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가 1797년 출간한 <장화신은 고양이>를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먼저 <장화신은 고양이/ 막간극, 프롤로그, 에필로그 및 전체 3막으로 이루어진 아동 우화 Der gestiefelte Kater. / Kindermährchen in drei Akten, mit Zwischenspielen, einem Prologe und Epiloge>라는 제목하에,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전래우화』중 2권의 첫 작품으로 수록되어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 드라마는 이후 1812-16년 플롯의 얼개는 그대로이지만 여타 세목들이 대폭 수정된 형태로 전 3권으로 이루어진 『판타스 Phantasus』의 2권에 포함되어 재출간된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사이에 위치한 전체 3막을 이루는 중심 소재는 티크의 희극이 씌어진지 정확히 1세기 전인 1697년에 출간된 사를페로 (Charles Perrault, 1628-1703)의 이야기집 『도덕성이 곁들어진 옛 시절의 이야기들』에 수록되어 있는 아동우화 <고양이 선생, 혹은 장화신은 고양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 점에서 티크의 드라마 <장화신은 고양이> 전체는 그 부제가 지시하듯, 페로의 아동 우화를 소재로 삼아 각색된 동화극을 중심으로 삼고, 동시에 관객, 기술감독, 작가 등이 극 자체를 성립 가능케 하는 여타 제반 요소와 조건을 전체 동화극 안에 다시 포괄한다. 이는 극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자기반성을 행하는 '극중극'의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형식 층위에서 이러한 고유한 특성은 연구사에서 누차 지적되어 왔듯, 당대 및 고전 유럽 문학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드라마 작품의 자기반성 적 구도는 멀리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특징적인 파렉바제Parekbase 형태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또한 티크 자신이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15)와 더불어 그가 청년기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작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1595-96) 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이기도 하다. (외부 개입을 통해 연극의 가상의 틀을 침해하는 이러한 고유한 구조는 20세기에 들어서 이탈리아 피란델로의 드라마나 브레히트의 서사극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극중극 형태야말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박사 논문 『독일 낭만주의에서 예술비평의 개념』 (1920)에서 지적했듯, "형식의 자발적인 파괴"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특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제시한 근거가 된다. 이제까지 연구사에서 <장화신은 고양이>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에 대한 "하나의 특징적인 사례", "모델구조", "전형적 예시" 제일의 사례" 등으로 지칭되면서, 이 개념을 예술적인 차원에서 실현한 대표적인 범례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 드라마는 형식의 층위에서 아이러니를 구현하면서 동시에 이 형식을 '파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먼저 티크의 드라마가 산출될 시기와 거의 동시적으로 발견된 낭만적 아이러니 개념에 대한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티크가 <장화신은 고양이>를 집필한 동일한 시기에 그가 "아이러니의 아버지"이자 "가장 탁월한 아이러니적 인물"로 지칭한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주자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 또한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 아이러니 개념을 독자적으로 정립해 나갔다. 전통 수사학에서 말과 의미 간의 전도 혹은 왜곡 관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 개념이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이름으로 지성사에 등재되면서 철학적 및 시문학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슐레겔의 결정적인 공헌이다.
1797년 『리체움Lyceum』지에 실린 127개의 단상과 이듬해 초기 낭만주의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아테네움 Athenăum』에 수록된 500여 개의 단상들은 청년 슐레겔이 발전시킨 아이러니 개념과 더불어 이를 포괄하는 낭만적 시문학의 기본 원리들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업에 속한다.
