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의 글
성경의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두 권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사무엘 타입의 예언가/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 특히 왕조로 전환하는 내용이 그 주제이다. 기원전 1300년에 시작한 사사 시대는 기원전 1050년 왕정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끝난다. 이스라엘이 종교 지도자들의 신정 정치를 벗어나서 왕이 이끄는 왕정 정치로 변화하는 단계를 사무엘상은 사무엘, 사울, 다윗, 이 세 명의 서술자로 보여준다. 각 세 사람이 상징하는 바는 사무엘은 사사들의 옛 통치를, 사울은 이스라엘 왕권 시도의 실패를, 다윗은 하나님의 이상적인 왕을 상징한다. 이 세 사람은 세 개의 중요한 갈등, 사무엘과 사울 사이의 갈등,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 사무엘과 사울을 합한 두 사람과 다윗 사이의 갈등 관계로서 전통 유산의 투쟁을 보게 된다. 후에 다윗이 마주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 가문 비극의 핵심이다. (20세기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남부 서트펜 일가의 분열된 집안의 몰락과 좌절을 그린 그의 비극적인 소설 제목을 「압살롬! 압살롬!」이라고 지었다. 이는 사무엘하 18장 33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하나님이 촛대를 엘리 제사장에서 사무엘로, 왕권을 사울 왕에서 다윗으로 옮기는 과정을 다룬 사무엘서는 개인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지도자의 운명을 통해 시사한다. 이는 예컨대, 그리스신화에서 보는 비극적인 왕조의 전설이 영웅 개인의 흥망성쇠의 굴곡으로 그려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비극은 주로 신화를 근거로 하지만, 성경은 엄연한 사실적 역사 기록물이라는 점이 신화와 성경의 중요한 차이이다. 하나님과 사무엘 선지는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교법을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백성의 왕으로 세워주고, 이 모순을 이스라엘의 위치를 신정 제도에서 인간 제도로 구분함으로 조정한다. 왕의 지배 체제가 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무엘의 경고는 인간이 범하기 쉬운 실수 때문이다. 사울 왕의 비극적 결함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적인 실수에 기인한다. 사울은 곧 돌아올 사무엘의 부재중, 백성이 적들 앞에서 흩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될 것을 이를 못 참고, 스스로 직접 제사를 올린다. 이는 오직 제사장에게만 속한 제의 기능을 찬탈한 행위로, 사울은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다. 모든 비극의 영웅들처럼 사울도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영적인 또는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이 땅의 사물과 인간적인 관습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사울은 용서받지 못할 또 다른 큰 죄를 범한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라는 구실로 아말렉의 가장 좋은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끌고 왔을 때, 그는 사무엘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아말렉의 아각 왕을 살려주고 가장 좋은 양 떼를 끌고 오면서 선지자의 금지 명령과 성전(聖戰)의 규범을 위반한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부르는 전쟁 노래는 사울에게 질투심과 분노를 자극하여 그의 약점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스라엘 사제들과 블레셋 사람들 양쪽에 의해 사무엘서에서 반복되는 이 노래의 후렴은 사울의 지도력이 종교 적 기준보다는 인간적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따라서 불순종하는 사울을 내치신 하나님은 물질적 세상보다는 정신적인 영적 헌신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다윗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선택하는 판단 기준으로 외모를 보지 말고 내면의 중심을 보라고 하셨다. 야만적 인간의 상징인 거인 골리앗이 몸집이 작은 어린 다윗에게 패하는 장면은 신체적 승리 우위에서는 영적 승리를 비유한다. 다윗은 왕이 제공하는 갑옷, 무기 등의 물질적 보호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욕보이는 불경스러운 골리앗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붓는 기도를 택한다. 다윗은 그의 선조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보이는 것 위의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크게 보이는 것보다 작은 것을, 외부 환경보다 내면의 믿음을 택함으로써 지속적인 하나님의 신뢰를 얻는다. 이런 태도는 이상적인 군주가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종교적 필요 요건이다.
사울은 그의 초기의 전쟁 승리를 재현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쇠약해진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계속해서 전쟁을 치른다. 실패를 거듭하자 사울은 마술에 끌리어 점술가를 찾는 행태를 보이며 최후의 절망에 빠진다. 사울은 사무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난 것은 그의 다가오는 파멸의 징조임을 깨닫는다.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통치자로 삼으셨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삼상15:23)라는 사무엘의 선언은 사울의 왕권이 계승되지 못함과 얼마 안 가서 폐위된 것에 대한 예언이다. 사울의 후원자인 사무엘이 그에게서 벗어나자 그의 찢어지는 심정은 실제로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는 것으로 표출된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울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 너무 슬퍼했기 때문이다.
