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프란츠 베르펠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clint 2015. 12. 27. 14:40

 

 

 

 

 

1940년 자국민과 이주민 망명의 물결이 넘실대는 패전 프랑스의 카오스 상황이 역사적 무대다. 파리 호텔 '몽 르포에 드라로즈’의 세탁장에 마련한 임시 방공호에는 프랑스인 투숙객과 함께 망명 폴란드인 야코보프스키, 패전국 폴란드 대령 스테르빈스키, 그의 당번병 샤부니에비치 등이 앉아 있다. 특히 스테르빈스키는 비밀 서류를 남프랑스를 거쳐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로 가져가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야코보프스키는 세 살 때 이미 폴란드에서 독일로 피난했으며, 그 뒤로도 빈, 프라하, 파리 등 전 유럽으로 도피 중인 유대인이다. 짐은 없지만 항상 운이 따르고 약간의 돈이 있는 여행자이며, 또한 자신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으면서 절망한 프랑스인들을 위로하는 침착한 성품의 망명자다. 독일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술책과 기지로 도피 가능성을 모색한다. 남을 돕기 좋아하는 그는 도피를 위해 고물 롤스로이스룰 한 대 구해 스테르빈스키 대령과 그의 당번병을 태워 준다. 그러나 귀족이며 기수인 스테르빈스키에겐 자기 명예와 여인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사명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는 명령을 내려 아직 점령되지 않은 남쪽 대신 이미 독일군이 주둔해 있는 북쪽으로 간다. 독일군 점령 지역 내에 있는 연인 마리안을 데려가기 위해 서다. 그는 고집스럽고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정신적, 지적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우월한 야코보프스키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든다. 마리안을 성공적으로 구출한 후 네 사람은 피난민과 군인들이 넘쳐 나는 프랑스를 횡단한다. 이들은 야코보프스키의 기지로 여러 차례 나치에게 체포될 위기를 모면한다. 야코보프스키의 통찰력과 협상능력을 그저 유대인의 특성으로 치부하고 경멸하던 대령도 결국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다른 한편, 대령은 질투심으로 괴로워한다. 마리안이 영웅적인 장교보다 시민의 정신적 우월을 높이 평가할 뿐 아니라, 야코보프스키의 겸손한 성품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슈타포가 손을 뻗치기 전에 남쪽 생장드뤼즈에서 구원의 손길이 나타난다. 스테르빈스키가 연합군 장교들을 영국으로 데려갈 임무를 맡은 영국 해군 라이트 중령을 만난 것이다. 그의 잠수함에는 두 자리가 비어 있다. 외관상 프랑스인과 다름없는 스테르빈스키의 당번병은 프랑스에 남는다. 야코보프스키는 마리안을 위해 자리를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구국의 화신인 마리안은 프랑스에 남아 사랑하는 대령이 승리자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은 탈출하는 반면 마리안은 계속 프랑스에 남아 프랑스 자유의지의 상징이 된다. 드라마는 집에서 스테르빈스키가 오길 기다리던 연인 마리안이 독일 점령군에 저항하는 투사로 변신하면서 다시 기다리는 연인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한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분별력과 유머를 잃지 않고 항상 실패와 성공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는 야코보프스키는 독이 든 병을 바다에 내던지고 뱃멀미 약병을 소지한 채 스테르빈스키, 라이트와 함께 배에 오른다.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은 독일어로 쓴 가장 훌륭한 희극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독일 망명 문학 중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관객 취향과 연극적 효과를 고려한 드라마다. 등장인물 중 주인공인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을 중심으로 그들의 특성과 대립적, 상호 보완적 관계를 알아보자. 폴란드 태생인 이름 없는 유대인 망명자 야코보프스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현실감각이 뛰어나다. 정중하고 적대자에게도 호감을 주는 태도, 능숙한 대인 관계도 돋보인다. 그는 프랑스 헌병 대장에게서 자동차 연료를 조달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여러 번 도피 상황을 겪은 터라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전 유럽으로 도피 중인 그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2막 마지막 장면에서 네 도피자는 독일 순찰대에 붙잡혀 불심검문을 당한다. 모두 게슈타포에게 신분을 중명할 수 있지만, 현상금과 함께 수배 중인 대령만 증명할 수가 없다. 이처럼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야코보프스키는 기지를 발휘해 거짓 이야기를 꾸며댄다. 대령은 독일군 공습으로 파괴된 낭트 근교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프랑스인으로, 지금 부인인 마리안, 그리고 정신병원 간호사 샤부니에비치와 함께 고향에 가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증명서를 소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정신병원을 뛰쳐나온 정신병자이니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둘러댄다. 덕분에 일행은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할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다. 탈출에 성공한 야코보프스키는 형리와 희생자만 있는 극단적이고 양극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삶을 지탱하고 살아남는 본보기적 인물이다. 또한 그를 통해 수천 년에 걸쳐 고향을 상실한 유대 민족의 운명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폴란드귀족이며 철저한 유대인 배척주의자인 스테르빈스키 대령은 야코보프스키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는 현실감각이 없고, 허황되고 자의식 강하다. 뿐만 아니라 오만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몽상가이며, 여전히 귀족이자 장교로서 공허한 명예심에 사로잡혀 있는 염세주의자이기도 하다. 