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회의」는 수피교의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여, 이 세상이 혼란에 빠져,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왕을 찾으러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하며 점점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그 왕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자처하고 나선 오디새를 선두로 수천수만의 새들이 길을 나서지만, 어떤 새들은 애초에 이 여행을 포기하고, 어떤 새들은 역경을 못 이겨 용기를 잃고 도중하차 하기도 하고, 기력이 다하여 떨어져 죽거나, 절망하여 죽기도 한다. 겨우 몇 마리만이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여, 신비의 새, 시모르그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그들은 시모로그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존엄의 태양은 거울이니라. 이 거울 속을 보는 자는 거기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보게 된다."
신비로우면서도 실존적인 여행의 마지막에, 영혼이 자신의 진정한 왕과의 만남을 이룬다는 파리드 우딘 아따르의 우화적 서사시에서 장-끌로드 까리에르가 극 대본을 끌어내었으며, 1979년 아비뇽에서 피터 브룩의 연출로 초연되어 극찬을 받게 된다. 새들이 자기들의 체제와 생활에 불만을 품고모여서 진정한 행복의 군주가 있는곳으로 찾아나선다는 내용. 멀리 사막을 날아 깊은계곡을 지나면서 온갖 현자와 바보들과 마주치면서 간다는 역설과 비유가 가득찬 연극이다. 특히 주목할것은 이 연극이 인간이 얼마나 신선한 공기에 굶주려왔는가를 가르치듯 새들이 훨훨나는 무대를 통해 오늘의 숨막히는 문화적 상황을 비춰준다는 점이다.
각색의 글 – 장-끌로드 까리에르
아따르와 새들
파리드 우딘 아따르(Farid Uddin Attar)의 위대한 시, <망떼끄 올-떼이르Manteq Ol-Teyr>의 번역이 처음- 게다가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863년, 제2제정 때이다. 이 번역은 동양학학자 가르생 드 따시Garcin de Tassy에 의해 이루어졌다. 요즈 음은 고본장수한테서 중고로 밖에 접할 수 없다. 이 번역은 멋지기는 하나 가끔 정확하지 않다.
파리드 우딘(혹은 알-딘Al-din)아따르는 AD 12세기, 페르시아의 네이샤부르 Neyshabour, 다른 유명 시인 오마르 까이암Omar Khayyam이 살던 마을에 서 살았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향수와 약초, 향신료 업을 물려받았으며 (아따르는 향료상을 의미함), 인생의 대부분을 이 가게에서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의 작품 속에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집필한 것 같다. 그의 인생역전을 가져온 전기에 의하면, 한 견인을 보고 영적인 삶을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걸인이 동냥을 구걸하였을 때, 거절하였는데, 갑자기 대문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아따르는 영적세계를 강건하게 하고- 당대의 가장 학식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음 글을 쓰기로 작정한다. 사람들은 그가 수많은 책의 저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의 몇몇은 분명 진위가 불분명하다. 루이 마씨뇽Louis Massignon이 전쟁 전에 출판한, 「신성한 책 Le livre divin」과 「성인 회고록Le Mémorial des saints」을 찾아볼 수 있는데, 후자는 아따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다. 거기서 그는 이슬람교 12성인의 행위와 말씀, 엄청난 고난의 결실에 대해 말한다. 그들 가운데, 바그다드의 유명 순교자 알라이Hallaj, "열 남자의 몫을 하는" 성녀 하비아 Rabiah가 있다. 「새들의 회의 La Conference des oiseaux」 속의 두 인물에게서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따르는 114년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그가 1229년에 죽었다 하고, 또 혹자는 1190년이라고 정확한 연도를 대기도 한다. 몽고 침략 당시 살육의 희생자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마을을 떠나기를 거부하여, 침략자들의 약탈 표적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슬람 세계에서의 그의 명성은 굳건히 자리매김한다. 그는 가장 위대한 수피교(페르시아 이슬람교의 신비파)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하면서, 보다나은 현실과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만남을 추구하며, 또한 이슬람교의 교리 자체 안에서 자신의 삶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 이 강력하고도 오래된 신비주의의 전통에 애착을 갖는다.
