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살기엔 너무 진실해』를 통해 쇼는 제1차 세계대전이 안일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영국인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렸지만, 대다수는 그런 절망으로부터 도피해 현실의 병폐를 환상으로 은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이 준 충격과 공포가 너무 컸기에, 전후 젊은이들은 포화가 없는 곳에서는 삶의 쾌락을 즐겨야 한다는 의식이 만연한 상황이었다. 이 극에서 쇼는 환자, 오브리, 스위티 등 젊은 남녀를 통해 이런 상황을 극화하고 있다. 이 극에서 여러 양상으로 극화되는 질병은 전후세대의 불안과 무익한 삶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며, 궁극적으로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환상에 빠진 결과이다. 쇼는 먼저 1막의 환자를 통해 전후 영국사회의 병폐를 육체적 질병으로 보여주고 있다. 1막은 모든 창과 문이 외부의 신선한 공기와 빛을 막고 있어서 환기가 되지 않고 악취가 나는 환자의 병실을 무대로 하고 있다. 쇼는 이 극을 응석받이 환자 옆에 앉아서 고통을 받는 몬스터인 세균의 대사로 시작함으로써 처음부터 병든 환자의 상태를 몬스터의 그것과 병치시킨다. 여기서 쇼는 몬스터를 통해 세균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균을 감염시키고 있다고 토로함으로써 통상적인 사고를 뒤집어 환자의 육체적 질병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 메타포임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이 극에서 환자를 병들게 하고, 그 병을 심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와 의사의 과도한 보살핌이다.
1막에서 쇼가 "많은 사람들이 약병을 믿고 당신이 참된 것을 제안한다 해도 당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알려하지 않을 거요. 그리고 약병은 효과가 있지”라는 의사의 말을 통해 질병은 궁극적으로 의사의 치료나 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치유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극에서 육체의 질병과 그 치유는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쇼가 1막에서 환자를 통해 육체적 질병에 초점을 두었다면 2막 이후 특히 오브리를 통해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 질병에 초점을 둠으로써 전후 영국사회의 병폐 자체도 '정신신체 상관'이라는 측면에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다소 모호한 이 극의 구성에 어느 정도 일관성을 부여한다. 또한 1막 끝에 세균이 관객에게 직접 "이 극은 이제 사실상 끝났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2막 동안 더 엄청난 길이로 그것을 토론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이후 두 막이 1막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토론장이 되어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할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쇼가 2막과 3막을 사실주의극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구성한 데 반해 1막에서는 세균을 몬스터로 등장시켜 판타지 적인 요소를 사실주의와 혼합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쇼는 처음부터 사실주의 극의 관례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역설적으로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인습적인 이들에 의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현실에 대한 접근을 더 용이하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 극을 통해 쇼가 형상화하고 있는 영국병은 무엇보다도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지 '환상으로 현실 가리기' 등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산만해 보이는 몬스터의 등장이 극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지는 않다.
처음에 강도로 등장하는 오브리는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 질병을 보여준다. 오브리는 19세기 말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 풍미했던 무신론과 과학적 결정론을 신봉하며 도덕적 엄격함을 강요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로 도피해 옥스퍼드 대학시절 성직을 받은 목사지만, 상속권 박탈이 두려워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칠 정도로 경제적 무능력자이다. 종교를 통한 오브리의 이런 현실도피와 현실에서의 경제적 무능성은 전쟁을 겪으면서 더 심화된다. 목사인 오브리는 조종사로서 전시에 민간인들을 폭격하여 훈장까지 받는 자기모순을 경험하고 극심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전쟁이 발발하자 신의 은총을 전해야 하는 성직자로서의 소임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전투기 조종사로서 학살의 매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오브리는 자이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병적인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는 요양원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간호사였던 스위티와의 만남을 숙명으로 여기고 현실로부터 더욱 도피해 강도가 됨으로써 타락하고자 했던 자신의 시도를 완결 짓는다. 오브리가 전후에 강도로서 무익한 삶을 사는 것은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그의 삶을 재개할 수 없을 정도로 전시 경험에 의해 뒤틀려 비이성적인 행동에 빠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인을 격추한 사실로 자책하는 오브리에게 "이봐, 그건 전쟁이었어.”라며 변명의 여지를 주는 하사에게 오브리는 단호하게 "그건 나였어, 하사, 나. 당신은 내 양심을 전쟁부분과 평화부분으로 나눌 순 없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살인을 할 인간이 개인적 목적을 위해 절도하는 걸 망설일 거라 생각하나?”라고 함으로써 해소될 수 없는 자책감을 토로한다.