대령은 돈키호테 같은 성격으로 이 드라마에서 극단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등장한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줄 접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자부심,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시적 감각 또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낭만적인 감정, 여인에 대한 기사도 정신 등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요인들이다. 이를테면 절박한 위험 상황에서 연인을 위해 세레나데를 들려주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대령의 시적 감각은 그로테스크하면서 도 감동적이다. 야코보프스키 역시 설탕에 절인 밤을 사기 위해 폭탄이 퍼붓는 거리를 달리는가 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마리안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낙천적인 면을 보여준다. 서로 대립했다가도 다시 화해하면서 이들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이 드러난다. 야코보프스키는 탈출을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지만 운전을 못한다. 스테르빈스키는 운전할 순 있지만 연료조달은 야코보프스키에게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동차는 두 사람을 묶어 주는 기능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야코보프스키 자신이 전진의 촉매로 작용한다. 즉, 다른 사람이 자포자기에 빠질 때, 이들을 독려하고 앞으로 이끌어 가는 추진 연료 역할을 한다. 서로 화해하는 결말에서도 두 사람이 상호 보완적임이 입증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테르빈스키가 더 이상 유대인 배척주의자가 아님이 밝혀지고, 야코보프스키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생명을 건 탈출에 성공하는 데서 이 드라마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 준다. 베르펠은 일방적인 흑백 논리나 적대적인 상(像)을 구축하는 데 휩쓸리지 않는다. 추적자인 독일군에게도 개인적으로는 인간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프랑스 여성과 독일군 장교 사이의 대화에서 미래의 평화, 특히 유럽 인접국들 사이의 화해가 일종의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다시 두 사람의 대비, 대조를 종교적 관계와 관련해 살펴보자. 두 주인공의 대립은 유대교와 기독교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두 종교를 상징하는 영원한 유대인과 성 프란체스코는 이 같은 비유를 뒷받침한다. 곱슬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영원한 유대인, 샌들을 신은 창백한 성 프란체스코, 두 여행자의 이념적 본질이 이인승 자전거로 나타날 때 희극성이 두드러진다. 이 이인승 자전거는 화해의 상징이고 헤어진 것이 재결합하는 유토피아다. 베르펠은 수십 년 동안 유대교와 가톨릭교의 불가분 관계를 설파했다. 스스로도 《베르나데트의 노래》성공 이후 차츰 유대 사상에서 가톨릭으로 옮겨 갔다. 이 드라마에서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장교는 종교 화합을 위한 상징적 존재들이다. 여기서 베르펠은 영원히 평행을 달리며 대립하던 두 종교가 언젠가는 접점을 찾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유대교와 기독교가 함께 만나 화해할 때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 신앙을 믿는 것이다. 후기 작품 중 최고작으로 꼽히는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에서 베르펠은 탁월한 아이러니로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망명자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그렇게 해서 베르펠은 망명이란 역사적 체험으로 시대를 초월한 우회를 형성한다. 이상한 상황에서 야기되는 스테르빈스키의 우스꽝스러운 영웅 심리에 대한 우수어린 풍자, 야코보프스키의 낙천적 기질과 재기 발랄함 때문에 도피와 전쟁에 대한 공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박해와 추적으로 굴욕과 고난을 겪는 망명자들에겐 어떠한 시련도 극복 할 수 있다는 확고한 낙관주의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낙관주의는 자체로 모순되는 숙명적 낙관주의이며, 기지나 유머도 절망적 상황에서 동원되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일이 일상사가 된 현실을 견디게 히는 비장의 수단이다. 결론적으로 베르펠은 “비극의 희극"으로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 사이에서 끝까지 균형을 유지하면서 두 표현 가능성 사이에 종합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은 1890 년 9월 10일 체코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 루돌프 베르펠과 알비네 베르펠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일계 유대인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문화 공간에서 성장하면서 막스 브로트를 비롯한 프라하- 독일작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나아가 릴케, 카프카, 마이링크와 함께 프라하 독일문학을 꽃피우면서 세계문학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베르펠은 당시 프라하 독일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카페 아르코' 문학 모임 좌장이기도 했다. 카페 아르코에서는 도스토엡스키, 휘트먼, 지드, 무질에 대한 토론이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카프카도 단골 로 드나들었다. 이 무렵 싹튼 베르펠과 카프카의 우정은 카프카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1924년 카프카가 키어링 요양원으로 옮겨졌을 때 베르펠은 그에게 장미꽃과 함께 그때 막 출판한 소설 《베르디. 오페라 소설》을 선물했다. 이 소설이 카프카가 읽은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휘트먼 영향을 받은 찬미가풍의 격정적인 표현주의 시집 '세계의 친구'(1911)발표 이후 동년배 작가들 중 선두주자였던 베르펠은 낭송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카페 아르코의 소음과 담배 연기 속에서 시 한 편이 완성되면 그는 곧바로 청중에게 큰 소리로 낭송해 주곤 했다. 이 무렵 지은 시들은 주로 신에의 귀의, 인간애, 사해동포주의를 주제로 하는 열정적이고 엑스터시하며, 환상적인 표현주의 시들이었는데, 이후 베르펠의 관심은 차츰 표현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드라마와 소설로 옮겨 간다. 드라마 분야에서 베르펠은 처음에 '거울인간' (1921) 등 상징적이고 다소 과장된 수사를 사용한 이념극 내지 구원극을 썼다가, 점차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작품으로 극작 영역을 넓혀 간다.

