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해롤드 핀터 '지하 아파트'

clint 2015. 10. 27. 21:49

 

 

 

 

 

 

 

'지하 아파트'는 1967년 2월 BBC 텔레비전에서 핀터 자신이 스톳트 역을 맡아 초연되었다. 무대공연은 다음해 뉴욕 이스트사이드 극장에서 『티파티』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작품의 근원은 핀터가 19세 때 썼던 짤막한 다이얼로그 '컬러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후 이 이야기는 시로, 단편소설로 개작되었다가 마침내 1963년 '콤파트먼트'라는 제목의 영화대본으로 썼으나 제작되지는 않았다.
방이 하나 있고 여자가 하나 있다. 가까운 친구 사이인 두 남자는 이 방과 여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운다. 레인코트를 입은 스톳트는 추운 겨울 밤 비가 오는데 어느 지하 아파트 앞에 서있다. 그의 뒤에는 소녀 한 명이 담에 몸을 움츠리고 서있다. 널찍하고 안락한 지하 아파트에는 로오가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고 있다. 초인종 소리에 나가 본 로오는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인 스톳트를 반갑게 맞아들인다. 그들은 과거에 룸메이트로 함께 오래 지내곤 했던 사이이다. 그는 친구보고 간이침대가 있으니 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원하면 언제 까지 있어도 된다고 한다. 젖은 머리를 닦고 지난 얘기를 한참 한 후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묻자 손님은 밖에 친구가 하나 있는데 들어와도 되느냐고 묻는다. 스톳트는 어린 소녀인 제인을 데리고 들어온다. 제인과 스톳트는 옷을 벗고 로오의 침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침대를 빼앗긴 로오는 그냥 불 옆에 앉아 책을 읽는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다름 아닌 삽화가 있는 『페르시아 사랑기법』이다. 한편 침대에서는 제인의 숨소리,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로오는 이론 공부를, 스톳트는 실제 행위를 한다. 그 후 장면들은 아파트를 차지하려는 스톳트와 제인을 애인으로 만들려는 로오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 후 여러 장면에서 제인과 로오는 스톳트에 관한 이야기를 은밀히 주고받는다. 제인은 스톳트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스톳트에 관해서는 로오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실내와 외부 장면이 거의 교차하다시피 여러 번 변화한다. 그들은 여름 해변 가에서 또는 동굴 속에서, 방안에서 이야기를 한다, 스톳트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도 제인은 바닥에 누워 있는 로오에게 은밀한 미소를 보낸다.
스톳트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떼어 내린다. 첫날 저녁 방안이 너무 밝다며 불을 끄게 만든 이후부터 그는 이 아파트를 자기의 구미에 맞도록 변화시키고 있다. 한편 제인은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한다. 침입자들의 세력이 점차 확대됨을 알 수 있다.

 

 

 

겨울이다. 이번에는 스톳트와 로오가 제인에 관해 얘기한다. 스톳트는 그녀가 아주 훌륭한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여름 바닷가에서 제인은 로오를 애무하고 그는 스톳트가 볼까봐 걱정한다.
로오와 제인이 타월을 어깨에 두르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방의 인테리어는 최첨단 스칸디나비아 식으로 변해 있다.
겨울이 되었다. 방은 아직도 스칸디나비아 식 그대로이다. 스톳트와 제인은 침대 속에, 로오는 의자에 앉아 있다. 스톳트는 스테레오로 음악을 듣자고 강짜를 부린다,
셋은 어떤 한적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이곳은 두 청년이 과거에 자주 가던 곳이다. 한 잔씩 마신 후 다시 주문을 하고 있다. 모두 먼저 것과 같은 것으로 주문하기로 한다. 주인 역을 하는 로오는 각자에게 확인한 후 웨이터에게 “같은 것으로"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이때 그는 다섯 번이나 “같은 것으로”를 되풀이한다. 조용히 있던 스톳트가 "난 캄파리로 바꿀 거야” 라며 기선을 잡고 있던 로오의 기를 단번에 꺾어 버린다.
겨올 들판에서 제인이 심판을 보고 두 남자는 경주를 한다. 제인의 신호로 로오가 달린다. 스톳트는 그냥 서 있다. 스톳트가 오나 뒤돌아보던 로오는 넘어진다.
겨울 밤 방안. 스칸디나비아 장식 그대로. 스톳트는 음악을 원한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로오와 제인이 달빛 아래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앉아 있다. 겨울날 뒷마당을 걸으며 로오는 스톳트에게 이 아파트가 셋이 살기에는 너무 좁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나 시의회에서도 단속할 것이라 걱정한다. 스톳트는 이를 부정한다.
다시 여름. 셋은 점심식사 중이다. 제인은 스톳트 무릎에 앉아 있다. 스톳트는 음악을 강하게 요구한다. 드뷔시 레코드를 찾고 있던 로오는 다른 레코드판들을 마구 벽에다 던진다. 제인은 밖으로 나간다.
다시 겨울. 방안 인테리어는 애초의 모습으로 복귀. 발가벗은 스톳트 바 제인이 침대로 기어 들어간다. 로오는 레코드를 내려놓고 자기 의자에 앉아 벽난로의 불을 쑤신다.

