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13세기 루마니아 설화를 바탕으로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1895~1961>가 전설의 건축 마스터 마놀레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작품의 주요 배경인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은 루마니아 중세 왕들의 지하 분묘가 있는 신성한 곳으로서, 동방정교회 건축물의 백미를 엿볼 수 있는 루마니아 주요 유적지 중 하나다. 또한 이 수도원 근처에 이제는 관광 명소가 된, 마놀레의 죽음과 관련된 샘터가 있다.
설화에 의하면, 발라치 공국을 세운 초대 왕 네그루 보더 (Negru Voda, 재위 1241~1265)는 도나우 강의 한 지류인 아르제슈 강 근처에 아름다운 수도원을 건립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수도원 공사가 원래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아, 마놀레와 석공들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들은 결국 전무후무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인간의 희생이 필요함을 느끼고, 가족 중 가장 먼저 공사 현장에 나타나는 이를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마놀레의 바람과 달리 그의 아내 아나<Ana>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하자, 그는 신에게 애원하며 자신의 아내가 오던 길을 되돌아가도록 부탁한다. 신이 일으킨 비바람과 돌풍도 아나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해. 결국 아나는 신의 품에 안기고 만다.
작가는 이 중세 설화를 자신만의 문체로 각색했다. 우선 이 작품은 13세기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현재의 아르제슈 수도원을 세운 발라치 공국의 왕 네아고 바사라브 (Neagoe Basarab. 재위 1512~1S21) 시대를 중첩시켜 보이고 있다. 발라치 공국과 아르제슈 수도원이 루마니아 역사와 문화에서 갖는 의미가 작지 않아 블라가는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적, 문학적 정통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특히 이 작품은 인신공희가 신의 계시를 받드는 스타레츠를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서 종교적 신비감을 더했다.

마놀레와 석공들은 성당을 완공하기 위해 가족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여겨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맨 먼저 공사 현장에 도착하는 여인을 신에게 바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마놀레의 아내 미라(Mira)는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채 남편이 억울한 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막고자 험난한 여정을 무릅쓰고 건축 현장에 도착한다. 이는 남편의 손에 신성하지 않은 피를 묻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미라는 이러한 자신의 숭고함이 정작 자신을 희생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마놀레는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도원이 완공 된 뒤 맨 먼저 종탑에 올라가 종을 치는데. 황홀한 건축물을 시기 질투한 신하들에 의해 그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마놀레는 아내에게 다가가고자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지만,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이카루스처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건축 마스터 아놀레가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샘물이 솟아났다.
이처럼 블라가는 건축 마스터 마놀레를 통해 완벽한 건축물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열정과 소중한 아내를 지키려는 남편의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 과연 이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 신, 아니면 신의 대리자인 사제? 마놀레도 자문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신이 직접 인간을 파국으로 모는 무모한 죄악을 유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악한 신에 의해 마놀레가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인신공희라는 제의적 굴레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기반과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일부 부도덕한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처럼 하늘과 땅, 신과 인간, 또는 왕의 명령과 부조리한 종교적 제의 사이에서 주인공 마놀레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설화가 루마니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다른 여러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만큼, 이 마놀레 설화는 영원불변한 작품을 남기려는 인간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인신공희 제의는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에밀레종>과 <무영탑> 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에밀레종이 어린아이의 희생을 통해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청아한 종소리로 승화시킨 것이라면, 무영탑(無影塔)은 남편을 기다리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의 넋을 기리려는 아사달의 예술혼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 설화들은 역사적, 과학적 진위 여부를 떠나, 유형한 문화유산에 인간의 혼을 불어넣어 예술성과 영원불멸성을 동시에 추구한 숭고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현대 종교학의 거성인 엘리아데는 자신의 저서 《상징, 신성, 예술》에서 블라가의 마놀레를 언급하면서 설화가 갖는 고유한 민속적 영감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작가가 설화를 자신만의 예술적 감성으로 재해석하거나 왜곡시키기보다는 설화가 갖는 '환상적 실재(fantastic reality}'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설화 속의 환상은 시간이 변한다 해도 설화 속 환상의 실체가 갖는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미라의 영혼이 아르제슈 수도원에 깃들어 마놀레, 사제, 작가,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가치들이 영원한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처럼….

작가소개
철학자, 신학자, 시인이자 극작가인 루치안 블라가는 서방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루마니아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895년 루마니아 세베슈 인근 도시 란크럼(Lancram)에서 태어나 1920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바르샤바, 프라하, 빈, 베론, 리스본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들어 실존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30여 년 동안 문화 및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루마니아 문화의 정체성과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자 노력했다. 1937년 루마니아 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9년에는 클투지 대학 문화철학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그는 문학인으로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정부의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특히 1956년 미르치아 엘리아데. 바질 문테아누, 로사 델 콘테 등 서방세계에서 활동하던 문학인들의 도움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스웨덴에 특사를 파견하면서까지 이 작가의 노벨상수상을 저지하고자했다. 블라가가 자신들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에 반(反)하는 관념론적 문학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블라가는 1961년 사망할 때까지 서정시만 쓰게 되는데, 이마저도 당국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고 말았다.
주요 작품으로 철학서 《인식의 3부작》, 《문화의 3부작》, 《가치의 3부작》, 시집 《가장 슬픈 별》, 《루마니아 시골 예찬》, 《루치안 블라가 또는 땅과 별들의 노래》, 《예언자의 발소리》, 《열망의 뜰에서》, 희곡 <잘목시스, 미스터리한 토속신앙> (1921), <소용돌이치는 물>(1923), <건축마스터 마놀레>(1927), <아이들의 캠페인>(1930), <아브람 장쿠>(1934), <노아의 방 주> (194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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