사울 시대가 끝나는 배경에서 다윗이 출현한다. 다윗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알만큼은 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어린 다윗을 무심히 여기든지 과보호를 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외모가 훤칠한 이새의 장자 엘리압은 사무엘의 눈에 들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부족한 신심은 왕이 되기에는 자격 미달이다. 아버지 이새는 눈치 채지 못했으나 사무엘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인 다윗을 사울 대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한다. 다윗은 일찍이 비밀리에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의 정통성을 왕이 죽을 때까지 존중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울은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착란증에 빠진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잃고 기분이 들떠 있다가도 마음이 가라앉는 심한 우울증 상태가 그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음악가로 명성을 날린 다윗은 한동안 사울을 위한 심리 치료사로 봉사하였으나 이런 일시적 방법은 사울의 영적 번뇌의 치유에는 역부족이다.
다윗은 그의 첫 일성(삼상 17:26)부터 그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예사롭지 않은 포부를 드러낸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맞서기 전에 그가 전투장에서 하는 말은 혈기 왕성한 청년의 종교적 열정을 넘어서 훨씬 더 크게 울린다. 여기서 그는 확고한 정치적 신조를 드러낸다. 그가 골리앗을 향해 날리는 발언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식을 상기시키어 자신감을 높이는 발언이다.
다윗은 예언적 황홀경에 빠지지 않는다. 실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는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이성적인 지도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진기하게도 그를 괴롭히는 사울에 대한 다윗의 인내와 자제력에는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강원도 지역만 한 땅에서 3천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끈질기게 그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을 다윗이 죽일 수 있었던 결정적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그는 손을 뻗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힌 자를 쉽사리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다윗이 땅에 엎드려 왕에게 절하는 것은 사울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충성과 존경과 사랑을 나타낸다. 또 한번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던 중 깊이 잠이 들었다. 그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다만 그의 머리맡에 놓인 창과 물병만을 취한다. 그리고 사울을 곁에서 지켜주어야 할 장수 아브넬이 잠든 것을 책망함으로 다윗은 자기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다윗이 왕권에 대한 욕망과 설계를 품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사울이 살아있는 동안 다윗도 그리고 사무엘서의 서술자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다윗이 사울을 해치기를 거부한 것은 그의 앞날을 위한 정치공학 안전한 투자로 볼 수 있다. 다윗의 야심찬 첫 무대를 고려할 때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포상인, 사울의 딸을 주겠다는 제안은 다윗에게 왕의 사위가 되어 왕의 보호자 또는 왕의 논리적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 왕권이 그에게로 넘어오는 것을 예견한다면, 다윗은 평화롭고 질서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왕권의 정통 가치는 없다. 다윗의 망명 생활 중 사울은 미갈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평화 협상 타결을 원할 때 다윗이 무엇보다 먼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끝내 그녀를 다시 찾아온다. 이는 사울의 사위로서 그가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미이다. 사무엘상 14장과 31장에서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살아서 헤어졌고, 요나단의 죽음으로 사별한 것을 안다. 다윗은 그의 후원자인 사울 파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상실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윗의 시적 비가는 최고조에 달한다.
현실적 환경을 보면, 늘 쫓겨 다니는 쪽은 다윗이고 그를 죽이겠다고 수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하는 쪽은 사울이다. 그러나 심리적 피해자인 사울은 마음도 편협해지고 점점 더 조급해지고 광폭해지는 반면에, 다윗은 노심초사 피해자 처지의 어려운 가운데 있음에도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환난 받고 억울한 사람들을 챙기고 아량을 베푼다. 그리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수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외연 확장으로 이어진다. 다윗의 통치 기간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또한 개인적이다. 이스라엘의 성숙과 다윗의 성숙은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사울의 궁정에서 도피하여 망명 생활을 하는 다윗의 정치적 상황은 절망적이다. 이를 읽는 독자는 고비마다 서스펜스를 느끼고 스릴을 체험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윗의 확고한 자세를 보게 된다. 정치적 액션에서 극적 관심은 다윗이 역경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비범한 재능이다. 망명 기간의 이야기 중 가장 큰 모순은 다윗이 그의 운명을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적지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맡기고 처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는 태도이다. 블레셋 지역으로 도피하여 숨어 있는 동안,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이때 사울의 통치는 점점 약해지고 약화되는 반면, 다윗은 이스라엘 정치의 심장부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정치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이다. 그는 블레셋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한편 그의 민족이 블레셋과 싸우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 사무엘서에는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람을 들어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다. 이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권을 다윗에게 옮기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지한 사울은 그의 인간적 욕심으로 추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현재 붙들고 있는 왕관 왕위, 부와 명성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지위의 모든 소유물을 그는 아들 요나단에게, 그리고 자자손손 대대로 물려주기를 원한다. 보통 사람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그가 지닌 것을 빼앗기지 않고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의 정적 다윗을 제거하는 일이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고 이른다.
