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8~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검열이 없어지면서 독일의 좌익 지식인들은 예술의 정치화를 지향한다. 이들은 러시아의 프로렛쿨트를 모범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전개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화론을 따라 에르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는 자신의 프롤레타리아연극에서 자신의 연극술을 통해 집단 뒤에서 개인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수행되었던 "연극의 정치화”에 상응하는 프롤레타리아 연극 창설의 프로그램에서 피스카토르는 프롤레타리아적 연극의 목적을 '모든 예술적 의도는 혁명적 목적에 종사해야 하며 즉 계급의식의 의식적인 강조와 선전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톨러는 노동자들을 위한 극작가로 자신을 규정하였지만 공산주의적 노선이나 당령을 거부한다. 그는 작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속에 들어있는 부르주아 적인 제한적이고 계급적인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으로 사회 참여적이긴 하지만 당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의 자리는 노동자 대열에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공장과 거대한 도시들과 노동자 대중의 힘든 맥박 소리를 듣고 언어화 할 수 있는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적 작가는 인간적인 작가이다.
“힝케만"은 그의 프롤레타리아 예술론에 가장 상응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롤러가 "사회혁명을 통한 모든 행복의 가능성의 비극적 한계를 인식한 시기"에 쓰여 졌다. 그는 1924년 자신의 작품의도를 밝히면서 “힝케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어떤 유형의 해결될 수 없는 비극적 고난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사회도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비극적 경계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1921년 독일 전후의 프롤레타리아의 일상 속에 살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서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심각했던 20년대 초반의 독일이다. 이 비극의 중심에는 개인의 불행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없이 겪어야하는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 다루어지고 있다. 개인의 극적 행동과 사회적 공공의 극적 행동이라는 두개의 극적행동의 상호관련성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의 플롯은 다음과 같다.

전쟁 부상으로 성기능을 상실한 귀환병 힝케만이 살아가는 유일한 힘은 그의 아내 그레테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아내의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그는 우연히 그레테의 어머니에게서 피리새의 고통을 보게 된다. 피리새가 눈이 멀면 노래를 더 잘 부른다는 기사를 읽고 빨갛게 단 바늘로 피리새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 힝케만은 피리새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한다. 자신의 처지를 조작인형과 창포병이 든 개 등의 예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힝케만의 넋두리에 그레테는 참을 수 없는 격한 감정으로 대립한다. 부부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힝케만의 동료 그로스한의 출현으로 파국에 이른다. 기계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힝케만과 그로스한의 갈등구조를 암시한다. 힝케만은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그레테는 그로스한에게 힝케만의 비밀을 털어놓고 위안을 찾는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힝케만은 야시장에서 진기한 볼거리로 등장하고, 그레테는 그로스한과의 연애행각을 벌인다. 서로 상이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두 사람의 행동방식은 야시장에서 만나게 된다. 야시장의 상설 무대에 등장하여 독일의 힘, 호문쿨루스로 쥐의 피를 빨아먹는 힝케만을 목격한 그레테는 자신의 부정을 참회하고 힝케만에게 돌아가려 한다. 그로스한의 남성적 자부심은 그레테에 의해 무시된다. 힝케만의 개인적인 운명과 사회적 상황과의 연결고리가 제공된다. 노동자 주점에서 두 노동자들이 노동직종의 천함과 귀함에 대한 말다툼을 하는데 이 장면은 힝케만의 개인적 운명에 대한 좌절의 원인이 개인 차원을 넘어 노동자들의 분열상이란 사회적 차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료들 앞에서 성기능을 상실한 남성이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힝케만은 자신의 예를 들어 영혼의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로스한의 갑작스런 출현은 그의 희망이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증명된다. 그로스한에게 성 불능은 살 가치가 없는, 이혼의 법적근거를 의미하며 이러한 그로스한의 판단에 모든 동료들 또한 조롱 섞인 웃음으로 동의한다. 대도시 대중들의 삶의 모습이 쓰러진 힝케만 앞에 거리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구호에 따라 이곳저곳 떼 지어 움직이는 전쟁부상자들의 행렬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을 보여주며 거리 행인들을 통해 인플레이션과 실업으로 인한 삶의 혼란상이 펼쳐진다. 대도시 인간들 사이의 삶의 모습은 신뢰감의 상실, 이기심, 폭력, 인정 없고 무자비함 등의 대 혼란상으로 나타난다. 창녀, 와플판매인, 상인, 고무방망 이를 든 남자, 화염병을 든 남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개인성을 상실한 채 그들의 기능에 따라 조작되는 자동인형들에 불과하며 기계적으로, 눈앞의 이익을 쫓거나 욕망을 쫓아다닌다. 표현주의가 추구했던 이상주의는 상표 이름으로 등장할 뿐이다. 거리에 쓰러진 힝케만을 내버려두고 행인들은 군인들의 행진음악에 환호하며 몰려간다. 힝케만은 이러한 대도시 거리 풍경들을 무의식 상태에서 인식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만나는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언어화한다. 다시 힝케만의 거실로 되돌아와 이 작품의 극적 행동이 연속선을 지닌 비극적 회귀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원형 구조는 탈출구가 없는 힝케만의 개인적 운명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적 차원에서의 어떠한 정치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정지 상태를 시사한다. 시대에 대한 인식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체념으로 끝난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며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는 그레테는 힝케만의 철저한 거부와 체념에 절망하여 자살한다. 혼자 남은 힝케만 또한 죽음을 준비 한다.