마지막으로 쇼는 특히 전후 영국사회에 가장 심각한 결과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관객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영국병이 인습이나 경직된 사고에 집착해 환상으로 현실을 가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환자가 오브리, 스위티의 사주로 육체적 질병을 피해 간 곳은 환상이라는 또 다른 질병이 만연되어 있는 산악지방에 있는 바닷가이다. 이곳은 대영제국 원정부대의 주둔지이지만 햇볕 좋은 휴양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된 전후 영국사회를 축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납치된 숙녀를 산적으로부터 되찾을 임무를 띠고 파견된 원정부대의 수장 톨보이즈 대령은 군대의 규율과 계급상의 원칙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 원정군과 주변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해결 사는 그가 경멸하는 사병 미크이다. 영국인 숙녀가 산적에게 납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세 젊은이들이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니 결국 대영제국의 군대는 실체 없는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며, 톨보이즈가 적용하려는 군율이나 책무 자체도 적용불가능한 명분이 되어버린다. 판에 박힌 상례에 노예처럼 집착하는 톨보이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을 상징하는 인물로 외관상의 권위와 명분상의 작위만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 그는 수채화나 그리며 빈둥대는 인물로 군대지휘관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쇼는 주둔지에서 하릴없이 빈둥대지만 위기 시에 진짜 지휘관 역할을 하며 작전을 전개하는 미크 덕분에 톨보이즈가 훈장을 받는 이이러니 컬한 상황을 극화하면서 무너져가는 대영제국이 환상으로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쇼는 3막의 공간적 배경을 모래와 돌들 가운데 작은 천연동굴이 여러 개 있는 해변의 황량한 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세인트 폴즈'와 '사랑의 거처' 라 명명된 두 동굴을 주된 무대로 하고 있다. 이 두 동굴의 이름을 통해 쇼는 당대 영국사회가 매달리는 가장 큰 환상이 종교와 사랑임을 시사하지만, 그는 이 두 동굴을 황무지와 같은 곳에 배치함으로써 전쟁 이후 두 동굴이 나타내는 가치가 이미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세인트 폴즈'는 오브리의 아버지인 노인이, '사랑의 거처'는 하사가 점하고 있으며, 3막이 되어서야 처음 등장히는 이 두 인물은 두 동굴이 나티내는 영국병의 양상, 즉 종교와 사랑에 대한 환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사는 어딜 가든 성서와 버니언(Bunyan)의 『천로역정』을 휴대하는 종교적인 사람이지만 두 책에서 그려지는 상황이 실제 삶과는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아 거기 나오는 내용을 믿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종교가 실제 삶과 무관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이런 믿음은 전쟁으로 흔들린다. 전쟁으로 하사는 자신이 신봉하는 성스러운 책의 내용이 현실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여기서 하사의 혼란은 그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현실이 아니라 여겼던 종교적 진술들이 전쟁으로 인해 현실로 드러났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사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종의 이상주의로, 현실을 가리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정반대 쪽에 있는 무신론자인 노인은 전후 세계를 비판하는 지식인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는 뉴턴의 결정론적인 우주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우주 앞에 무너진 현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 오브리의 아버지인 노인은 결정론적 과학에 대한 믿음이 깨지자 극도의 혼란에 빠져 심한 절망감을 드러낸다. 쇼는 이 인물을 통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과학적 현실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한 빅토리아 지식인을 풍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앙심 깊은 종교인인 하사와 무신론자인 노인은 외관상 정반대의 상극에 놓인 것 같지만 두 사람 모두 환상으로 현실을 가림으로써 당대 사회가 영국병을 앓으며 표류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 극에서 쇼가 비난하는 영국병인 또 다른 환상은 결혼으로 귀결되어 가족을 이루는 사랑이다. 