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역사적인 인물 카스퍼 하우저의 실화를 다룬 『카스파』에서는 분절된 언어를 통한 획일적인 사회화 과정과 언어의 폭력성을 맹렬히 비판하며 순식간에 천재또는 무서운 파괴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브레히트를 배격하는 그의 연극론은 무대와 객석, 관객과 극중 사건간의 가시적인 장벽을 무너뜨려 연극에 있어서의 '거짓된 장난'을 제거하고, 관객 자체가 주제 및 사건이 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향해
쉴새없이 퍼부어지는 단어들의 분수령에 떠밀려 연극현실의 죄인임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막이 열리면 한 사람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혼돈과 "타자"에 대한 관심 - 극의 끝까지 잘 살펴보면 이것은 "타자"에 대한 지배욕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 을 나타내는 소리들이 혼재한다. 언어가 있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를 이 연극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주인공 카스파의 모습으로,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라캉이 말하는 정신적 유아의 상태 - 라캉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자의식을 갖는 상태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이 연극은 구성 자체가 상당히 라캉의 심리학과 닮아 있고, 그것이 푸코의 지식과 권력의 대한 성찰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 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일종의 억압기제인 말을 배워가면서 그는 제일 먼저 "타자" -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개념의 타자이다 - 와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말의 사회적 폭력 현상이 서서히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을 통해 타자(여기서는 각종 사물들로 구체화되어 있다)를 구별해 내기 시작하고 자신을 통제해 나가며 타자를 통제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주인공 [카스파]의 의식 속에 주입되는 말들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것들 - 이때의 상식은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 이고, 카스파는 이 말들에 의해 세련된 사회인으로 변신해 간다. 연극 속에서는 이것이 무질서한 말장난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가르치던 교사들 - 이것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볼 수도 있고, 카스파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의 외면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이 극의 바탕적 흐름은 라캉적이기 때문이다 - 이 말하는 각양 비교와 비유들을 그대로 모방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이길 정도로 성장한다(여기서 잠시 브레히트의 서사적 연극 구조가 도입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 구조와는 다른 독일적인 것이다. 그것은 [카스파]와 관객과의 언어 유희를 하는 형태로 나타한다. 이를 통해서 페터 한트게는 관객을 연극의 한 장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만약 이런 서사적 구조와 우리의 마당놀이를 결합시키면 어떤 형태의 연극이 나올까?). 하지만, 이런 카스카의 정신적 성장은 말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성에 대한 성찰 - 이것은 텔레비젼 모니터에 나타나는 각종 정치적 언급들(모든 말들은 일종의 정치이다)과 그것의 허구성에 대한 관객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지만 - 이 시작되면서 깨어지기 시작하고, 결국은 다시 언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처음 카스파의 상태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깨달은 백치 - 세익스피어의 극 속에 나오는 바보들은 한결같이 이성적 존재들의 삶의 형태를 바보 특유의 말장난을 통하여 조소하고 조롱하며, 관객들은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 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연극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타자"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구체화시켜 주는 도구로서의 언어,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게 되는 "타자"에 대한 지배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다. 하지만, 이 극은 다른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처럼 대안이 없다. 그 끝은 항상 열린 구조이고, 혼돈이다. 이것이 이 극을 보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요인일 것이고, 또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인 관객들이 이 연극을 무언 중에 선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들 모두 포스트 모너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고, 우리들의 정신은 카스카처럼 언어의 감옥 속에서 혼란스럽다.

<카스파>를 보고 나오면서 재미있었다고 말한 관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몸으로 때우는 연극이 아니라 ‘말’로 때우는 이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했고, 지친 몰골을 주체하지 못하게 했다. 즐기며 볼 수 없는 연극은 의식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러나 피로한 의식이 점점 생기를 되찾을 때 이 ‘말의 연극’은 묘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극단 프라이에 뷔네의 36회 공연인 어느덧 이 젊은 극단도 십 년이 넘는 나이테를 둘렀고, 그 나이테만큼 다른 극단들이 갖지 못한 개성 있는 경력을 쌓아 왔다 <카스파>를 보고 나면 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 이 극단의 개성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극단 창립 열 돌 기념으로 막을 올렸던<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통해 보여주었던 그들의 성실성은 기성 극단에 대한 미덥지 못함을 거두게까지 했는데, 그런 성실한 자세는<카스파>공연에도 이어져서 그것이 이 극단의 재산임을 증명해 보였다.
