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타고르가 28세에 발표한 희곡 《왕과 왕비》는 전형적인 셰익스피어 양식에 매우 가깝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이 희곡에서 타고르는 낭만적이고 나약한 성격의 왕과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강한 성격의 왕비를 대립시키면서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매개체로 확연히 다른 여러 각도의 인간성올 그들의 대화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꿈만을 꾸고자 하는 낭만적인 왕을 왕비는 몹시 개탄하며 나라를 위기에 빠지게 하는 외환을 뿌리 뽑고자 앞장선다. 남편인 왕과 그의 왕국을 위해서 앞장선 것이다. 허나 왕은 왕비의 깊은 뜻을 모르고 오히려 떠나간 왕비에 대한 분노는 그의 원망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게 되고 끝내 왕비가 나선 길을 뒤쫓아 복수하려 나선다. 그의 복수심은 불타올라 끝내는 골육상쟁의 아수라장을 이룬다. 왕비는 싸움 가운데서도 왕의 오해와 그 측근들의 모략들을 무릅쓰고 끝까지 자신의 혈족과 신의와 혈연을 끊기까지 하면서 남편인 왕과 왕국에 몸을 바치고 끝내 왕이 처하고 있는 문전에 쓰러지고 만다. 결국 숭고한 죽음으로 무능한 주권자와 무지한 대중을 일깨우고 조국을 지키려는 정신을 타고르는 여기 등장하는 왕비로 하여금 하나의 큰 역할을 맡게 하고 있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인도가 낳은 세계적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음악, 미술 등에 조예가 깊은 예술가였다. 서 벵골의 콜카타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으로 유학하여 법과를 마쳤고, 1883년에 결혼하였다. 그는 이미 열다섯 살 때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종교 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교육은 인간의 창의력을 마비시킨다고 비판하였다.
타고르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성의 자아(自我), 그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이 교육이며, 또 그것은 스스로 계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덕목이라고 보았다. 그는 영국에 법학을 공부하려 갔으나, 자격증을 얻으려는 비교육적 대학 제도에 큰 환멸을 느꼈다. 그는 끝내 변호사 공부를 포기하였고, 이와 같은 대학 교육 자체에 반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그는 영국 유학 때 닥치는 대로 문학 작품을 탐독하기에 이른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기탄잘리(Gitanjali)'를 좋아하였고, 고향인 벵골의 바이슈나바 교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영국의 시인으로는 셸리와 키츠에 심취하였다.
타고르는 어렸을 때부터 벵골 어로 서정시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1890년에는 그의 첫 시집 '마나시〔Manasi, 마음의 화현(化現)〕'를 출판하였다. 1891년부터 1895년 사이에 그는 당시의 유명한 벵골 어 문학지인 '사다바(Sadava)'에 계속 기고하여 벵골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동안 타고르는 몇 편의 희곡 작품도 발표하였다. '희생', '왕과 왕비' 등은 이 시기에 발표한 대표적 희곡들이다. 영국의 비평가 톰슨(Tompson)은 타고르의 시세계를 이렇게 평하였다. "현상 세계의 모순, 혼돈을 깊이 통찰하여 신의 창조 활동의 아름다움과 조화시킨 문학 중의 문학이다. 그것은 비단 인도 문학의 일품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걸작이다."
그러나 타고르의 시작(詩作)은 그 당시 인도인들에게는 큰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의 문학 경향은 고전적 산스크리트 어로 된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힌디 어가 널리 읽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고르의 벵골 어는 지방 속어로 간주되어 경시를 받았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타고르가 노벨 문학상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받게 되었을 때, 그 수상의 변은 '모국어인 벵골 어를 잘 유지하는 데 공헌한 점'이라고 하였다.
1901년 그는 볼푸르에 은퇴하여 유명한 '평화의 안식처' 산티니케탄(Santiniketan)을 설립하였다. 그것은 한적한 지역에 자리잡은 독자적 학풍의 대학이다. 그는 이곳에서 인간의 심성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이상에 의한 교육을 실현하였다. 그토록 엄격하였던 자기 개발의 산실이었으며, 그곳은 통상 '타고르 국제 대학'이라고 불린다. 그 대학 설립의 재원은 재벌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후원으로 이룩되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13년이었다. 만년에 타고르는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여유 있는 삶을 즐겼다. 인도의 전통 언어로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던 이 위대한 시인은 1941년 고향에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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