무엇보다도 환자인 모플리 양이 육체의 질병을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은 오브리에 대한 사랑의 환상이다. 환자는 오브리로 인해 병실을 탈출하지만 곧 그녀는 육체의 질병이 가져온 무력한 삶에서 사랑의 환상이라는 또 하나의 병적 상태로 옮겨간 것뿐임이 드러난다. 그녀는 오브리와 찾아간 야생의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돈으로 유지되는 쾌락적인 삶만 있을 뿐임을 깨닫는다. 환자와 달리 호텔 객실하녀 출신인 스위티는 한 남자와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며 늘 새로 만남으로써, 남자들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는 성적 인습에서 벗어난 인물처럼 보인다. 문제는 성에 관해서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스위티가 마지막에 자신과 같은 계급의 하사와 인습적인 결혼을 택함으로써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해서 환자보다 더 보수 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족애가 하나의 환상임은 환자의 어머니 모플리 부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부인은 납치되었다고 여긴 딸을 찾아 원정부대가 파견된 먼 곳까지 찾아오지만 사실 그녀는 과도한 보살핌과 의학적 처치로 자신이 사랑한다고 여긴 자식들을 다 죽음에 이르게 했고 하나 남은 딸마저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든 장본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했단 말이에요. 세상은 전혀 그들이 그렇다고 말한 것과 같지 않아요. 난 전혀 그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와 같지 않았어요. 난 내가 그런 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란 그녀의 절규에서 알 수 있듯이 모플리 부인은 자식 양육에 대해 그녀에게 강요된 문화로 인해서 "어버이로서의 강박충동”을 가족애로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거짓말, 즉 환상으로 밝혀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 쇼는 『바르게살기엔 너무 진실해』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연되었던 영국병을 육체적 질병,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 병, 현실을 가리는 환상 등 세 가지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쇼는 이런 질병의 치유에 대한 비전을 환자를 중심으로 제시함으로써 다소 산만한 이 극의 구성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사치품으로 가득 찬 침실에서 누워있는 환자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는 손끝 하나 까닥 못하는 응석받이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의 문제는 지나친 보살핌이며, 그녀의 치유를 위해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선한 공기와의 접촉이다.
자신의 진주목걸이를 훔치려는 강도 오브리와 간호사 스위티를 공격하는 것이 환자의 첫 액션이다. 보석함이 있는 화장대를 지키려는 환자의 적극적인 행동의 묘사는 그녀의 육체적 질병이 얼마나 현실성이 결여된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입증한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침대에서 튀어나와 적극적으로 오브리와 스위티를 제압하는 환자의 모습을 동해 쇼는 역설적으로 전후 대영제국이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환상에서 깨어나 행동해야 함을 시사한다. 오브리는 저항하는 환자에게서 보석을 훔치는 대신 그녀 스스로 합류하도록 전략을 바꾼다. 그는 보석을 지키려고 처음으로 육체적 에너지를 쓰고 탈진했다가 깨어난 환자에게 지금까지 그녀가 보낸 무력하고 비참한 삶을 상기 시키면서,자연에서의 낭만적 삶을 즐기며 전혀 다른 활력 있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치유를 위해 환자 스스로 육체의 질병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오브리가 제시하는 삶은 쇼가 당시 젊은이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빈둥거리지 말고 목적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야 무력한 삶에서 구원될 수 있다고 히는 것이다. 환자는 점점 무력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흥분하고, 납치 극을 꾸며 어머니로부터 몸값을 받아내자는 강도의 제안에 극도의 흥분감을 표출한다. 이때, 처음에는 부풀어 죽어가는 형상이었던 몬스터가 우이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등장해 보석을 위한 싸움이 그녀와 자신을 치료했음을 선언한다. 결과적으로 환자의 적극적인 행동이 자신의 질병은 물론 세균인 몬스터도 치유한 것이다.