3월 14일에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고, 3월 29일에 세실극장에서 재공연을 한 피터 한트케(Peter Handke) 원작의<카스파>는 우리의 연극의식에 혼란과 충격을 주었다. 물론 연극의식을 새로 다듬게 하는 연극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연극이거나 재미있는 연극일 수는 없다. 그러나 프라이에 뷔네가 공연한 연극들은 관객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는 것이 있었다. 비록 그 가르침의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밀고 나가는 극단의 태도만은 진취적이고 학구적인 것이 틀림없다. 이 작품의 제목은 역사 속의 인물인 카스파 하우저(Kaspar Hauser) 그는 독일 사람으로서 어떤 정치 음모에 말려 십육 년 동안 말도 걸음마도 배울 수 없이 우리 속에 갇혀 살았다 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연극이 바로 카스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연극은 어느날 갑자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사회에 편입된 백지상태의 한 인간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골자로 해서 전개되었다. 어둠이 가신 무대 위에는 걸음걸이를 배우지 못한 카스파의 허물어진, 어쩌면 짐승 같은 허우적거림이 있고 그의 침 튀기는 입은 ‘말’을 뱉어내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형태를 갖춘 말로서 튀어나온 것이 “나는 옛날 어떤 사람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이다. 이 말은 깊은 뜻을 지닌 것이다. 이미 거기에는 흉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으며, 이 원리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소리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역사 속의 인물인 카스파의 사건이 피터 한트케라는 작가에 의해 언어 모방의 대표적인 경우로 일반화된 셈이다. 그가 왕위 계승권자였거나 아니었거나, 역사 속의 실재 인물이었거나 아니었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사회로 돌아왔을 때에 그의 행동과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어 나가며, 말을 배워가는 과정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연극 무대가 언어의 실험대가 될 때에 관객들에게 연극의 묘미를 줄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관심을 끌 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극은 형태에 맞춰 내용이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소박한 연극 관념 때문에 형식과 내용이 흔들리는 연극이나 내용에 형식을 맞춘 현대극을 볼 때에 관념의 혼란을 일으키는 수가 많다. 특히 피터 한트케처럼 그런 현대극의 수법을 극대화해서 자기의 연극세계를 수립해 나갈 때에 대부분의 관객은 그런 것이 현대극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배울 뿐이지 연극의 흥겨움에 같이 끼어들지는 못한다.
