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뿔>은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사슴농장에서 일어나는 일그러진 판타지를 통해 세심하게 그려내 ‘2012 봄 작가, 겨울무대’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현대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게 조명한 작품이다.
직장인의 모습을 사슴에 빗댔다. 뿔이 잘려나가는 사슴의 마음은 직장인이 겪는 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대변한다. 농장주인 대현의 눈에 비친 세 사람 역시 한 마리 새끼사슴과 같다.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게 태어나 다치기 쉬운 무기력한 존재, 그들은 이미 세상의 때가 많이 묻은 새끼 사슴이었다. 이 부장과 안 대리, 김 과장 모두 자신을 사슴에 대입했다. 김 과장은 고통스럽게 뿔을 잘리는 사슴에 자신의 마음을 이입했다. 안 대리 역시 갇힌 사슴의 눈동자에서 매일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눈을 봤다. 뿔을 자르는 악역 같던 이 부장도 고기를 씹어 먹는 사슴의 끔찍한 모습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극은 꿈과 현실을 오간다. 김 과장의 악몽을 실감나게 그렸다. 그가 꾼 꿈속에 냉혹한 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의 애환과 고충이 그대로 담는다. 김 과장으로 하여금 박 차장에게 주먹을 휘두르게 하고 즐겁게 구경하는 직장 동료들의 모습이 잔혹하다. 개인에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을 종용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웃기다가 슬픈 직장 생활의 단면이었다. 안대리가 "엔조이(Enjoy)! 투게더(Together)!"를 외치는 이 부장에게 능청스럽게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웃음을 전하고, 안 대리의 아부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김 과장은 술에 취해 이 부장에게 대들며 난동을 부리지만, 술이 깬 뒤 이 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잘 모르는 최신 가요를 틀어놓고 열심히 춤을 춘다. 그의 우스운 몸짓은 이내 처절함으로 변해 안쓰럽게 전해진다. 사슴뿔을 자르는 부장의 모습은 부하 직원들의 성과등급을 매기는 부장의 모습과 매치된다. 매정해 보이는 이 부장에게도 고충은 있다. "나라고 좋아서 등급 매겨?" 되받는 이부장의 말에 냉혹한 직장 사회의 단면이 묻어난다.
직장에서 야유회를 가게 된 김 과장, 장소는 퇴직한 대현이 운영하는 사슴농장이다. 오늘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고 말하는 부장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구경이 아니라며 벼르고 있다. 오늘이 일 년 동안 자란 수사슴의 뿔을 자르는 날이라는 것이다. 멋진 뿔을 달고 있는 사슴들은 오늘 자신들에게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한 채 우리 안에서 김 과장 일행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야유회가 무르익을수록 김 과장은 성과평과 결과에 지치고, 치고 올라오는 안대리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얼마 전 자살한 박차장이 맘에 남아있어 전전긍긍한다. ‘오늘 이 부장 이 자식, 가만 안둘 테다’라고 생각하며 마취 총을 집어 드는 찰나! 사슴의 눈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과연 그의 뿔은 사라질 것인가, 남을 것인가.
경쟁사회에 내몰린 것이 이제는 비단 어떤 특정 계층에 머물러 있지 않은 현대사회의 일면을 씁쓸하고 애잔하게 그려낸 연극은 그것이 허구적인 판타지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한다. 그것은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뒤쳐지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현존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더욱 그렇다. 뿔이 자랄 때마다 잘리는 사슴의 비애처럼, 그렇게 개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그린 연극 <뿔>이 보여주는 인생은 일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꿈틀대다 다시 현실 속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핍진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실직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상으로 하루를 견디는 이 시대 현대인들의 삶을 통해 연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기괴스럽고 불편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하면서 연극은 다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정소정
1982년 부산 출생.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졸업.
한국예술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과정 재학.
<모래섬>으로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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