환상을 벗어나 현실을 추구하는 환자의 여정은 자신을 병상에 뉘어 놓고 모든 것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압제적인 보호로부터 벗어나는 내부로부터의 반란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 반란은 결과적으로 이 인물이 쇼가 경멸하는 할 일 없는 무력한 부자의 운명으로부터 탈출했음을 의미한다. 의기투합한 세 젊은이가 보석을 가지고 달아날 때 오브리가 환자에게 “당신은 뜻밖에 강력한 정신을 소유했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쇼는 이 극에서 영국병을 치유할 강한 정신적 능력을 환자가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환자는 오브리, 스위티와 함께 찾아간 열대 휴양지 같은 영국군 주둔지에서 원주민 하녀로 변장하고, 강건한 여성으로 거듭난다. 야생 생활을 통해 그녀는 육체의 질병을 포함한 과거의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야생 생활에서 환자는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자연과의 교감을 경험하고, 우주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혐오하고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진정 의미 있는 삶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유한 상류층 숙녀였던 환자가 원주민 하녀가 되고 천한 스위티가 공작부인이 됨으로써 두 여성은 "문화적 타자”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스위티는 귀부인으로서는 따분한 대령이나 상대해야지 마음이 가는 하사 같은 이는 상대할 수 없기에 삶의 활기도 재미도 누릴 수 없음을 토로하는 반면, 환자는 하녀로 가장한 이상 자유를 누릴 수는 있지만 인습에 매여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환자는 오브리에 대한 사랑으로 떠나올 수 있었지만 집을 떠남으로써 버렸다고 생각했던 상류층 도덕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꾸미지 않는 솔직함을 스위티 같은 하층 계급으로부터 배워야만 환상을 깨고 좀 더 현실에 다가갈 수 있지만, 숙녀의 외관을 벗어도 결코 숙녀의 의식과 취향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녀가 처한 딜레마이다. 물론 환자가 원하는 것은 스위티가 추구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방종이 아니다. 사실 환자는 떠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오브리에게 반한 사랑이 꿈, 즉 환상이며 자신이 제공하는 금전에 의해 둘의 관계가 유지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제 환자는 어떤 행동도 없이 말만 하며 현실 직시를 거부하는 오브리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환자는 그녀의 돈으로 살면서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하는” 오브리에게 싫증나서 그가 제공할 수 없는 "분별 있는 어떤 걸” 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환자는 변화의 기미를 드러내며, 궁극적으로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질병으로부터 진정 치유될 수 있는 희망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환자는 병든 영국을 떠나 모험을 찾아간 야생의 자연에서 영국의 또 다른 병적 양성을 경험하게 된다. 대영제국 원정부대 지휘관인 톨보이즈가 강조하는 대영제국의 분위기는 실행력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공작부인을 안다는 사람을 만났다는 톨보이즈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환자에게 오브리는 세상이 거짓말, 즉 환상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으며, 본국의 병실에서 탈출해 현실을 찾고자 했던 환자는 대영제국 군대가 주둔하는 야생의 자연에서도 현실을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모험 역시 가짜, 즉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톨보이즈는 환자와 달리 아직 대영제국을 대변하는 자신 같은 인물이 현실에 대한 이해력이나 장악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쇼는 수채화에 전념하기 위해 원정대의 지휘를 자신이 조롱했던 미크에게 맡기고, 미크가 쌓은 공적으로 아내를 위해 훈장을 받는 톨보이즈를 통해 모든 것이 거짓, 즉 환상에 의해 유지되는 영국병의 정점을 보여준다.
