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백장미 Die Weisse Rose 백장미 클럽... 하면 무슨 여중, 여고생들의 일진회 이름 같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했던 젋은 대학생들의 모임 이름이다.
한스 숄(Hans Scholl)과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의 두 대학생을 중심으로 그 대학 친구들, 가족, 교수 등이 모인 이 모임은 나치 정권과 히틀러에 반대하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뿌리다가 결국 체포돼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처형되고 만다.
가담자 한스와 조피 숄의 누이인 잉게 숄이 지은 것입니다. 저자는 사전(재판전)에 몰랐던 것이기에 아주 사실적인 이야기가 간단하게 소개된다. 1947년에 독일정부가 교재로 지정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46년 경에 쓰여진 게 아닌가 싶다. 활동은 6차례의 전단 살포가 전부이지만 강조된 것을 보면, 독일 내의 히틀러나 나치에 대한 다른 저항은 별로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말미에 별도로 소개된 암살시도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여러차례 영화로도 제작됐다.
원래 소설인 이 작품은 80년대 대학생및 지식인들의 필독도서라 할정도로 널리 읽혀졌고 또 각색되여 기성극단과 대학극에서 공연이 자주 되었던 작품이다. 한양극회에서도 89년 신종찬 연출로 공연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한스와 조피는 15세, 13세였다. 그들은 히틀러가 조국의 영광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빵과 일자리를 주고 모든 독일사람 하나하나를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으로 믿었다. 한스의 남매들은 ‘히틀러 유겐트’라는 청소년 단체에 가입 하게 되었지만 한스는 유겐트의 분대장이 되면서 유겐트가 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며 그들이 막연히 꿈꾸던 이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스의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의심은, 역사를 가르치던 젊은 선생님이 나치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SA돌격대에 잡혀가 모든 돌격대원들 앞에 세워져 차례로 얼굴에 침을 뱉는 수모를 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선 더욱 커진다.
마침내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의대에 다니던 한스는 위생병동맹에 가입해 프랑스 전선에 위생병으로 참가해야 했고 교대기간에는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해야 했다. 한스는 1942년 봄 우편함에서 보낸 사람 주소가 없는 나치만행을 고발한 글을 읽게 된다. 그것은 정부가 장애인들과 정신이상자를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일할 능력이 없는 허약자나 불구자,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 노약자들을 근본적으로 죽여도 좋다는 것을 정당화한 무서운 이론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것을 읽은 한스는 저항이 시작된 것을 알고 군대에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알레산더 슈모렐과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 빌리 그라프 등과 함께 백장미 단을 만들어 나치의 만행을 전단지로 만들어 뿌리기 시작한다. 한스의 동생 조피는 이 전단지의 내용이 한스가 이야기하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결국은 한스의 방에서 그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을 발견 한다. 방학을 맞아 한스가 전선으로 떠나고 조피가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는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말했다가 사무실 동료 여직원의 밀고로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던 계셨던 아버지가 다시 게슈타포에 의해 끌려가고 조피는 정신요양원에 있던 아이들이 끌려가 독가스로 살해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의 친구들로부터 듣는다. 그리고 저항하던 의사도 함께 데려갔다는.
한편 한스는 러시아 전선에서 돌아와 조피와 방을 빌려 같이 지내며 위험한 전단지 만드는 일을 계속하며 전단지를 뿌린다. 다음해 봄 한스는 친구들과 루드비히 거리에 ‘타도 히틀러! 타도 히틀러!’를 써놓고 대학에도 ‘자유’라는 글씨를 써놓았다. 이제 점점 더 저항하는 세력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 즈음 한스는 한스가 게슈타포의 감시망에 포위됬다는 경고를 그를 걱정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수백 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없어서 그 경고를 무시했다. 1943년 2월 18일 한스 남매는 대학에 도착해서 재빨리 전단을 뿌렸다. 하지만 그 학교의 수위가 그들을 엿보았고 그들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세상과 단절된 채 밤낮으로 심문을 받았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와 몇몇의 학생들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들은 이틀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잡히지 않은 친구들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죄를 자신들이 덮어쓰려 했다. 이런 의도를 모르는 게슈타포는 기뻐했다. 그들에게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법원이 지정해 준 국선 변호인은 아무런 도움을 기대 할 수 없었고 재판도중 조피는‘우리가 말하고 쓴 것, 그것은 바로 많은 독일인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단지 그들은 입 밖에 내 말 할 용기가 없었을 뿐입니다.’고 말했다. 한스의 변호인은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며 그들 부모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했으며 잠시 휴정하는 시간에 재판을 방청하러 온 슈미트라는 대학수위는 마치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칭찬과 축하를 받았다. 최후의 날 한스는 감옥의 벽에‘모든 폭력을 이겨내고 살아 남아라.’라고 썼으며 조피의 감옥 뒷벽에는‘자유’가 씌여 있었다. 그들이 교수대에 올라가기 전 감옥 전체에 자유는 살아 있다! 고 외치는 한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관련도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 처절한 정원, 안네의 일기/ 영화 쉰들러리스트. 안네의 일기)
1933년 세계적 경제공황의 혼란기에 실업자 수가 600만명에 달하고 경제공황으로 수출의 길이 막히고 외세 압력이 심해지자 강대한 독일의 재건을 내세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당수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히틀러는 일자리와 부강한 나라를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히틀러는 청소년들이 어렸을 때부터 나치사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하기위해서 ‘히틀러유겐트’라는 단체를 만들어 청소년들이 히틀러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고 나치정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갖도록 교육시켰고 국민들의 정치. 사상. 문화. 종교 등을 통제하며 소위 독일의 사상과 맞지 않는 책은 불살라졌고 영화와 신문, 라디오 등은 검열이 이루어졌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무장단체인 SA돌격대는 나치의 반대세력들을 잡아 들였고 SS친위대도 그와 마찬가지 성격으로 유태인 학살을 주도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2주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6주 만에 프랑스 파리로 진군한다.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이 단 몇 주 만에 함락되고 소녀들은 대부분 6개월에서 1년 동안 노동봉사를 해야 했고 남학생들은 1년에 6개월은 군인으로 전선에서 지내야 했다. 히틀러는 실업의 원인을 유태인들에게 돌려 수백 만 명의 유태인을 처형했고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된 정신 지체아나 장애인 등을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들을 독일을 패전으로 몰고 간 러시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동원하였다. 백장미단의 영향으로 군내부에도 히틀러에 대한 저항세력이 만들어 졌고 1943년부터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시작되어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의 주도로 암살이 이루어지나 실패하고 관계자 7천명을 잡아들여 수 천 명이 사망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리던 독일군 총사령관 롬멜도 히틀러 암살계획을 알고도 묵과했단 이유로 히틀러에 의해 자살명령을 받고 음독자살한다.
백장미단의 다른 단원, 즉, 빌리 그라프와 알레산더 슈모렐 또 그들을 도와주던 후버교수는 그 해 4월 19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