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에드워드 올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

clint 2025. 2. 4. 07:02

 

 

 

뉴잉글랜드에 있는 대학 구내의 주택이 무대이다.

대학총장의 딸인 중년부인 마사는 그의 남편인 역사학 부교수 조지가

총장의 후계자는커녕 역사학과의 주임교수도 되지 못하는 것이 불만스러워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는데,

어느 날 밤 새로 부임한 젊은 생물학 강사인 니크와 그의 부인도 함께 어울려

만취가 되어 서로의 허위와 치부를 드러낸다.

마사는 조지의 무능함을 잔인할 만큼 공격하고 이들의 언쟁은 하니의 구토로 중단된다. 

하니의 상상임신과 구토증, 지나친 음주로 인한 추태로 무대는 서서히 혼돈으로 빠진다. 

마사는 니크에게 접근하고 하니는 취기로 추태를 부리며 조지는 독서에 열중한다

그때 종소리가 나며 광란의 수라장은 중단되고 조지는 아들 죽음에 대한 환각에 빠진다. 

조지는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니크와 하니가 퇴장하면서 광란은 끝난다. 

조지와 마사는 자신들이 꾸민 이 유희의 결말을 음미한다.

끝에 조지가 부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의 의미는 

"누가 환각없는 삶을 두려워 하랴"이다이상주의를 상실하여 불안한 부부는 밤의 유희에

빠져들고 인간의 온갖 허위와 마성을 노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달과 아들과 종소리는

이들의 광란과 상반되는 이상이자 현실에 대한 경종을 의미한다

 

 

 

 

 

미국 극작가 E. 올비의 3막 희곡이다. 1962년 초연(初演). 배경은 자그마한 대학 도시의 교사와 총장의 딸인 어느 중년부부의 가정이다. 부친의 뒤를 잇는 출세를 기대하고 결혼한 남편의 칠칠치 못함에 좌절해버린 아내와, 아내의 가치관에 등을 돌린 남편은 외로움을 서로 책임전가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된다. 연극은 그들의 집에 신임교사 부부를 맞이한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유망한 젊은 두 사람에게 자극받은 주인 부부의 새디스트적이고 마조히스트적인 심리전에 두 손님도 휩쓸리게 된다. 이 작품은 현대의 우화로 1960년대 미국연극의 대표작으로서, 올비는 T. 윌리엄즈, A. 밀러 이후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인정받았다.

 

 

 

두 시간 반 동안이나 주정뱅이들의 너스레를 듣는 것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연극일까? 아무도 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대답을 해줄 수도 있다. 에드우드 올비가 지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모든 대답을 가능케 하기도 하고 모든 대답을 불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천재시인 버지니아 울프는 이 작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대머리 여가수>라는 작품에서 ‘대머리 여가수’를 연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관객처럼 우리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지, 또 왜 두려워하는지를 알려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 나간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고 다만 미국이라는 문명사회에서 사는 기성세대들의 사생활만이 펼쳐진다. 호턴이라는 극평가가 말했듯이 이 작품에는 기회주의, 끔찍함, 위선 그리고 무력함이 꽉 들어차서 질서도 없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주제는 더욱 흐릿해진다. 그러나 비록 그 때문에 올비가 위대하다 할지라도 세실소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은 위대함의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연극에서 쓰는 놀이의 규칙이 한국의 관객에게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놀이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적 관객들은 그 놀이가 지니고 있는 특수한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놀아 본 놀이판이 아니어서 이 연극의 분위기가 낯설기 때문에 공감의 띠를 이루지 못했다.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험과 의식이다. 그런데 올비의 작품은 겉으로 드러난 주제가 너무 흐릿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험과 의식의 바탕에서부터 폭넓게 이해되기 어렵다.

 

 

 

 

네 사람의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자기 세계를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주정뱅이의 너스레처럼 지겹게도 지껄여대는 네 사람의 경험들은 저마다 겉돌고 있었다. 그 경험들이 무대를 통하여 관객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관객에게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특수한 경험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그런 점으로 보아 문화권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연출가는 마치 낯선 놀음판을 끌어가는 물주처럼 힘겨운 일을 하였다. 무대장치는 술자리와 서재와의 사이에 쇠기둥을 세워 놓음으로써 무대 공간을 둘로 갈라 놓음과 동시에 흔들리는 주정뱅이의 세계를 흔들리지 않는 기둥으로 고정시키고 있는 듯한 효과를 냈다. 한낱 장식이나 잔재주에만 머물지 않고 정말 무엇인가를 창조해 보겠다는 무대미술의 성실이 없었더라면 이 연극은 그나마 원작이 지닌 말의 무게를 도저히 버티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대 위에 책과 술로 상징된 두 세계가 맞닿아 있듯이 등장인물도 대학의 역사학 교수 부부와 젊은 생물학 교수 부부가 맞닿아 있다. 역사와 과학, 늙음과 젊음의 대비는 모든 갈등의 바탕인 남성과 여성의 대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은 연극이 끝나자마자 술과 놀이로 범벅이 된 한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돌계집들의 거칠고 메마른 생활이 나타나고, 있지도 않은 아들에 대한 환상이 어둠 속의 깜박이 등불처럼 깜박거린다. 그러나 이 연극은 비관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염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썩고 무력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술과 놀이라는 모습을 빌어서 우리 앞에 보여줄 뿐이다.

 

 

 


 이 연극은 등장인물 네 사람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라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면 균형이 잡히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인물들의 복합체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 주제와 어울려 연극다운 효과를 내도록 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한 인물도 가볍게 다루어질 수가 없다. 어느 한 연기자라도 자기가 맡은 역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균형이 깨진다. 원작자의 솜씨에 의해 똑같은 무게를 가지게 된 인물들의 균형이 연기에 의해 깨진다면 그것은 연기의 능력과 이어지는 문제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연극에서 그토록 중요한 균형이 깨졌다. 사십대와 이십대와의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연기력과 관련된다. 사십대인 조지와 마서가 만든 놀이에 초대되어 온 젊은 부부인 닉크와 하니는 단순히 이끌려가는 구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생물학으로 상징되는 생리와 역사학으로 상징되는 과거는 닥쳐올 세대의 절망을 더 짙게 해줌을 깨달아야 한다. 이미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는 노교수 부부처럼 상상 임신으로 임신 중절을 했던 죄값을 받는 이들 젊은 세대도 탄생과 창조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조지가 존재하지도 않는 아들의 죽음을 선고함으로써 놀이를 끝낸 상징의 처리는 비극답기까지 한 것이다. 홍수가 휩쓸고 가 버린 땅, 여윈 가지만이 앙상하게 서 있는 현대의 풍경화를 작가 올비는 겹겹이 쌓인 술주정꾼들의 너스레를 통해 그려낸다. 네 사람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개의 경험들의 겨룸은 결국 남자와 여자, 곧 홀로 있는 사람들끼리의 겨룸이다. 그 겨룸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람 사이의 뜻을 공유하는 어려움과 피할 수 없는 절대의 고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