통상적으로 낭만적 아이러니란 예술작품의 생산자로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취하는 자유로운 자의식적인 태도, 즉 예술작품과 더불어 동시에 이를 가능케하는 조건에 대해서도 반성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행위와 태도를 지칭해 왔다. 그렇다면 예술가란 해당 예술작품이지 나는 가상과 더불어 그 가상의 피안에 놓인 작품의 산출 근거에 대해서도 냉정히 성찰하는, 혹은 "생산을 가능케 하는 바를 생산 물과 함께" 서술할 줄 아는 양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렇다면 「리체움」 108번 단상에서 슐레겔이 소크라테스 아이러니를 두고 언급했던 "모든 자유로움들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인 작가의 자유로움이란 작품의 가상에 매몰되지 않은 채 이 가상을 "무조건적 자의에 의거해 매순간 자유롭게 중단 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의 자유로움과 "무조건적 자의"를 언급했다 해서, 이를 곧바로 고삐 풀린 주관주의적 편향과 연결시켜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이러니의 자유로움을 두고 슐레겔은 곧바로 같은 단상에서 이는 "또한 가장 법칙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라고 덧붙이고 있으며, 일견 "무조건적인 자의"로 보이는 것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된 '자의성'이란 자유와 필연성 간의 통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바로 규율과 법칙을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근거에 의거하여 부과할 줄 아는 주체의 자율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37번 단상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점하는 "자기재한"의 개념 아래 집약되어 표현된다.
앞서 주체의 자유라는 말이 야기하는 인상이 그러했듯, 낭만주의 일반에 대해서도 또한 시적 감수성의 무제한적 발산이나 공허하고 과장된 예술적 재현 등과 같은 이미지로 덧씌워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자기 제한의 개념하에서 주체적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한 통념과는 정반대라는 근거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예술가가 무언가를 고안해 내고 그에 대해 열광의 상태에 처해 있는 한, 그는 소통의 측면과 관련하여 적어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기 제한이란 바로 스스로를 "매순간 자유롭게" 제약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럼으로써 이 제한이란 동시에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차원과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계기이자 조건이 된다. 이렇게 슐레겔이 자기제한을 "예술가와 인간에게서 시작이자 끝이며, 가장 필수적이면서 최고의 것" 이라 지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제약과 자기 확장 간의 변증법적 운동을 가능케 하는 필연적인 계기를 서술한 데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자기 확장은 자기 제약을 조건 삼아 이루어지고 또한 동시에 자기 제한은 “모든 것을 조망하고 모든 제약된 것 위로 스스로를 무한히 고양시키는" 초월성 정조 하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자기발전의 방향을 인도받게 될 때, 양 측면 간에는 서로를 조건 지으며 발전시켜나가는 상호침투의 맥락이 형성된다. 즉, 아이러니 하에서 양자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 완전한 전달의 불가능성과 그 필연성 간의 해소 불가능한 쟁투”로 특징지어지게 되고 “자기창조와 자기부정"이 공존하게 되면서 그 안에선 "모든 것이 농담이자 동시에 진지함이며, 모든 것이 충심으로 개방되어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이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심히 뒤틀려 있는" 양가적인 상호 관계의 맥락이 형성되 그런데 이러한 상호침투의 구도를 극단까지 밀고 나아가게 된다면, 양 대립극 간의 통일이란 하나의 확정된 형상이나 실체로서 도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유예되는 성질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저 유명한 <아테네움> 116번째 단상에서 "진전적 보편시문학"의 개념하에 슐레겔이 서술하고 있듯 예술가와 예술작품, 주체와 객체의 양 대립극 간에 이루어지는 시 문학적 반성의 행위로부터 산출되는 낭만적 시 문학이란"서술된 것과 서술하는 것 사이에서, 모든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채 시적 반성의 날개들 사이의 한가운데에서 부유하는 것이며, 이 반성을 항시 재차 잠재적으로 증대시 키면서 마치 일련의 거울상들처럼 그 수를 무한히 늘려나가는” 것이다. 즉, 아이러니에 근거하여 정초된 낭만적 시문학이란 바로 예술의 가상과 그 파괴, 기표와 기의, 제약과 무한, 개별성과 보편성 간의 무한한 상호침투, 혹은 “자기 창조와 자기부정 간의 부단한 교호" 그 자체이기에, 완결이 아니라 생성, 목표가 아니라 과정, 고정된 실체가 아닌 역동적 관계 형성 그 자체에 자신의 본령을 두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야말로 낭만적 시문학이 단지 영원히 생성될 뿐이며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근원적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바에 다름아니다.