작가가 투철한 작가의식으로 이야기 줄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연극 형식으로 환원된 말의 위력을 보여주려고 할 때에, 말의 위력에 대해 작가만큼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못한 관객들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객의 의식은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듯이 흥미롭고 즐거울 수가 없다. 오히려 복잡한 수학문제를 꼼꼼히 풀어 나가는 것처럼 힘든 연극놀이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이 어차피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작업이라는 점에서 프라이에 뷔네의 이번 공연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런 작업이 없으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나 하고 말 인간이라는 게으른 동물에게, 의식을 의식시키고 인식을 인식시키는 이런 연극적 작업은 실험적으로 전위적으로 감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묵은 연극의식으로 연극 예술은 때묻어 버릴 것이다. 오늘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연극이라고 할지라도 내일이 되면 일상적인 연극 현상이 되어 버리기 쉽기 때문에 프라이에 뷔네 같은 극단의 성실한 도전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
<카스파>는 정말 어려운 연극이었다. 카스파로 분장한 이상협은 능숙하지는 않지만 열의에 찬 연기를 했다. 카스파는 어느날 말의 소용돌이 가운데 내던져진 채로 열심히 말을 배운다. 처음에는 어줍은 발음으로 “나는 옛날 어떤 사람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문장을 되풀이한다. 우리는 그것을 들으면서 같은 문장일지라도 발음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는 사실, 곧 말의 생명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 단어와 문장의 빛깔은 소리가 되었을 때에 다채로워진다. 그것에 견주어 인쇄된 말은 단일화되어 죽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같은 표현의 여러 가지 뜻에 대한 되물음과 해석이 시도되는데, 말의 세계를 넓히려는 인간 카스파에게 마이크를 통해 말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어조가 꽤 기계화된다. 카스파라는 사람과 그에게 마이크로 말을 일러주는 사람과의 관계는 인간과 기계의 자격으로 서로 이를 무는 형식이지만 그 둘 사이의 틈새는 점점 더 커진다. 한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몰아세워 가는 말의 기계화는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이다. 마침내 하나의 작은 개체인 인간은 ‘말’이라는 커다란 공동체의 기계에 휩쓸려 싫거나 좋거나 그 기계가 뱉어내는 한 제품이 되어 공동체 사회에 끼어들게 된다. 거기에 작가의 감상주의가 감추어져 있고, 말이라는 기계에 대한 불신이 숨어 있다.
우리가 개성 있는 삶을 살려면 스스로의 언어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침묵이다. 그런데 침묵은 죽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말을 익힌다. 말 익히기는 개성의 상실을 제물로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성이 강할수록 자기 말을 갖기 위해, 남의 말이나 만들어진 말이나 주어진 말에 반발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행동보다 익히기 쉬워 보이는 말이 실제로는 행동보다 훨씬 익히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이 연극은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발성법과 단어와 문장이 익혀지고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표현’이 이루어질 때에 인간은 과학의 어떤 발견에서보다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표현을 얻음으로써 대상이 비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비로서 존재의 빛을 받기 시작하는 돌이나 나무나 새 같은 사물과 마찬가지로 말을 통해 표현된 체험 곧 “내 구두끈” “허리띠” “나의 아픔” 같은 것들이 그 체험의 세계에서 극복되고 자기 것이 된다. 자기 것이 된 체험의 전제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체험을 표현하는 말은 논리를 지니게 되고 그 논리는 질서를 이루는 첨병이 된다. 그래서 피터 한트케가<카스파>를 통해 말하려는 뜻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말은 질서의 열쇠이며, 이 질서는 사회적인 질서에 앞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말이 질서를 확립하게 되면 인간이 오히려 거기에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피터 한트케의 날카로운 문명 비평적인 안목은 전혀 정치적인 의도가 없어 보이는데도 관객들은 섬세한 언어구조가 정치권력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권력도 스스로 살찌려 하듯이 ‘말이라는 존재’도 자기 세계의 확대를 꾀한다.<카스파>에서는 그것이 좋고 나쁨을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인식이 된다. 말에 대한 혼돈이 극복됨으로써 인간의 의식이나 체험이 정돈되고, 그것은 또 주변 환경의 정돈으로까지 이어져서, 구체성을 지닌 말이 추상성을 지닌 사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돈된 말이 참으로 좋은 것일까? 정돈된 것, 곧 믿을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일상화되어 때묻은 것이다. 말의 마술사인 시인은 그 ‘말의 일상화’ 속에서 말의 놀이로 말을 파괴하고 말의 세계를 확대하고 싶어한다. 연극<카스파>는 바로 그러한 놀이의 현장인 셈이다.
이야기의 전개에만 익숙한 우리 연극 관객에게는 이러한 연극은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에 어리벙벙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스파 하우저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빌어와서 그에게 말을 연습시킴으로써 말의 질서가 곧 사회의 질서라는 것을 밝혀 나가는 이 연극에서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말이 곧 내 인격이며, 나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말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한 이 연극은 지금까지 우리 앞에 있어 온 연극들이 얼마나 뒤떨어진 것이었는지를 반증시켜 주는 연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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