반면 환자는 비로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대영제국은 물론 영국 지배층의 의식을 구속하고 있는 빅토리아 주의가 현실대처능력이 없어서 사회 자체를 환상으로 유지시키는 빈껍데기임을 인식하게 된다. 환자가 오브리를 거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이후 영국을 떠받들고 있던 사랑과 종교라는 대표적인 두 환상을 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 부자들이 비참하다는 건 몰랐어요. 내가 비참하다는 건 몰랐어요. 우리 체면이 건방진 속물근성이며, 우리 종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이며, 내 영혼이 그것들로 굶주리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라는 환자의 자기고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통해 환지는 부유한 상류층 숙녀였던 자신이 속물적인 계급의식에 젖어있었음을 밝힐 뿐 아니라, 전쟁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의미 있는 행동은 못하고 설교만 하는 목사 오브리가 그녀에게 기식하는 환상제공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당시 영국사회에서 종교가 얼마나 이기적 탐욕의 소산인지도 알게 된다. 또한 오브리가 그녀에게 제공한 낭만적 사랑의 환상 역시 기식자들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짓이었음을 인식한 그녀는 마침내 어떤 질서나 목적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정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구현하고자 한다. 특히 “사랑은 사람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빠지게 하죠. 내게 더 이상 연인은 사절이에요 난 여성동지관계를 원해요”라고 함으로써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는 대신 자신과 같은 의식을 지닌 여성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 건설의 소망을 피력한다. 이런 그녀의 소망은 산적에게 납치되었다 여기고 딸을 찾아온 어머니 모플리 부인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실현 가능성올 보이게 된다. 모플리 부인이 산적으로부터 딸을 구하지 못하고 직무유기를 했다며 집요하게 쫓아다니자 수채화를 그릴 수 없게 된 톨보이즈는 참지 못하고 우산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친다. 이로 인해 모플리 부인은 지금까지 그녀를 지배했던 빅토리아 주의의 성과 가정의 가치가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모플리 부인은 톨보이즈의 갑작스러운 일격으로 그간 자기정체성을 잃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환상이 자기 삶과 가족관계를 얼마나 무의미하게 만들었는지 깨닫는다. 그녀는 머리를 맞음으로써 비로소 지금까지 현실을 가렸던 환상에서 깨어나 딸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해방된 딸에게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자신도 스스로 환상에서 해방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포함해 가족에 대한 희생을 여성의 최고 미덕으로 여겼던 빅토리아 시대의 가족애에 대한 강요된 내재화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 모플리 부인은 비로소 환상에서 깨어나 변화된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건강해진 환자에게서 끝없는 보살핌을 요구했던 응석받이 병자가 아닌 환상에서 깨어나 의미 있는 삶을 함께 할 동료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 환자는 무서운 전쟁을 겪은 후 환상으로 현실을 은폐하며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하릴없이 불안감에 빠지거나 극단의 쾌락주의에 탐닉하던 전후 젊은 세대들의 질병을 극복함은 물론, 환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달은 어머니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여성동지가 된 것이다. 쇼는 비록 그것이 작은 시험적 관계에 불과하지만 이런 모녀의 유쾌한 동맹을 통해 영국병의 치유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다.
쇼가 이 극에서 육체적, 정신적 측면에서 질병을 앓고 있는 전후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환자와 오브리 중에서 환자를 통해 전후 영국병 치유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브리의 긴 설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오브리는 전쟁 이후 몸과 영혼이 벌거벗은 현시대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전쟁이 이런 현실 인식의 계기가 되었음을 고지한다. 여기서 오브리는 전쟁이 그동안 이상주의 내지 외관 밑에 숨겨져 있던 삶의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어 그걸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조차도 영혼의 벌거벗음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강한 회의를 드러낸다. 그의 설교가 시작되자 모두 놀라 달아나는 것을 통해 당대 영국인들이 얼마나 현실을 피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문제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오브리 자신이 전쟁으로 인해 상실된 모든 표준이나 신조를 대신할 새 가치나 신념을 전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쇼는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오브리가 설교를 하는 동안 바다안개가 짙어지면서 보이지 않게 되고 그의 목소리만 남아 있는 것을 극화함으로써 이 인물이 설교 후 익사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오브리의 말이 아닌 쇼 자신의 말로 이 극을 끝맺음으로써 쇼는 결국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쇼는 실제 생활에서는 무능한 남성으로 말만하는 오브리 같은 지성인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통해 혼란스러운 전후 시대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환자가 행동하는 여성으로서 영국병을 치유할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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