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신문사의 연재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가 주진묵은, 왕자의 난을 통해 보위에 오른 후 실록을 고치려는 태종 이방원의 탐욕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그에겐 생활설계사로 남편의 부족한 원고수입을 메워주는 성실한 아내가 있다. 한편 같은 신문사 정치부에서 뜻밖에도 현대사인 12.12사태에 관한 기고를 부탁해오는데.... 하지만 그 기고가 관계자들에 의해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사과문을 게재해 달라는 신문사 측의 회유와, 태종 이방원이 살육에 관한 자기의 기록을 고치기 위해 실록을 쓴 사관을 협박하는 과정이 한 치 안 틀리게 정확하게 맞물린다. 하지만 병든 아내를 보며 결국 생존이라는 현실을 위해 사과문을 게재하는 진묵과, 자식들을 위해 실록을 수정하는 사관의 모습이 겹쳐지며 권력에 무너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1억 년 전 공룡시대를 거쳐 주먹만하게 왜소해져 버린 이구아나를 상징적으로 빗댄 수작이다.
이조 3대 왕이된 태종 이방원과 현대 신군부 정권을 병치시켜 권력을 비판한 작품이다. 사실과 진실, 권력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고든 연극이다.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이방원이 역사를 왜곡했던 실증적 사실을 씨줄로 하고, 연재소설을 쓰며 신문사의 강압에 양심을 팔아야 하는 한 작가의 고뇌를 날줄로 하여, 500년의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시종일관 긴장을 주었던 고급 취향의 작품이다. 태종 이방원의 역사적 과거를 소설로 쓰고 있는 주진묵은 어느날 신문사로 부터 과거 정치사에 대한 청탁을 받아 원고를 넘기는데..... 한 치의 흐트러진 말이 허용 안될 만큼 꽉 짜여진 대사와 우리말이 갖는 현란함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평과 함께 작품성에서 현격한 우위를 점했던 연극이다.
이 작품에서 중심사건은 작가 주진묵의 현실 공간과 태종 초기 실록편찬이 이루어지는 소설 속의 공간이 밀접하게 연결되며 전개된다. 작가 주진묵은 태조실록 편찬과정을 소재로 단편 소설을 쓰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그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창작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대학시절 만나 문학적 열정을 나누며 결혼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문학적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생활인으로 변해버린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 사실 뒤에 숨어있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글들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그에게 12·12사태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해달라는 신문사의 청탁이 들어온다. 12·12사태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자 이 글에 불만을 느낀 12·12사태 관련 인사들이 신문사에 광고 중단이라는 압력을 넣는다. 이에 굴복한 신문사는 주진묵에게 사과문 게재를 요구하고 언론의 비굴성에 분노한 주진묵은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담은 글이므로 사과문을 게재할 수 없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연재를 끊어버리겠다는 신문사의 협박과 고단하게 살아온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어 갈등한다. 결국 그는 개인이 현실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도, 역사를 바로잡을 수도 없다는 자기 합리적인 인식을 받아들이며 현실에 굴복한다. 이렇게 현실공간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주진묵이 쓰고 있는 단편소설 속의 공간에서는 태조실록의 편찬과정이 그려진다. 승리를 쟁취한 권력층의 관점에서 역사가 각색되고 윤색되어지는 과정이 전개되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는 현실의 압력에 무기력하고, 역사가 권력에 의해 능욕되는데 이 과정이 세조와 하륜, 사관인 이한응의 대립·갈등을 통해 치열하게 묘사되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 밝히기와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주진묵이 현실과 타협해가는 과정과 사관 이한응이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하고 사초를 수정해가는 과정을 대비함으로써 왜곡된 역사의 악순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은 역사의 기록이 승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가리어진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개인의 의지가 얼마나중요한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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