사울은 하나님에 앞서 자신의 욕망을 우선하는 인물이다. 그는 왕이 되기 이전에는 겸손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할 때 겁이 나서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버린 겸손하고 수줍은 청년이었다. 반면, 사울의 주적 다윗은 매사를 "여호와께 물어가로되" 로 시작하는 철저히 하나님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를 지키며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힘쓰는 왕이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사람과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는 사람과의 싸움의 결과는 명백하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영국 왕 리처드 2세(1377-1399) 의 경우와 비교해본다. 리처드 2세는 그의 정적인 사촌 볼링브로크에 의해 폐위된다. 관객의 동정심은 처음에는 볼링브로크 편에 기울지만, 후에는 약점이 많은 리처드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좌를 잃고 몰락을 받아들일 때, 그에게 마음이 쏠리고 관객은 그와 정체성을 공유한다. 볼링브로크와 리처드, 이 두 사람은 인간의 굴레에서 오르고 내리는 우물 속 두레박과 같은 시소게임을 한다.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경우는 같은 지렛대 위에서 벌이는 게임이 아니다. 이 둘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과 하나님이 버린 사람 사이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작가 로렌스는 어떻게 해석하고 극을 쓴 것일까? 로렌스는 비교적 성경 본문의 내용을 충실히 극화하고 있다. 로렌스의 인물 중에서 특히 미갈의 개성 있는 성격 창조는 돋보인다. 미갈이 성경에서 언급된 경우는 극히 소수이고 짧다.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에 옮겨오고 그 기쁨을 못 이긴 왕은 힘을 다하여 백성이 보는 앞에서 허리춤을 다 드러내고 춤추었다. 이를 본 미갈이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고 그를 업신여기었다(삼하 6:16).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남자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미갈의 독설은 미갈과 다윗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왔으니, 다윗은 그로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미갈과 다윗의 모습이다. 그러나 로렌스는 이 극에서 미갈과 다윗의 결혼 전 연애장면과 신혼 분위기를 윤색하여 보여준다. 물론 성경에는 미갈이 다윗을 사모한 소문이 나돌았고 다윗도 미갈을 좋게 여겼다. 로렌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특별히 역자의 관심을 끈 인물은 요나단이다. 요나단의 대사량은 다른 주요 인물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다윗의 대사보다 세 배 적고 사울의 대사보다, 마찬가지로 세 배 적다. 미갈의 대사량도 요나단의 분량보다 두 배나 더 많고, 사무엘의 분량도 요나단보다 많다. 그런데 극의 마지막 장면은 요나단의 의미심장한 독백으로 끝맺음한다. 요나단은 그도 언젠가 아버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며 성장한 왕세자이다. 그러나 다윗과 절친이 된 그는 다윗에게 이르기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이 꿈꾸는 앞날은 다윗이 왕이 되고 자신은 권력의 2인자로 다윗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현실 정치이다. 요나단과 다윗은 어떻게 그런 절친이 될 수 있었는가? 둘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도 아니고, 아버지들끼리 서로 유대감이 있는 비슷한 가문도 아니다. 요나단은 유력한 가문, 그것도 왕가의 자손이다. 반면, 다윗은 '떡집'이라는 별명의 작은 성읍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하찮은 양치기 출신이다. (참고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혈통인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다.) 역자의 눈에는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한 것보다는 요나단이 다윗을 더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절친이 된 근거는 무엇인가? 이 둘을 서로 끌리게 한 답이 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의 이 말은 이후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호통치는 발언을 연상시킨다. 블레셋을 향한 다윗의 호령과 요나단의 언급은 같은 문맥이다. 따라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공감한 점은 하나님 안에서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화끈한 공통분모를 확인한 것이다. 다윗과 절친이 된 요나단은 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자 신의 무기를 건네주며, 다윗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도움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라는 말이 사무엘상 18장에 여러 차례 기록될 만큼 두 사람의 우정은 매우 돈독하고 단단하다. 무엇보다도 이 두 친구의 우정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 관계의 맹세를 한다. 이 맹세에서 요나단은 미래에 다윗이 통치자가 될 것을 예측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가족을 보호해 줄 약속을 한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그의 옷과 전투 장비를 주는 의미는 그가 언젠가 왕이 될 것을 알아본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희생적이고 충성스러운 진정한 우정의 자질을 보여준다. 그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대신,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희생한다. 다윗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그를 죽이려는 아버지를 비난하고 다윗이 아버지의 손길을 피하도록 돕는다. 성경에 따르면 진정한 우정의 요소들은 감정적 애착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같은 비중으로 서로 간의 충성, 희생, 타협 정신을 포함한다.
