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드라마로 쓰여진 '밤나들이'(A Night Out)는 I960년 3월 BBC의 제3프로그램에서 방송되었고 핀터 자신이 실리 역을, 아내인 비비안 마얀트가 여자 역을 맡았다. 곧이어 같은 해 4월에 텔레비전 극으로 방영되었을 때에도 이 두 사람은 같은 역을 맡았다. 그 후 출판된 것이 바로 이때 사용한 텔레비전 극의 대본이다.
핀터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로 한 방 안에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는 데, '밤나들이'는 이런 형식에서 탈피하여 외부 세계로 진출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이 애초에 라디오 극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더 자유자재로 외부세계로의 진출이 용이했을 지도 모른다. 과거의 작품들이 우화적이거나, 은유적인 스타일로 쓰여졌고 애매모호한 내용, 신비로운 분위기, 공포와 위협감에 사로잡히는 데 비하면 '밤나들이'는 인물, 주제, 대사, 세팅 등 극 전체가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즉 핀터의 작품치고는 매우 이례적으로 작품의 내용과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그래서 자칫 '뻔한 이야기' 라는 실망을 줄 수도 있는 극이다. 어쩌면 텔레비전 극이라 폭넓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다소 배려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은 전 3막으로 네 개의 서로 다른 장소가 교차하며 9개의 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토우크스부인의 작은 집 부엌, 철로 차단기 옆에 있는 커피 판매대, 킹 사장 집의 응접실, 그리고 창녀의 작은 방 등 네 곳이다.
주인공 앨버트는 드물게 밤에 외출을 한다. 집을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좌절과 실의에 차, 집으로 돌아간다. 그나마 외출 전 던진 자명종 시계 덕분에 분명 이제는 어머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대감에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건재하고 잔소리와 푸념은 끝날 줄을 모른다. 모처럼의 밤나들이는 그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험회사 말단 직원인 28살의 앨버트는 아들에 집착한 나머지 그를 억압하고 바가지를 굵어대는 홀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저녁모임에 나갈 준비를 하는 아들이 새 바지를 입었다고 빈정댄다. 아침에 다려 달라고 부탁한 넥타이를 찾자 어머니는 딴전만 피운다. 은퇴하는 직원을 위한 송별파티가 사장 집에서 열리는데 여기에 회사직원들이 초대된 것이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파티에 간다고 어머니에게 알렸다. 서양에서는 가벼운 저녁식사 후 술과 안주만으로 이런 모임을 갖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나 아들이 밖에 나가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저녁밥이 다 되었는데 그냥 가면 어쩌느냐, 나는 오늘 저녁 혼자서 무엇을 하란 말이냐 등 잔소리는 계속된다.
철로 차단기 옆 커피 판매대 앞 벤치에서 앨버트의 회사동료인 실리와 켓지가 간단한 식사를 하며 앨버트를 기다린다. 이 두 청년은 지난 주 토요일 축구게임 얘기에 열중한다. 다른 회사 축구팀과 게임을 할 때 켓지가 아파서 빠지자 팀장인 기드니가 앨버트를 켓지 포지션에 배치했다. 그런데 앨버트의 실수로 경기에 졌기 때문에 기드니는 앨버트를 못마땅해 한다는 장황한 이야기를 한다. 이때 상대팀 선수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둘이 주고받는 대사에는 핀터 특유의 인물 간 의사소통의 불가능, 앞뒤 모순되는 말, 같은 말의 반복 및 과장 등 코믹한 면이 나타난다. 두 청년의 말에 끼어드는 노인도 코믹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을 한다.
정장을 차려입고 막 나가려는 아들을 붙들고 어머니는 어디 가냐, 저녁 다 됐다 등 앞 장면과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다 나가는 것 자체에 대한 잔소리는 포기한 듯 이제는 아들의 옷차림을 가지고 트집을 건다. 솔질을 해야겠다, 앞주머니에 손수건을 꽂아야 한다 하면서도 오늘 저녁, 아들이 좋아하는 고기 파이를 특별히 만들었다며 다시 한 번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안간힘을 쓴다. 다시 커피 매대. 앨버트를 기다리고 있던 켓지와 실리는 보나마나 어머니가 그 친구 머리를 빗겨주고 있을 거라며 낄낄 웃는다. 그리고 언제나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귀찮아한다면서 앨버트에게 무슨 숨기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드디어 앨버트가 나타난다. 그는 아직도 파티에 갈 건가 말 건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소극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앨버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가는 것 자체를 주저한다. 켓지와 실리는 새로 온 여직원의 이름이 베티인지 헤티 인지를 가지고 같은 말을 되풀이 주고받는다.
