼리」다.
장마가 졌을 때 농사일을 걱정하며 농사꾼 부부가 나누는 대화처럼 내 연극이 사람 사이에 다정하고 소박한 얘깃거리가 됐으면 한다. 컴퓨터프로그래머인 남편이 하루종일 컴퓨터에 시달리다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마음의 벽은 높아지고 더불어 「말」도 사라진다. 그들이 내가 만든 「이상한」 연극을 보고 서로의 말,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나는 더없이 행복하겠다.
「틈」. 그래서 나는 내 연극에 틈을 많이 남긴다. 생략하고 비약시킨다. 연극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내가 즐겨쓰는 이 생략과 비약의 방식 때문에 퍽 당황해하고 낯설어 한다.
내가 관객들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하면서까지 생략과 비약을 멈추지 않는 것은 관객이 자유롭게 연극 속으로 들어와 상상하고 해석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연극이 처음 창조해낸 일이 아니다. 내 연극이 뿌리를 둔 한국의 전통놀이가 대부분 그러하다. 마당극, 판소리, 탈춤, 굿…. 이들의 무대는 서양의 오페라무대처럼 따로 도드라지지 않는다. 구경꾼들이 앉아 있는 자리까지 무대에 속한다. 광대들은 구경꾼을 웃기거나 말을 걸어 오면서 객석과 끊임없이 호흡한다. 즉흥과 비약, 재치가 넘치는 한판. 우리 연극은 서양연극처럼 다 차려진 밥상을 그저 훔쳐보기만 하는 그런 연극이 아니다.
극단 「목화」는 이런 한국적 연극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름없는 유랑극단처럼 이리저리 떠돌다가 84년 「목화」로 터를 잡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오태석사단」이라고도 부른다.
조상건.문용철.최재영.김일우.정진각.박영규.장세동.김학철.한명구.정원중.김병옥 등이 목화 출신의 골수 배우들. 목화 단원은 아니지만 연출가 이상춘.이윤택, 극작가 홍원기, 국악인 안숙선.신영희, 가수 조영남.임희숙 등도 나와 오랜 교분을 맺어온 사람들이다.
한번은 어느 기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 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오선생과 함께 호흡해온 배우들 중에 대중스타가 별로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화 출신 배우들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요소를 별로 지니지 못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미모와 세련된 매너. 말재주와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다들 연극적인 캐릭터가 너무 강해 TV나 영화와는 잘 맞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극에 미친 놈들이다』
물론 단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다들 나처럼 가난한 연극에만 미쳐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대표랍시고 앞길 한번 속시원히 터주지 못하니 말이다. 요즘 잘나가는 TV나 영화쪽으로 길을 터주면 좋으련만 내겐 솔직히 그런 재주가 없다. 그쪽에서 내게 와 단원 좀 빌려달라고 애걸하면 몰라도….
올해로 연극생활 35년. 문득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꺼낸 애였다. 어깨가 걸려서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파랗게 죽어가는데 산파는 오질 않고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솜을 손가락에 감고 낚시마냥 겨드랑이를 걸어서 끄집어낸 것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무서움이 많았던 나는 마당 귀퉁이 뒷간 앞에 외할아버지를 세워 두고서야 뒤를 보았다. 외할아버지는 내 종이나 다름없었다.
『거위 세 마리가 집으로 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마중을 나오니 모두 몇이냐?』 『네마리』 『잔나비 다섯마리가 나무위에서 놀다가 한마리가 떨어지니?』 『네마리』. 이러고 매일 밤 외할아버지는 곁에 누워서 동물원의 동물을 반쯤은 헤아리고 나서야 잠이 든 내게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는 한밤중에 읍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자전거를 탄 채로 저수지에 빠져 돌아가셨다. 그후 이따금씩 나는 외할아버지가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서 저수지의 파란 물속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꿈에서 본다. 외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나를 끄집어내 주고, 무서움을 몰아내 주고, 셈을 가르치고, 그리고 돌아가시고도 물속에서 페달을 돌리는 신기한 모습으로 이따금 잠속에 나타나 내 외로움을 달래주시는 것이다.
나처럼 무서움이 많은 사람들, 잠못자는 사람들을 위해서 외할아버지처럼 뒷간 앞에 서고, 거위와 잔나비를 헤아리고, 물속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런 연극을 할 수만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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