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1장- 스미스 부부가 영국식 대화를 나눈다.
음식으로 시작한 스미스 부인의 말들에 반응없던 스미스. 시계종소리 들로 시간의 흐름이 알려지고, 스미스는 신문을 읽다 말고 뜬금없이 몇 년전의 죽은 사람얘기를 한다.그런 그의 말에 스미스 부인은 또다른 뜬금없는 말들로 반응 한다.
2장, 3장- 하녀 메리가 등장하고 그녀는 하녀답지 않은 말들을 하며 마틴 부부가 온 것을 알린다.
4장 -메리가 나간후 마틴부부가 등장하여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이것 저것 묻다가 그 질문들을 통해 끝내는 자신들이 부부임을 확인 한다. 말들은 건조하게 진행된다.
5장 -메리가 나와 앞의 마틴부부 얘기를 설명하며 그들의 논증체계가 틀렸다고 한다.
6장 -마틴 부부의 화해.
7장 -마틴 부부와 스미스 부부의 얘기가 시작된다.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며 듣고 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여러번 울려 그때 마다 스미스 부인이 나갔지만 밖엔 아무도 없다.
8장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 갔던 소방 대장이 등장하고, 그들 부부에게 엉뚱한 부탁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모두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9장 -메리가 나서서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을 하녀가 버릇없다고 한다. 메리 역시 말 안되를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10장 -메리를 쫒아내고 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소방대장이 나간다.
11장 -남은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가 서로 경쟁하듯 언어의 유희를 이용한 말들을 뱉어낸다. 극에 다다른후 제 1장의 스미스 부부의 대사와 행동들을 마틴부부가 반복한다.

부조리극을 내용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일까? 정리하는데 그런 생각이 스친다. 작품 내용보다 이미지가, 그리고 그 안의 ‘말’ 이 참으로 재미있는 작품이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부분이 많다. 재미있어서 혹은 너무 어이없어서. 이 극은 효과를 이용해 극 연결이나 시간의 흐름을 잘 살리고 있고, 극 효과들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정형화된 사람들의 예측하기 힘든 대화와 행동들, 이 부조리한 상황으로 인해 이 극을 대하는 사람에게 쇼크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즐거운 쇼크가 될 수도!
1950년 초연 당시에 내세운 ‘ 반연극 (反演劇)’이라는 부제(副題)가 말하듯이, 1950년대에 대두된 부조리(不條理) 연극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스미스와 마틴이라는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하는 이 극은 플롯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 일상생활 속에 파묻힌 부부생활의 무의미함, 그리고 인간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불가능성, 말하자면 생의 불모성(不毛性)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수법으로서는 일상적 회화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말 자체가 지니는 무의미함을 단조롭게 반복하며, 우리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해오던 엉뚱한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과장하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0년 극단 ‘가교(架橋)’에 의해 공연된 후, 여러 극단에서 공연하였다.

어쨌든 초기 세 작품 중 「수업」과 「의자」에도 죽음이 등장한다. 더욱이 「살인자」「코뿔소」,「공중 보행자」,「왕은 죽어가다」등 베랑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른바 '베랑제 연작'을 비롯해서 이오네스코 극작의 후기 작품들은 대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왕은 죽어가다」나 「살인 놀이」는 작품 전체가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왕은 죽어가다」는 베랑제 1세라는 왕이 죽음을 맞아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차츰 수긍하게 되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소상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좀 더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살인 놀이」이다. 아마도 극작 생활 20년 간 천착해 온 문제에 대한 완결편이 아닐까 싶다. 이오네스코는 「살인 놀이」이후로도 1972년 「맥베트」등 1980년까지 드문드문 몇 작품을 더 발표하고는 1994년에 작고했다. 부조리극이 '고전'이 되고, 따라서 '전위'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까지 확인한 셈이다. 사실 훨씬 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노벨상을 받았고, 이오네스코 자신도 이미 1970년에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왕은 죽어가다」가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 목록에 오른 사실 등을 생각하면 그러한 단정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므로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아직도 '부조리'라는 어휘 때문에 형성된 막연한 오해를 해결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즉 아무리 부조리극이라도 연극인 이상 극작과 형상화의 과정은 논리적일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부조리'와 인물 사이의 '소통 불가능'을 묘사했더라도 대사간의 연결 고리도 분명히 존재하고, 혼란이 빚어지고 전개되는 상황도 분명히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즉 부조리극이니까 무슨 내용인지 파악을 안 해도 되고, 또한 무슨 내용인지 전달이 안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그릇된 믿음은 무대 형상화 종사자들에게는 금물이며, 관객들 역시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도 현대극이니까 그렇겠거니 하며 용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연극은 거기 사용되는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정도의 전달력조차 갖추지 못한 작품이라면 십중팔구 작가나 번역자 또는 연출이나 연기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동구권과 서구권의 부조리극을 비교했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과연 어떤 식의 부조리극이 유효한지 곰곰 따져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생각과 그에 따른 판단이 가능할 때 비로소 부조리극에 대한 이해가 되었다 할 것이고, 또한 우리 식의 부조리극이 가능할 것이다.