대사 없는 짧은 5장은 혼자 남은 어머니의 모습만 클로즈업시켜 보여준다. 자명종 시계도 클로즈업된다. 시간은 7시 45분이다. 1막의 끝이다.
2막 1장은 킹 사장 집 응접실에서 파티가 한참 진행 중이다. 별로 신날 것도 없는 시큰둥한 파티이다. 사장을 위시해서 오늘의 주빈인 라이안까지 11명이 등장한다. 방 한가운데에 미소만 짓고 앉아 있는 라이안은 거의 말이 없다. 문제의 기드니가 죠이스에게 부탁을 한다. 아일린을 시켜서 앨버트와 춤을 추게 해보라고. 그냥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 재미삼아 그렇게 해보라고 시킨다. 특히 여자 앞에서 수줍어하는 앨버트를 궁지에 몰아넣어 보겠다는 심사다. 이것이 이 장면에서의 작은 긴장의 시작이다. 사장이 한참 라이안을 위한 환송 연설을 하고 있는 도중 아일린이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낸다. 누군가가 자기 몸을 만졌다며 앨버트를 노려본다. 기드니는 기다렸다는 듯 앨버트를 몰아친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는 미소 짓고 앉아 있는 라이안의 손을 집중적으로 비쳐준다. 그리고 지문에는 “그의 표정으로 탈선한 것은 그의 손이었음이 분명해 진다.” 라고 적혀 있다. 이 사건 후 무대 중앙부 파티 장면은 그냥 대사 없이 진행되고 현관 마루 쪽에 나간 앨버트를 따라 나간 기드니와 실리 세 사람만의 설왕설래가 계속된다. 결국 기드니는 앨버트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만다. "너는 마마보이야. 그게 너야. 그게 네 문제라고. 넌 마마보이라고” 하는 기드니를 앨버트가 한대 친다. 이를 말리려는 실리 등 셋은 현관 마루에서 이리저리 엉킨다. 앨버트는 현관문을 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세 사람(앨버트, 어머니, 여자) 못지않게 주변 인물의 성격묘사가 잘 되어 있다. 킹 사장은 이중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전형적인 잘난 체하는 인물이다. 자전거가 건강에 얼마나 좋은 건지 역설하다가도 자기는 자동차로 출퇴근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가 하면 주빈 라이안을 위한 환송의 말에서도 사장과 직원들 사이의 크나큰 격차를 느끼게 하는 무례한 말투를 쓴다. 사사건건 앨버트를 물고 늘어지는 기드니는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이 앨버트 못지않게 불안, 고독감, 자격지심 등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약자인 앨버트를 비열할 정도로 괴롭히는 것, 자기는 자격이 많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필요 이상 뽐내는 것, 강자인 사장 앞에서는 공손함 그 자체인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드니와는 반대로 마음씨 좋은 실리는 앨버트를 감싸주고 옹호하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앨버트 못지않게 그도 결국은 무능한 한 청년에 불과하다.
이 장면에서는 코미디와 약간의 공포 분위기가 병치되어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핀터 초기 작품 속의 공포분위기는 많이 없어졌다.
2막 2장은 스토우크스 부인 집 부엌에서의 세 번째 장면이다. 파티에서 수모와 망신만 당하고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앨버트에게 어머니의 질책, 원성, 설교, 그리고 길고 긴 독백은 계속된다. 어머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들이 여자를 사귀어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오래오래 독점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앨버트는 시계를 집어 들어 어머니 머리를 향해 치켜든다. 숨이 멈출 것 같은 어머니로부터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2막은 끝난다. 여기서 작가는 시계를 집어든 것만 보여준다. 어머니가 시계에 맞았는지, 맞았다면 치명타였는지 알려 주지 않고 있다.