「망떼끄 올-떼이」는 「새들의 언어Le langage des oiseaux」, 「집회 L'Assemblée」, 「모임La Réunion」, 「새들의 회의La Coférence des oiseaux」 등으로 번역된다. 우리는 마지막 번역을 선택하였다. 이 시는 4647행으로 되어 있으며, 이슬람 문학에서 이미 알려진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자신의 진정한 왕에게 돌아가기 위해 세상의 짐과 계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새들의 이야기다. 특히 아비센느Avicenne 와 하마드 가잘리Ahmad Ghazali가 이미, 아따르까지 멀리 갈 필요 없이, 새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풍부한 우화적 표현으로 이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나운 짐승과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진짜 여행이다. 우화라고 해서 결코 인물과 주제 자체의 현실적 정확성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의 주안점은- 공연과 달리- 회의 자체, 새들 간의 토론, 대모험을 피하기위해 새들이 들이대는 다양한 변명과 오디새의 대답에 있다. 여행 자체는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관습대로, 아따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길이의 수많은 일화와 교차시키며- 거의 150개가 된다- 해설하고 적절히 어떤 에피소드인지를 밝힌다. 주된 이야기와는 달리, 이 일화들은 등장인물을 사람으로 내세우기도 하며, 새들 자체도 점차 날개를 가진 특성을 잃게 된다. 단지 그들이 우리의 언어를 안다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입'과 '다리'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들과 우리 사이에 교묘하면서도 장난스런 혼동이 자리 잡는다. 이 장문의 시에 연극적 형식을 부여하기 위해, 우린 우선, 행위를 번갈아 이끄는 강력한 감정들을 찾고 유기적으로 편성하면서 이야기의 방향을 강조하고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우선, 떠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나타나고 곧이어서 위험한 여행에 대한 두려움, 그것을 거부하려는 새들의 변명이 따른다. 출발 후에는- 시에서 보다 훨씬 빨리 결정된다. 길고 긴 사막의 횡단이 있게 되는데, 거기서 새들은, 같은 길을 향해 출발하였지만, 도중에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멈추게 된 새들을 만난다. 이 여정 동안 내내 그냥 거기서 멈추어 주저앉거나 되돌아가려고 까지 하는 유혹이 크게 작용한다. 거기서, 계속하려는, 즉, 앞으로 나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불가능을 이루려는 욕망과 계속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욕구는 가장 용감한 자들을, 사막을 지나 일곱 계곡을 건너도록 이끈다. 계곡을 하나씩 건널 때마다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가 하나씩 있게 되는데, 통과할 때마다 명백한 깨우침의 성격을 부여한다. 이것이 이집트나 엘레우시스에서 거행되던 "비전의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제식 집행자들이 역할을 맡아, 수수께끼를 제시하며, 환영이 떠오르도록 한다. 이것은 움직이지는 않으나 험난한 자기내면의 여행이다. 길의 현상에 더 이상 방심해서는 안 되며 감시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쌩 쟝 드 라 크루와는 말한다: "우리가 여행하는 것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지 않기 위해서다."라고.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새의 왕, 시모르그(Le Simorgh)와의 만남, 이 허울 좋은 여행- 물론 이 여행의 각 단계는 아따르에 의해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되어, 놀라운 현상이 돋보임- 의 끝을 장식하는 만남은 최후의 수수께끼를 형성한다. 해결책은, 우리가 방향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늘로부터 우리를 멀어 지게 하며, 우리를 갑자기 지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중 대한 비밀이 이곳 속세에 있다. 결국 자신과 마주하여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필연적인 고독은 시련으로 단련된 자만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수피교 안에서조차도 이 마지막 모습- 신을 멀리하는- 은 아주 독특하다. 바로 이러한 양상이 오늘날 아따르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게다가 경이, 경악의 계곡은 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하기 전에 건너야하는 마지막 계곡 중의 하나다. 여기 서는 상반된 것이 서로 친숙하게 된다. 같은 순간에 같은 강도로 느껴지게 된다.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 기도 한다. 밤인 동시에 낮이며, 밤도 낮도 아니기도 하다. 사람들은 잃어버리지 않은 걸 찾는다. 어쨌든 논리와 이성이 존재하거나, 작용하길 멈춘 이 특별한 상황은 아따르 고유의 것이다. 이런 양상은 종종,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다시 언급되는데, 그들은 두 가지 다른 양상을 대립 시킨다: 흥분을 절제에, 이글거리는 열정을 냉철한 추론과 아따르가 그리스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의 "소위 지혜"라는 것에 경악스러움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우리는 이 작품을 알고 있었다. 이 작품으로 다양한 형태의 연습을 진행하였다. 1979년 1월에, 피터 브룩(Peter Brook)이 이 작품으로, 7월 아비뇽(Avignon)에서 공연할 대본을 만들도록 요청하였다. 극작과 연출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극의 이야기를 일직선으로 구성한 다음 (시는 나선형으로 더 많이 발전한다), 가능한 한 빨리 배우들에게 대사를 만들어 가도록 맡기며, 장면을 하나씩 만들어가야했다. 또한 극 흐름의 명확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원하는 순간에 생각해둔 일화들을 삽입하여야 했다. 그것은 주된 이야기 줄거리 안에 그 못지않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끝으로 이 이야기를 무대화 할 시청각적 방법들을 찾아야 했다.
그의 작품 마지막에, 자신의 재능을 상당히 의식한 아따르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이야기에서 풍기는 향을 맡아 보지 못한 자는 조금도 연인들의 길에 접근할 수 없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 하나의 기억을 남겼다. 최후의 날까지 내 책이 그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집필이, 진정한 영적 삶의 길에서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다: "시를 짓는 일이 단호하게 그 길로 접어들지 않은데 대한 헛된 핑계가 되었다. 마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미친 짓인 것처럼... 모래 위에다 기름을 부을 만큼 부었다: 돼지 목에 많은 진주를 매달았다... 내게 주어진 이 생을 누리지 못하였다... 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망연자실한 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침묵할 수 있을까? “내 가슴이 말한 다: 나는 불구덩이 속에 있다. 나를 비난하지 말라; 난 말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내 영혼의 대 해가 수천의 방법으로 파도를 일으켜댄다;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침묵하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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