소설 분야에서는 부자 갈등이라는 주제를 다룬 《살인자 가 아니라, 살해된 자가 죄인이다》 (1920)를 끝으로 표현주의를 극복하면서, 음악 애호가로서, 열렬한 베르디 숭배자로서 장편소설 《베르디. 오페라소설》(1924)을 발표해 소설가로서 돌파구를 열게 된다. 이후 세계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단호한 문명 비판을 시도한 《바르바라》(1929), 아르메니아인들의 해방전쟁을 소재로 한 《무자다그의 40일》 (1933) 등을 발표한다.

작가로서 이 같은 성공은 나치 집권과 함께 잠정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사이 당대 유명한 팜 파탈이었던 알마말러(Alma Mahler)에와 결혼한 베르펠은 그녀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생활한다. 그러던 중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부부는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한다. 그런 다음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이때 피레네 마을루르드에서 방앗간지기의 딸 베르나데트가 바위 동굴에서 성모 마리를 보았다는 기적 같은 얘기를 듣고 마음에 위안을 얻었으며, 성공리에 미국으로 망명하면 곧바로 베르나데트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맹세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베르펠의 루르드 맹세다. 베르펠은 미국에 도착한 뒤 약속대로 성 베르나데트를 기리는 소설 《베르나데트의 노래》를 완성한다. 이 소설은 출판 되자마자 독일 망명문학 중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되었고, 베르펠은 이 같은 대성공을 또 다른 루르드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베르펠이 미국에서 저술한 후기 작품들로는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두 이민자의 운명을 다룬 희극 <야코 보프스키와 대령>(1945), 현대판 신곡으로 구상되었으나 오히려 미래 공상 소설에 가까운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별》(1946)이 있다. 특히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은 독일어로 쓴 가장 뛰어난 희극 중 하나다. 그는 생전에 15편의 드라마, 수많은 시와 단편, 9편의 소설, 2편의 미완성 장편소설 외에 방대한 에세이를 남겼는데, 그의 문학 및 사상의 중심은 신앙 문제와 가치 붕괴에 대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작가와 세계의 관계, 즉 유럽인인 동시에 유대인이라는 이중 상황에서 겪는 갈등 및 긴장 관계다. 베르펠은 1945년 8월 26일, 일요일 오후, 비벌리힐스 집 서재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들을 고르고, 교정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사흘 후 그 는 손에 묵주를 쥐고, 목에는 루르드 메달을 건 채 매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