어머니 머리에 시계를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온 앨버트는 커피 판매대 앞에서 거리의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여자의 방으로 따라간다. 일단 방에 들어서자 여자의 태도가 돌변한다. 부드럽게 유인하던 여자는 어머니와 똑같은 잔소리꾼이 되어 버린다. 소리 내서 걷지 말아라, 신발을 벗어라, 카펫에 담뱃재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 등 끝이 없다. 여자는 자기가 교양 있는 가정 출신이고 딸아이는 일류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한때는 영화 스크립터로 일했다고 말한다. 여자의 질문에 앨버트는 자기 직업이 프리랜서 영화 조감독이라고 말한다. 여자도 앨버트도 자기의 현실을 잠시 떠나 각자 자기가 추구하는 꿈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방황한다.
핀터 작품에는 거의 언제나 고독이라는 주제가 다루어진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인 앨버트, 어머니, 여자는 모두 인간이 궁극적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고독을 해결하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한때 스크립터였다고 주장하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보다 자기는 좀 낫다고 하면서 "스크립터니 비서니 하는 여자들 모두들 그렇고 그렇다” 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아무렇게나 토해 낸다. 앞뒤가 상반되는 말을 주저 없이 뱉어내는 핀터의 인물들은 너무나 많다.
여자가 이제 슬슬 이 방에 들어온 본연의 목적 즉 창녀와 고객의 관계를 행동으로 옮겨 보자는 제안을 할 무렵 앨버트의 태도는 거칠어진다. 그는 시계를 집어 들어 휘두르고, 담뱃불을 비벼 카펫에 버리고, 여자의 팔목을 잡아 걸상에 눌러 앉힌다. 그의 언행은 갑자기 매우 난폭해진다. 그리고 "내게 함부로 까불지 마”라고 소리 지른다. 여자가 그의 섹스 파트너 역할을 하겠다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변한 것이다. 시계로 여자를 후려치기라도 할 듯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성폭행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앨버트는 여자가 기대하는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이행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려 드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잔소리하는 여자를 자기 어머니와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너희들은 다 같아. 알아, 너흰 다 같다고, 너희들은 모두 내 목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란 말야"로 시작되는 앨버트의 대사에서 우리는 이제 그의 상대가 창녀인 이 여자가 아니라 자기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가상의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반항적 태도를 취할 때 작가는 앨버트를 "그의 체구와 흥분도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고 지문에 적고 있다. 어머니의 억압 밑에 평상시 움츠렸던 그의 체구가 이 순간 당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고작 사진액자 하나를 깨고 사진의 주인공이 그녀 주장대로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낼 뿐 그 이상의 가혹행위도 또는 용감한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는 여자에게 구두를 신기라고 명령한다. 모처럼 자아를 주장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된 앨버트는 겁에 질린 여자에게 동전 한 푼을 던져 주고 서커스 구경이나 가라, 하며 나가버린다.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창녀와의 관계에서 앨버트의 이성 관계뿐 아니라 어머니와의 모자관계까지 투영해볼 수 있다. 핀터 작품에는 모자관계 또는 일반 남녀관계를 묘사할 때 한 여성에게 "어머니 - 아내 - 창녀” 등 세 개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앨버트 모자의 야릇한 관계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 확실해진다.
창녀와의 관계도 엉망이 된 앨버트는 집에 돌아온다. 어머니가 사망한 줄 알았는지 긴장을 풀고 흐트러진 자세를 취한다. 해방감을 만끽한 그의 얼굴에는 미소마저 감돈다. 그러나 어머니는 건재할 뿐 아니라 아들에 대한 병적인 소유욕은 전연 변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대하듯 아들을 달래며 이제 곧 휴가를 받으면 엄마와 함께 어디 여행이나 떠나자고 달랜다. “너는 착해, 나쁘지 않아, 넌 착한 아이야... 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앨버트의 "밤나들이”는 일과성 사건에 불과하고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무능하고, 성적인 면에서도 무기력한가를 재확인 해주었을 뿐이다.
어떤 평론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가리켜 아마도 작가는 외출한다는 “out"보다는 앞의 두 단어인 “a night" 에 더 강점을 두었을 것이라 말한다. 언제까지나 빛을 못 보고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하는 앨버트의 앞날을 시사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인물들은 다른 초기 작품의 경우처럼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쫓긴다거나,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타나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함, 아늑함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말할 수 없는 공포감에 짓눌려 있지는 않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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