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가운데 연대순으로 두 번째 것으로 추정되는<안티고네>는, 아마도 기원전 441년이나 442년에 상연한 것으로서 지은이가 쉰서너 살 때 쓴 것이 되므로 원숙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의 뒷이야기로, 그의 두 아들이 왕위 계승을 다투다 모두 죽고 나서 주권자가 된 크레온이 내린 한 아들의 엄한 장례식 금지 명령에, 두 사람의 누이동생인 안티고네가 과감하게 이를 거스르고 폴뤼네이케스를 매장했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에 마음 약하고 상냥한 여동생 이스메네, 약혼자이며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 왕비 등이 뒤얽힌다. 강권을 휘두른 왕도 마침내는 자기 자식에게 저주를 받고 자식의 자살과 그에 뒤따른 이내의 죽음으로 가장 비참한 고독 속에 놓인 자기를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뜻에서는 문제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위법과 자연법, 인간이 제정한 법칙의 힘과, 신이 또는 인성(人性)이 스스로 구하는 바와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불관용에 대한 훈계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왕에 대해 안티고네가 하는 말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도록 (다같이 사랑하도록)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천성은) '라는 구절은 그 즈음 벌써 격하되어 왔던 그리스 정치 정세에 대한 프로테스트 라고도 일컬어진다. 하이몬의 대사에도 꽤 정치적인 색채가 짙다.
어쨌든 이 곡이 특히 지은이의, 그리고 고전적인 아테나이 휴머니즘의 고백이며 주장이 되고 있음은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와 장아누이의 안티고네 비교
소포클레스와 장아누이의 안티고네를 비교해보면, 같은 소재이지만 등장하는 인물과 구성의 차이로 인해 두 작품의 주제까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등장인물의 차이점부터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두 작품에서의 크레온 성격의 공통점은 한번 결정한 것은 번복하지 않는 고지식한 면과 왕의 권위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격은 왕이라는 직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소포클레스에서는 ‘왕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로 받아 들여 지는 것과 달리 장아누이에서는 ‘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내비칩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이 작은 말 속에서도 두 작품에서 크레온의 성격은 크게 달라집니다. 소포클레스의 크레온은 그의 대사 “복종치 않는 것보다 더 심한 악은 없다” 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앞세워서 자신의 명령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안티고네를 처단하기에 결정하는 순간에 까지 그에게는 한 치의 고민도 없고 주위의 만류에도 재고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는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고 단정 짓는 극단적인 성격에, 모든 것은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장아누이에서의 크레온은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왕으로서의 위상 때문에 명을 번복시킬 수는 없지만 이미 명을 어겨서 벌을 받아야 하는 안티고네에게 조용히 넘어갈 것을 회유를 하면서 자신의 직분 속에서의 고뇌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와 조카에 대한 연민 속에서의 고뇌를 보면서 소포클레스의 크레온보다 인간적인 성격을 볼 수 있고, 소포클레스의 크레온은 자신의 명을 어긴 것에 대하여 분노로 일관하는 감정적인 성격과 달리 장아누이의 크레온에서는 이성적인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작품에서의 안티고네의 성격을 보면 우선 자신의 일에 대한 신념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하는 능동적인 면을 보입니다. 개인의 명성이나 명예보다는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장아누이 작품에서는 그의 언니 이스메네와 자신을 비교해서 하이몬에게 사랑을 확인 받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리고 하이몬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는 모습으로 굳건히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면서 강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반면에 소포클레스에서는 죽음 앞에서 자신이 결혼도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 등장인물의 차이로는 소포클레스에서는 이스메네가 언니로 나오고 예언자가 등장하는 반면에 장아누이 작품에서는 이스메네가 동생으로 나오며 유모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등장인물들에서의 차이는 개연성이라는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소포클레스 작품에서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하여 죽은 자를 묻어주지 않는 크레온의 행동은 신이 노할 것이라고 하면서 크레온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이로인해 인간의 비극은 신이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야기 전제에 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 반면 장아누이에서 유모를 통해서 안티고네가 어리고 순수하며 한번도 유모의 말을 거역한 적 없는 착한 아이였음을 보여주면서 그런 착한 아이가 왕의 명을 어기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또 이스메네를 언니로 등장시켜 볼품없는 안티고네 보다 외적으로 화려함을 보여줍니다 그녀와 비교해서 초라한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하이몬의 모습을 통해 겉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안티고네 고유의 모습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자결하는 것에 대해 소포클레스에서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반면에 장아누이에서는 그들의 고결한 사랑을 하였음을 보여줌으로서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설정을 통해서 장아누이는 비극까지 가게 된 개연성을 만들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성쪽으로 보아도 개연성에 있어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에서는 빠르게 진행되어가는 이야기 흐름 속에서 안티고네가 오빠를 왜 묻으려 했는지, 그의 오빠들은 왜 싸움을 했으며, 크레온은 왜 한명은 묻어주고 한명은 내버렸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 체 관객들은 안티고네가 처한 상황에 몰입하면서 그 사실을 나중에 대사를 통해 짐작을 해야 합니다. 반면에 장아누이 같은 경우는 작품 전반에 코러스가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과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중간 중간 안티고네가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가에 대해 앞서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줍니다. 따라서 소포클레스는 극적인 효과를 누릴 수는 있되 개연성은 떨지는 반면에 장아누이는 극적인 효과는 소포클레스보다 떨어지더라도 개연성이라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소포클레스 같은 경우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크레온의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품때문에 비극을 이끌어 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안티고네를 처단하는 것과 플류네이케스를 묻어주지 않은 것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그러나 그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신의 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죽으면 묻어주어 그 영혼의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모두 믿고 있는데, 크레온은 자신의 권위로 그 자연의 법칙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 자연의 법칙은 인간 혼자 독단적으로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것은 신에 대한 반항이나 거역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행동을 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샀고 그에 대한 벌로 그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그가 비극을 당했을 때 가여움을 느끼거나 동정의 표를 주기 보다는 그런 비극을 받아 마땅하다, 당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자연의 섭리를 어긴 그가 악인으로,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안티고네가 선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아누이 같은 경우는 처음에 코러스가 등장하여 등장인물들의 각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고뇌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비록 하찮은 일을 하는 경비병이지만 그가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기에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자기가 살기위해서 안티고네를 붙잡아온 얄미운 역할이지만,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동정의 마음을 얻게끔 합니다. 경비병은 경비병 나름대로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크레온은 크레온 나름대로 왕으로서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가는 것, 또한 안티고네는 안티고네대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오빠를 묻어주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기에 무모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 외에 등장하는 인물 하이몬, 이스메네, 왕비 등 등장인물 모두는 어쩔 수 없이 매여있는 직분 안에서 최소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정해진 그들의 직분 속에서 해야 하는 의무이자 운명이라는 것으로 그들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해줍니다. 그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졌음에도 그 비극적인 상황은 어떤 특정한 악인이 고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미 정해진 직분에 따라 행동하여 만들어졌을 뿐이며 비극을 이끈 악인도, 선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끝처리에서 소포클레스에서는 크레온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통해 그가 비극을 자초해서 벌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반면에 장아누이에서는 크레온이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이 비극은 각 개인의 직분 속에서 자신이 선택으로 어쩔 수 없이 벌어져야 했던 것임을 또 다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거부한 인간에게 신이 벌을 내림으로써 비극을 맞이한다고 보았고 장아누이 작품에서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직분 속에서의 의무 때문에 처한 비극과 그 속에서의 자유의지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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