귀환병 힝케만이 전후 독일에서 얻은 인식은 세상은 기계화되어 있으며 이 자동화된 세상에서의 일탈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동료 그로스한은 인간을 생산과정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신즉물주의 적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힝케만에게 자동화된 기계, 계속 돌아가는 축음기와 자동음악기, 임의로 뛰어내릴 수 없이 계속 돌아가는 회전목마 등은 구속적인 세계, 자유를 박탈당한 세계, 즉 동일한 것의 반복뿐인 세계를 의미하는데 반해 그로스한에게 있어서 기계는 자신의 "남성적 힘"을 확인시켜주는 도구이다. 이들 간의 기계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야시장에서의 회전목마를 통해 상징적으로 축약되어 나타난다. 힝케만에게는 회전목마는 자의적 이탈이 란 가능하지 않는 오로지 반복만이 있을 뿐인 저주받은 삶을 의미하는데 반해, 그로스한에게는 자신이 선택하여 누리는 쾌락의 도구이다. 그로스한의 기계에 대한 태도는 여자에 대한 그의 태도와 상응하고 있다. 그로스한에게 친구의 아내, 그레테 역시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남성의 노예에 불과하며 그의 남성을 증명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 인 힘을 "기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여성"을 통해서도 확인하려는 권력형 인물이다. 기계 앞에서 그는 착취자의 기쁨에 도취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남성적 힘과 경쟁력이며 그에게 세상은 능력위주의 자본주의적 경쟁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남성적 사회에서 성기능을 상실함은 “남성''의 상실, 경쟁력의 상실로 해석되며, 이는 모든 생의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임, 불필요함으로 확대 해석되어진다.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남성을 상실한 사람은 어디에도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다. 힝케만은 전쟁부상으로 인한 자신의 성불능이 자연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산물임을 파악하지만 그가 사는 사회의 지배 담론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반 담론적 투쟁도 전개하지 못하며 어떠한 저항방식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의 사고체계와 행동방식은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헤게모니적인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힝케만의 비극적 세계관의 확장을 보여주는 웃음에 대한 상징은 첫 장면부터 극적 행동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로 작용한다. 1막에서 그레테가 자신의 성불구를 비웃지 않을까하는 힝케만의 불안은 피리새의 체험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불안은 그레테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극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진실 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님이 제 3자, 즉 힝케만의 동료 그로스한의 출현으로 분명해진다. 그로스한은 성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레테가 그로스한에게 힝케만의 비밀을 털어놓자 그로스한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이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조롱하는 그로스한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의 고통 앞에 웃을 수 있는 잔인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떤 혁명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은 거듭 반복되고 확인되는 작품의 모티브를 구성한다. 그로스한이 비양거리며 폭로하는 힝케만의 비밀에 노동자 동료들 또한 웃음을 터뜨린다. 이로써 비웃음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로스한의 거짓 음모 또한 웃음과 관련된다. 그로스한이 힝케만에게 그레테가 야시장에서 힝케만을 보고 비웃었다고 거짓 진술하자 힝케만은 절망한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해 비웃는 인간은 악마와 같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지옥이다. 힝케만은 비웃음으로 전쟁이 다시 찾아 왔다고 절규한다. 분열된 노동운동으로 노동자간의 어떠한 인간적 연대감도 기대할 수 없는 전후독일에서 힝케만이 겪는 운명은 실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롤러는 힝케만의 노동자 동료들에 대한 비난을 통해 자신의 노동자 대중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힝케만은 더 이상 초기 드라마에 서와 같이 자신의 의지로 낡은 세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영웅적 인물은 아니다. 