벤야민이 자신의 낭만주의 박사논문에서 형식의 아이러니라는 표제하에 이를 논하면서 바로 티크의 희곡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 하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겔의 슐레겔 비판에 대해서도 익히 인지하고 있었을 벤야민이 헤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슐레겔을 비판적으로 구제하고자 한 의도는 슐레겔의 주관주의적 측면이 지니는 문제보다는 헤겔의 고착화된 객관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위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더 우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러니란 작가의 주관이 아닌 작품 형식에 내재하는 객관적 차원에서 파괴와 부정을 매개로 하여 작동하는 원리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계기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헤겔적인 보편성의 요청을 동시에 헤겔적인 고착화 없이 충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레겔의 낭만적 아이러니를 두고 벤야민이 헤겔과 갈라지는 결정적 지점은 그가 바로 헤겔이 문제시했던 그 부정과 파괴의 계기를 객관적 차원으로 이전시켜 계속 고수함으로써, 이를 형이상학적 절대성의 성립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즉, 헤겔과 벤야민 양자 모두 예술에서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예술이 도달할 최종 목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벤야민의 경우 예술의 이념이라는 보편적인 차원이 계속해서 생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바로 객관적인 차원에서 확보된 부정성이 항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바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헤겔과 갈라서게 된다. 헤겔이 요청한 '진리', '인륜성', '실체적인 것' 등의 제반 목적은 바로 비헤겔적, 아니 반헤겔적 방식으로서만이 비로소 성립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벤야민이 "예술의 이념"이라는 표제 하에 설정한 개별 작품과 최고도의 절대적인 차원 간의 관계 또한 아이러니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형식의 아이러니란 작품의 "형식을 진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해소시키는" 것이자 동시에 이를 계기로 “개별 작품을 절대적인 예술작품으로 전환, 즉 낭만화하기 위한" 이중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초기 낭만주의가 지닌 신비주의적인 근본확신"으로서 "작품의 파괴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 이란 바로 이러한 작품의 형식 자체에 내재한 객관적인 자기부정과 파괴를 매개로 해서만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의 아이러니라는 표지하에 “티크의 아이러니적 드라마나 장 파울의 해체된 소설들"을 범례로 삼아 벤야민이 주장하고자 한 핵심은 다음과 같이 양가적인 속성을 지닌다: “형식의 아이러니는 근면이나 성실함과 같은 작가의 의도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는 흔히 그러하듯 주관적인 무제한성의 표지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객관적인 계기로 추앙되어야 한다.
슐로서, 로이트너 등의 관객들, 작가와 어릿광대 등 무대와 객석 간의 경계를 넘나들던 인물들, 그리고 대사 불러주는 사람과 같이 상연을 지원하는 극 '외부'의 인물 등 <장화신은 고양이>를 구성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출연하여 마무리 대화를 나눈다. 이는 관객만 출연했던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하여, 막이 진행되어 오면서 점점 활발히 이루어지는 무대와 객석 간의 상호침투 과정이 카오스적인 절정에 오르게 되는 3막의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 던 "자기창조와 자기부정 간의 부단한 교호" 과정을 총괄 적으로 반성하며 결산하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처음 아동극만을 지칭했던 <장화신은 고양이>는 이제 자신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가능케 했던 제반 조건 및 전제들과 적극적인 상호침투 및 반성의 맥락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극의 확장 및 '자기성장' 의 도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앞서 연극적 가상을 교란하고 파괴 함을 계기로 극적 가상을 더욱 확장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지니게 될 자의성의 위험에 대해서는 “이 연극이 수천 조각들"로 쪼개질 수 있다는 고양이 힌체의 경고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한 극의 분화와 확장이 무한정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제 이에 대한 종결 또한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앞선 과정들을 포괄적으로 성찰하는 이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끝으로 극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작가 : 오, 너 배은망덕한 시대여!
퇴장한다. 아직 극장에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도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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