반연극이란?
1950년 이후 프랑스에서 나타난 전위적인 연극 운동으로서 연극적 환상의 모든 원리를 부정하는 극작술과 연기스타일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플롯과 등장인물의 성격에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종래의 원칙을 무시하고,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인간의 깊숙한 내면에 깃든 허무와 불안을 추구한다. 관객이 기대하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거부하고 언뜻 보면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행동과 대사를 사용한 연극을 가리킨다. 지적 해석을 거부하고 인물의 자기 동일성도 무시되며, 표현 자체를 중요시하면서 언어 자체의 환기로 관객을 일깨우려 한다. 이 용어는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가 전통적인 희곡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쓰기 위해 부제 '반희곡 antipie'ce'을 붙인 작품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1950)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진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전통적인 희곡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쓰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반연극이라고 불렀다. 그의 희곡에서는 아무런 액션도 전개되지 않고 등장인물들은 너무 비슷해서 뚜렷한 개성이 없었다. 대사도 상투적이고 주제는 무의미하고 계속 반복되었다. 이 용어는 학문적이라기보다 신문·잡지에서 주로 사용되는 '애매모호하게 뭉뚱그린' 말로서 조롱극, 부조리극, 행위가 없는 연극 형식, 해프닝과 서사 형식도 포함한다. 이것은 예술과 사회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데 예술 전반에 대한 부정인지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극작술을 부정하는 것인지가 모호하다. 그리고 미학적 원칙을 내세우지 않고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다. 모방과 환상, 관객의 동화작용을 거부하고 행위가 비논리적이며 우연을 중시하고 인과율을 무시한다. 또한 무대가 교훈을 주거나 정치적인 힘을 갖는 데 대해 회의적이고 모든 가치, 특히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가치를 부정한다. 이것은 철학적인 드라마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반대 사조로 규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초역사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면을 강화하여 부조리와 '반주의(anti-isme)'가 약화시키려 한 전통적인 극 형식을 되살리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의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1952)로 반연극의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아르튀르 아다모프(Arthur Adamov),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작품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오네스코는 연극의 기존 틀을 깨려고 노력한 사람 같다. 제목부터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에서<대머리 여가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녀의 역할은 소소하게 넘어가는 대화 도중에 나올 뿐이다. 기존의 연극에서 제목이라 함은 주제를 아우르고, 작가의 목적을 한눈에 나타낼 수 있도록 지었다. 예로,<세일즈맨의 죽음><갈매기>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오네스코는 제목을 가지고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기존의 연극에 길들여진 관객은 대머리 여가수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연극을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영국의 좀 이상한 가정의 모습이다.
소방대장 (문 쪽으로 향하다가 멈춰서)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
전체적인 침묵. 답답함.
스미스 부인 늘 같은 머리 스타일이죠.
소방대장 아. 네. 그럼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렇게 극은 흘러간다. 즉, 사건이나 갈등은 없다. 단지 일상적 대화 속에 머물 뿐이다. 더구나 이러한 대화라는 것도 기존의 일상을 담으려는 사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비논리적이고, 언어체계 자체가 부조리하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우리들이 자주 하는 대화 속에 이러한 부조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1장에서 스미스 부인이 신문을 보는 스미스에게 자신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스미스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혀를 끌끌찰 뿐이다. 대개 아버지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면서 하루 종일 있었던 이야기나 아이들, 식사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나. 부조리한 것이 단지<대머리 여가수>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 일상도 부조리하다고 느껴지게 한다

등장인물의 부재. 언어의 비논리적 반복
영국식 안락의자가 있는 영국 중류 가정의 실내. 영국의 저녁. 영국식 안락의자에 앉은 영국인 스미스가 영국식 실내화를 신고 영국식 난로 옆에서 영국식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영국 신문을 읽고 있다. (중략)
스미스 부인 당연하죠. 그리고 바비 와트슨한테 백모님이 계신데, 바비 와트슨이라고, 딸아이는 바비 와트슨 말예요. 바비 와트슨의 딸, 걔 교육은 그 할머니가 맡을 거예요. 그럼 바비도, 바비 와트슨의 엄마요, 그이도 재혼할 수 있겠죠. 사람은 있어요?
스미스와 스미스 부인의 대화, 마틴과 마틴 부인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규정지어 놓은 이름에 관한 논리가 무참히 깨어진다. 동명이인일 수 있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왠지 속은 느낌부터 든다. 마틴부부는 실제로 부부가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을 가지고 장난을 논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안에 무수한 논리가 깨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얻은 해답조차 하녀의 대사 하나로 무참히 깨어진다. 등장인물을 관객은 이제 규정짓기 어렵고, 하녀라는 신분으로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하고 있고, 소방대장이 들어와서 불을 내야한다고 한다. 모든 관계 설정이 부조리하다. 그동안 우리가 규칙이라 고스란히 만들어 놓았던 일상을 깨뜨린다.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영국의 한 가정을 무대로 펼쳐진다. 그가 무대를 사회보다도 가정을 택한 것은 우리 일상과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보일 수 있다. 더 넓게 본다면 가장 사회의 축소된 가정이 우리 사회의 일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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