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로 17년을 복역하다 나온 육손은 유가족 앞에서 자결로 죗값을 치르고자 하는데 유가족은 오히려 그를 은인으로 떠받든다는 내용이다. 연극<죽기살기>는 신선한 감각과 웃음으로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완성시켜가는 ‘하나’라는 것을 매끄럽게 풀어내고 있다. 죽음을 죽음으로 갚아 그 삶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의, 죽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관객에게 또 다른 웃음과 해소를 전달하며, 이로써 삶과 죽음은 서로 하나이자 상호 보완관계임을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직선의 끝과 끝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맞닿아 있는 경계에 관한 발상 역시 신선함과 충격이다.
도살장 가는 길목 입구에서 늘 아침마다 목마를 타며 달리는 시늉을 하는 눈이 먼 세 친구 오두, 박두, 정두는 어느 날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다. 그 시선의 정체는 17년 전 도살장에서 살인을 하고 떠난 육손이다. 사람을 실수로 죽여 1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육속은 석방되자 도살장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육손은 유가족을 만나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데 오히려 유가족의 두 아들은 육손이야 말로 의붓아버지의 핍박에서 구해준 은인이라고 칭하며 육손을 위해 잔치를 벌일 계획을 한다. 오로지 자신이 일으킨 문제의 올바른 정화를 위해 죽음만은 생각해왔던 육손은 크게 절망하는데..
‘죽지 못해 산다’는 푸념을 종종 듣곤 한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죽을 용기가 없어 할 수 없이 산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죽음을 택하는 것보다, 죽지 않고 살아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훨씬 고단하고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안다. 고통에서 빠져나와 도망치지 않고 그 한가운데를 덤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죽기보다 힘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죽기살기>의 오두, 박두, 정두 세 노인은 무의미한 일상을 죽지 않고 살아내는 인물의 상징이다. 눈이 멀어 세상을 볼 수 없고, 별다른 할 일도 없이 화분 받침대에서 ‘꽃’을 흉내 내거나 말을 타고 달리는 시늉을 내는 것이 세 노인의 일상의 전부다.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에서 세 노인은 거추장스러운 짐짝이며 하릴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낸다. 그것이 마치 즐겁기라도 한 듯이. 마침내 육손은 죽지 못하고 눈이 멀어 세 노인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힌다.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동료를 죽인 살인자로 오롯이 남아, 고통을 안고 즐거운 듯이 사는 법을 체득해간다. 마지막에 말을 타며 웃는 세 노인 옆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행복을 흉내 내고 있는 육손의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웃을 수도, 울 수도,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삶임을<죽기살기>는 말해준다. 사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고, 죽기가 살기보다 힘들기에, 우리의 인생은 이토록 어렵고 고단하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요,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사는 것, 죽는 것에 대한 남다른 시선과 신선한 스토리는<죽기살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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