롤러는 힝케만이란 인물이 더 이상 표현주의 드라마에서와 같이 추상적인 이념을 전달하는 이념 전달자가 아님을 사고의 체계의 형성과정과 심리적으로 동기가 유발되는 외적 사건 진행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처음으로 개인의 구체적인 운명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롤러는 개인적 운명을 통해 일반적 문제들을 제시하며 초역사적차원 즉 일반적이고 인간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롤러는 이 작품을 어떤 사회에서도 어떤 국가에서도 항상 고통 받는 그리고 어두운 운명을 지고 밝은 세상에서도 사회주의가 쟁취된 사회주의적 공동체에서도, 고통 받고 살아야 하는 이름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바치고 있다. 힝케만은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이며 인간의 잔혹성이 지배하는 한 힝케만의 운명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진술한다.

1923년 9월 19일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인 힝케만''이 초연되었을 때,, 당시 유명한 연극비평가 알프레드 케어는 라이프치히의 연극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브레히트의 "바알"이었으며 롤러의 "힝케만"은 아니었다고 쓰고 있다. 1924년 1월 드레스덴에서 상연되었을 때 이 상연은 그러나 상당한 정치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극좌익과 극우익으로 치닫는 당시의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힝케만" 초연 날짜인 1924년 1월 17일은 모든 민족주의자들에게 신성시되고 있던 독일제국 창설 일이었다. 상연은 조직화된 방해공작 때문에 간신히 끝이 날 수 있었고 극우파적인 국수주의자들의 연극배우와 극장책임자에 대한 살해위협 때문에 나머지 상연계획들은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경찰에 의해 체포된 난동자들에게 법정은 롤러의 작품이 애국적인 감정을 손상시킬 수 있는 공격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들의 개인적 명망을 참작한다는 이유로 석방을 선고했다. 비인에서의 “힝케만" 상연을 저지하려는 독일 국수주의자들의 시도는 비인의 경찰력에 의해 실패했으며 베를린에서의 공연을 저지하려는 노력들도 실패했다. 프로이센의 내무부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힝케만 상연은 공화국의 문제이다. 이 작품을 삭제함이 없이 허용한다.” 상연에 대한 국수주의자들 진영에서의 과민한 정치적 반응을 의식하여 롤러는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1923년 첫 판본에서 상이군인들 은 힝케만의 야시장 상설무대 전시장면에 이어 등장하지만 1924년 제 2판본에서는 힝케만의 환영장면속에 등장한다. 결말부분에서도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1판에서는 끝 장면이 힝케만의 자살을 암시하지만 2판에서는 자살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뿐이다. 이러한 미세한 수정 작업은 그러나 “힝케만”에 대한 증오를 줄이는데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거대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정치적 토론의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롤러의 독일 비판은 무대와 관객석 간의 합일로써 현실적인 비판의 장이 되었으며 작품 속의 우의는 현실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저지된 생각들은 거리에서나 혹은 관객석에서의 난투 전으로, 주 의회나 언론들의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롤러의 드라마는 20년대 만연한 반유태주의와 국수주의에 대항하는 공화국의 효과 있는 무기였다.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1893년 12월 1일 ~ 1939년 5월 22일)는 독일의 극작가다.
1차 대전 후의 혁명운동에 관련되어 복역 중에, 표현주의적인 반전극 <변전(變轉)>이 상연되었다. 청년이 전쟁체험으로부터 혁명에 눈을 뜨는 과정을 서정적이며 열광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사회혁명가의 비극을 그린 <군집 인간>, 기계문명에다 인간성을 대결시킨 <기계파괴자>, 전상불구자를 다룬 <힝케만>을 발표했다. 출옥한 후에 발표한 <힘차게 살고 있다>는 피스카토르에 의해 상연되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으로 망명 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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