 

 

 

여름, 뒷마당. 제인은 테이블 옆에 앉아 있고 스톳트가 나와서 그녀의 앞가슴을 더듬으려 하자 그녀는 피한다. 로오가 열린 창문에서 부른다. 레코드판을 찾았다고 한다.
바닷가 동굴 속에서 제인은 로오에게 스톳트를 보내라고 말한다. 여기서 제인의 아리송한 말투로는 그녀와 로오가 언젠가 과거에 동거를 했던 경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말 속에서 이 작품의 주요 테마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되풀이해서 반복되는 그들 세 명의 관계의 변화를 그린 작품으로 보여 진다.
겨울. 뒷마당. 제인이 스톳트를 배신하고 있다고 로오는 친구에게 말해준다. 그의 말투로는 제인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다.
스톳트가 침대에 누워 있다. 제인과 로오는 마치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듯 스톳트에 대해 얘기한다. 다음 로오와 제인은 한구석에서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있다. 스톳트는 창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스톳트가 커튼을 닫는다. 방안은 또다시 완전히 변모했다. 이번에는 이태리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태피스트리, 플로렌스 거울, 이태리 대가의 그림, 대리석 타일 등. 스톳트와 로오는 플루트를 채로 하여 큰 구슬을 구부려 크리켓 게임을 시작한다. 금빛 어항이 구슬에 맞아 깨진다. 마룻바닥에서 금붕어가 헤엄친다. 로오는 이마에 구슬을 맞고 쓰러진다.
이번에는 방안이 완전히 텅 빈 상태. 두 남자는 각기 깨진 우유병을 든 채 겨루고 있다. 그들 얼굴에는 땀이 나있다. 여기서도 핀터는 “스톳트의 관점에서 본 로오의 모습” “로오의 관점에서 본 스톳트의 모습”을 영상처리해 주고 있다. 두 남자가 겨루고 있는 동안 제인은 전연 무관심하다는 듯 인스턴트커피를 타고 있다. 이제 두 남자의 최후의 한판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 실내 장치도 모두 없어진 텅 빈 방이다. 싸움의 승자가 누구인지 직접 보여주지는 않고 다만 우유병들이 함께 부서진다. 그런데 곧바로 드뷔시의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스톳트의 승리를 의미한다. 스톳트는 지하아파트를 차지한다.

 

 

 

극은 처음과 똑같이 끝난다. 다만 두 남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로오와 제인은 지하 아파트 앞에 서있다. 로오는 스톳트의 레인코트를 입고 있다. 방안 장식도 맨 처음과 같다. 스톳트는 난로 옆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초인종 소리. 스톳트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 로오를 반갑게 맞이한다. 로오는 여자는 차지했지만 방은 빼앗겼다. 그래서 방을 찾으러 온 것이다. 한 사이클이 끝나고 새로운 사이클의 시작이다.
세 사람이 어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경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지문에 의하면 겨울이 여섯 번, 여름이 다섯 번 지나갔다. 그러나 실제로 경과한 시간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절과 실내장식 등이 논리적 이유 없이 변화하듯 무대 위 인물들의 감정과 태도 그리고 그들의 상관관계도 일관성 없이 자꾸 변화하는 사실이다.
일관성이 있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이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소유와 끊임없는 도전이다. 두 주인공은 집을 차지하거나 여자를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못 갖는다. 둘을 동시에 갖지는 못한다.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따라서 끝이 없는 갈등과 인물들의 모순투성이, 따라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그린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이 작품을 로오의 마음속의 꿈이나 아니면 그의 환상을 극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톳트를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막상 그를 만났을 때 생겨날 변화에 대한 공포 등을 극화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모두가 원래 텔레비전을 위해 쓰여진 것인데 특히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대극이 갖는 시간적, 공간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자재로 시공을 넘나들고 있다. 말보다는 시각적 영상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여기저기 맞추어 가며 인간 내부의 미묘한 갈등, 고뇌 등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핀터 특유의 대사 - 반복을 통한 코믹한 대사, 이중의미를 가진 말, 앞뒤가 상반되는, 모순되는 말들 - 과 애매모호한, 증명되지 않은 많은 사건들은 여전히 이들 극 속에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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