요나단은 차분하고 말수 적은, 너그럽고 용맹스러운 젊은이다. 부하들과 동료들의 존경심을 한몸에 받는 그의 모습은 인간미 넘치는 매력적인 청년으로 비친다.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던 때에 왕은 군사들에게 하루 동안 금식 명령을 내린 적이 있는데, 요나단은 그날 다른 지역에 떨어져 있던 관계로 왕의 명령을 알지 못했다. 적군을 피해 그가 수풀 속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떼어먹은 사건으로 인해 왕은 그를 죽이려 한다. 그러자 백성이 나서서 왕에게 호소하기를,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백성이 요나단을 구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백성이 음소해서 요나단은 죽음을 면한다. 그만큼 그는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존재이다.
요나단의 그러한 품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대사/독백을 읽는 역자는 곤혹감을 떨칠 수 없다. 성경 이야기의 마지막 코너에서 역자는 복병을 만난 기분이다. 물론 작가 로렌스의 생각이 투영된 요나단이다. 덕스럽고 사랑스럽고 친근한 요나단이 로렌스의 극에서 다윗을 떠나보낸 후, 홀로 앉아서 그의 등에 대고 "죽음의 화염 속에서 난 다윗의 시대가 끝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지켜보겠다. 지혜 넘치는 여우 얼굴도 언젠가 그 힘을 잃고 그의 흘린 피가 화염 속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겠지. 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지켜보리라.” 그의 이런 읊조림은 매우 냉소적으로 들린다. 『다윗』 8장 끝에 요나단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여호와께서 왕위를 다윗에게 넘기시려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면, 요나단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으련다. 이 사실을 나의 아버지도 알고 계시리라. 그러함에도 아버지는 하나님을 강한 압력으로 밀어붙이시는구나.” 여기서 무서운 권력의 속성을 읽게 된다. 사울을 피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간 다윗이 사울과 평화를 맺고 싶다고 말할 때, 사무엘은 다윗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자네는 사울을 아무 사심 없이 볼 수 있겠는가? 사울 또한 자네 얼굴을 죄의식 없이 볼 수 있을까?... 사울 머리에 얹어있는 왕관을 눈으로 보면서 나도 왕인데 하며, 심중에 그 왕관을 거머쥐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난 그걸 자네에게 묻고 있네... 사울이 살아있는 한 난 왕이 될 수 없다. 사울과 그의 가문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고, 나의 친구 요나단이 나를 젖히고 왕이 된다. 그래도 자네는 아니라고 내게 말하겠는가?" 예기치 않은 사무엘의 질문에 다윗은 순간 뜨끔했으리라. 사무엘은 바로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속성을 요나단도 체득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장기판의 막판 뒤집기 게임이다. 왕위를 놓고 벌이는 번뇌 덩어리 사울의 공격성이 요나단의 뇌리에도 어쩌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요나단의 마음 한구석에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와 적개심이 있었다면, 이는 족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라". 자신과 모친에 대한 이런 모욕적인 비방을 듣고도 상처받지 않을 아들이 있을까? 그러면 로렌스가 극화한 요나단의 독백은 내면에 감춰진 자괴감의 분출일까? 아니면 권력은 명예롭지만, 그의 아버지 사울 왕의 머리를 빠개 놓는 무겁고 무서운 짐을 지켜본 그가 권력에 대한 회의감과 무상함을 느끼고, "가여운 다윗, 너도 그 길을 가는구나" 하며 그가 사랑하는 친구 다윗에게 보내는 측은지심의 고별사인가?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펜을 휘둘러 요나단의 가려진 속마음을 단칼에 뒤집어 보여주려고 시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역자의 머리를 스친다.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 안에 살인을 낳는 자이러니"라는 로렌스의 2행시가 떠오른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에도 애증의 편파성이 작용했을 수 있음을 로렌스는 피력하고 있는가? 작가이면서 화가이기도 한 로렌스는 요나단의 초상화를 모호성과 양면성을 갖춘 문학적 표현으로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유기적인 화합을 넘나들며 영감에 의지하여 글쓰기를 좋아하는 작가 로렌스의 산물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역자에게 도전적으로 들리는 이 독백은 다윗 독자들에게 인간 심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해주는 열려있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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