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F. 뒤렌마트 '로물루스대제'

clint 2016. 1. 14. 21:13

 

 

 

 

 

 

1949년 초연된 로물루스 대제는 뒤렌마트를 극작가로서의 완전한 명성을 얻게한 유명한 작품이며, 기정사실이자 분명한 비극적 소재인 로마제국의 멸망과 그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를 희극의 소재로 삼아 패러디하는 등 반전의 묘미가 압권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로물루스 대제’는 로마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비역사적 역사 희극’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용기있는 인간 ‘로물루스’ (서로마 제국 실제 역사 속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인물)의 역설과 풍자를 통해, 현재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 속에 나타나는 무모한 영웅주의를 고발한다. 또한 인간성이 상실된 채 물질만능주의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국가적 양심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대표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역설의 제국 멸망기 - 극단 광장의<로물루스 대제>대부분의 극단들이 찬조출연이니 우정출연, 객원출연 등의 명목으로 타 극단의 연기자들을 데려다 쓰는 것은 어제 오늘 비롯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연극협회에서는 프로듀서 시스템을 들어서 자체 극단도 없는 연극인들이 공연을 남발하고 연극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타 극단의 단원을 빌어 쓰는 경로라 하더라도 5분의 1 이상은 자체 단원이 맡도록 규정된 공연법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 규정도 극단에 따라서 다른 모양이라서 현대극장 같은 경우는 거의 자기 극단의 전속이 없이 그때그때 계약에 따른 변형 프로듀서 시스템에 의해 동원을 하고 있고 극단 고향의 경우는 최근 출연자 두 사람이 다 국립극단 단원이었으며, 연장공연에 들어가서 후반 일정에 자체 단원으로 충원된 사례도 있다. 결국은 예술활동에 규제가 다르니까 편법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대규모적인 케이스가 소극장 규제인 것이다. 그것은 공연법에 따른 법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연극인의 친목을 위하여 연극협회의 자체 규제는 아무래도 예술하는 사람들의 양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없지 않다. 극단 광장도<로물루스 대제>라는 문제작을 효과적으로 공연하려다 보니까 결국은 인원동원을 다른 극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다 보면 동인제 시스템에 의한 고집보다는 프로듀서 시스템의 유연성을 활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단원 5분의 1 이상이라는 구실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전 단원을 다 눌러 앉히고 다른 극단에서 빼내 온 뛰어난 연기자로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제도는 결국 수단임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극단이 PD시스템이니 동인제 시스템이니 하면서 제도의 우열로 좋은 연극예술이 결정나는 것처럼 열을 올렸고, 급기야 그 논란이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어떤 체제는 제도적으로 글렀다느니,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느니···. 그러다가 급기야 전부냐 무냐 하는 식으로까지 악화된 감정대립 때문에 양단간에 좋은 점을 취사선택하려는 선의의 연극인들의 입장이 난처해진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진짜 희극이다. 제도적으로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예술가들의 특권이다. 연극적 상황이 달라져가는데 그것을 외면하는 세력은 보수파이다. 그리고 그 보수파들의 자유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신진들의 실험도 허용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모든 제도는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채택된 이상에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의의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제도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결국은 변하게 마련이고, 환경에 의해 변형되게 마련이다. 한국적 변형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불리고 있는 이 한국연극계의 허구는 언제인가 그 실상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극단 광장이 추송웅을 출연시켜 흥행의 재미를 본 것도 넓은 의미에서 프로듀서 시스템 형식의 변형이었고, 이번<로물루스 대제>로 예술적 차원을 높이려고 든 것도 동인제 시스템의 폐쇄된 벽 속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물루스 대제>는 극단 광장 자체의 단원들만으로써는 성사가 불가능한 작품이었다. 특히 연기력으로 주목을 끌만 했던 타이틀 롤의 권성덕, 줄리아 역의 이주실, 바지공장 사업가인 김진태, 배우 스승으로 나온 정동환 등이 모두 객원 출연자들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연출 김관주마저 동광레퍼터리 소속이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로물루스 대제>는 순전히 공연의 편의상 극단 광장의 이름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고,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하나의 프로듀서 시스템에 의한 독립된 제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극단 광장의 이름으로 공연되어야 했던 현행 공연 사정은 일단 뒤로 돌려놓고 우리는 그 광장이라는 이름 아래 대립되어 나타나는 이질적인 두 세력의 갈등을 본다. 그것은 외세에 밀리는 주체의 허약성 때문에 더 뚜렷해진다. 말하자면 빌려 온 외세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해서 극단 광장의 주체는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런 현상은 찬조 출연이니 객원 출연을 들고 나오는 극단의 경우 대체로 비슷한 관극 체험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그렇게 해서 찬조출연의 이름으로 변형 프로듀서 시스템을 채택한 극단들은 고유한 ‘색깔’을 잃어버린다(실제로 그들이 그런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극단 광장의 경우 이번<로물루스 대제>의 기획은 새로운 변모의 조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퍽 불안정한 변모인데 왜냐하면 극단 광장의 새 모습도 다음 또 다른 기획이나 제작에 동원되는 인적 변수에 의해 쉽사리 달라질 수 있는 모습이고, 그런 식으로 악순환이 계속되다 보면 극단 광장의 색깔은 영원히 형성될 수 없다는 비관론을 낳게 한다. 프로듀서 시스템의 결정적인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다.
<로물루스 대제>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뒤렌마트(F. Durrenmart)에 의해 창작된 가상의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로물루스가 로마를 자멸하게 하려고 무위(無爲)를 내세운 흔적은 없다. 실제로 그렇게 무위를 내세웠다면 역사적으로 그는 무능한 황제일 게 뻔하다. 김기주 연출이 만들어내려고 했으며, 권성덕이 체현시키려고 했던 로물루스 황제는 작가 뒤렌마트의 환상적 인물이며, 그것은 동시에 김기주의 환상이고 권성덕의 환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창작의 황제는 얼마든지 여러 개의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 그의 어리석음, 게으름, 무능과 무위는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성에 의해 유지계승되었던 인류의 고대심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뒤렌마트가 이 바보스런 황제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죄와 피로 이루어진 악덕의 징표인 ‘제국이라는 국가권력’을 대행하는 인물 로물루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의에서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 무위의 황제에게 위엄을 부여할 때 황제는 그의 바보스런 신성성을 회복한다. 그가 가장 바보스러울 때 그는 가장 황제답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있는 범속한 인간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신성성을 도대체 파악하지 못한다. 오도아케르만이 로물루스의 위대성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오도아케르는 새로 시작되는 신성의 시작이니까. 로물루스는 마지막 사라지는 신성의 권좌를 대리한다. 오도아케르는 새로 시작되는 권좌의 상징이다. 따라서 두 신성의 권화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고 혈연관계, 표리관계 그리고 음양관계에 있다. 이 역설의 로마제국 멸망기는 권력구조를 악의 화신으로 보고 결국 아름다운 인간성을 믿어 보려는 소박한 의식을 절망의 웃음으로 지켜보는 드라마다.
조국—악으로서—에 대한 배반이 선행되고 멸망의지가 기대는 인간성, 그리고 정의니 애국이니 하는 진지함을 희화화시켜 버리는 황제의 니힐리즘은 타이틀 롤 권성덕 주변의 과장된 피에로들 때문에 그 희비극의 맛이 감소되었지만 그런대로 이<로물루스 대제>는 뜻이 있는 상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