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월초 깊은 밤, 서울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승만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에 보낼 훈령을 작성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휴전협정을 목전에 둔 이승만은 비장한 각오로 국군이 유엔군에서 철수하고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결의를 백악관의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밝히는 내용이다. 이튿날 당황한 미국은 즉각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브릭스 주한대사를 경무대에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려 한다. 미국이 참전 16개국과 더불어 대제제선언을 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 규모를 증강하여 대북 억지력을 제공하며 동시에 안저스조약에 한국을 가입시키겠다는 것을 골자로 이승만을 회유하나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만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
이어서 이승만은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남한의 단독 행동 결의를 다지는 한편 헌병사령부를 동원하여 반공포로석방 작전을 계획한다. 드디어 6월 18일 새벽에 남한 7개소에 수용되어 있는 2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기습적으로 탈출시키는 작전을 감행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휴전협정을 서두르던 공산측과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그전부터 쿠데타를 종용하여 이승만을 축출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할수없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로버쓴 국무차관보와 콜슨 미 육군참모총장을 파견하여 장장 18일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드디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에 합의하게 되고 무려 3년여를 끌었던 6.25전쟁은 7월 27일에 종전하게 되고 8월 8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기에 이른다.
「6.25전쟁과 이승만」은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가던 1953년 6월에서 그해 11월까지의 6개월간 서울의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무대로 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연극의 특성상 대통령 집무실 한 곳으로 장소를 제한하였으나 일상적인 대화나 장면의 연속성을 위한 부분적 설정을 제외한 나머지 중요한 행위와 발언들은 모두 최근까지의 연구서, 논문, 전기, 회고록 및 여타의 기록물 등에서 발췌, 인용한 것들로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였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족적 수난사였으며 불과 60년전의 일로서 당시를 직접 경험한 생존자들도 다수 존재하는 우리의 최근세사이기 때문에 이를 연극으로 꾸민다고 했을 때에 허구를 용납할 여지는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도 6.25의 영웅인 백선엽장군 같은 분은 아직 생존해 계시다. (다행히 직접 만나 뵙고 미리 대본도 보여드리고 감수를 받기까지 했다) 따라서 실존 인물들의 언행은 신빙성 있는 기록에 충실했으되 다만 비서들의 경우는 개인으로서라기보다 객관적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만 3년을 넘게 지속된 전쟁의 과정 중에서 휴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6월 18일 일요일에 이승만의 용단에 의해 2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시킨 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마침 휴전협정 체결을 서두르던 미국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벼랑끝 외교전술로서 미국으로하여금 한사코 주저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유효한 압력 수단이었다. 이승만이 휴전협정 체결을 무시하고 어떠한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런지 예측할 수 없었던 미국은 마침내 그해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가조인했으며 이는 이후 한국의 방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이 유지 발전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경이적 경제발전과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정치적 민주화는 한국민의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시켜주었으며 이제 대한민국이 당당히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신생 대한민국이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이승만의 영도하에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4.19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며 재임시 국민방위군 사건 등 많은 과오 때문에 빛이 가려지긴 했으나 그가 이룬 공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교육의 확산과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장려는 5.16 이후 삼성, 현대, LG 등의 초일류 기업의 출현을 예견케 했으며 일찌기 원자력 기술의 도입을 추진한 것은 그의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은 오랫동안 사회주의적 편향성을 보였던 한국 지식인들의 시각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분단과 6.25 전쟁에 대한 이른바 수정주의적 사관과 해석을 뛰어넘어 이제 탈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의 비중과 위상을 균형 있게 재정립하기 위한 학술적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 연극은 이 같은 변화된 시대 분위기에 발맞추어 6.25발발 60주년을 맞이하여 6.25 전쟁의 의의와 이승만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를 일반에 널리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삼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이 연극이 쓰여지기까지 많은 자료와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중에서 특히 연세대의 유영익교수와, 성균관대의 고 김일영교수 그리고 충남대의 차상철교수의 연구 논문이 큰 도움이 되었슴을 밝힌다.
끝으로 이 연극의 주제를 한마디로 웅변한 백선엽장군의 증언을 아래에 인용한다.
“인사에는 등신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말이 이 대통령에게 늘 따라 다녔지만 반공포로 석방에서 휴전조인까지 약 한달간이야말로 이 대통령이 외교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해 혼자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외롭게 투쟁하며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쟁취해 낸 극적인 기간이었다 해도 조금의 과장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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