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영근 '유전무죄 무전유죄'

clint 2023. 5. 11. 08:31

 

이 연극은 3막으로 나누어진다,
각막은 연광성이 있으며, 극의 장면이 나오는데 있어 무대공간을 몇개의 부분으로 처리하여
이용하였으며 최대한 표현의 특징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1988년 10월 8일 오전 9시30분경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과 광주 교도소로 이감중이던 미경수 지강현 등 12명일 중부 고속도로 일중 인터체인지 3킬로미터 못미친 지점에서 호송버스를 탈취, 다시 서울로 올라와 11시 50분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시 공무원 앞길에서 버스를 버리고 달아난 재소자 탈주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힘 없고 돈 없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무자비하다는 권력의 생리를 극명하게 표현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일부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며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 9일동안 인질, 납치극을 벌인 탈주범들은 마지막 지가헌, 강여일, 한의철, 안과술 등 4명이 한 서민 가정의 식구들을 인질로 삼아 경찰과 대치 끝에 권총자살 등으로 처참하게 막을 내리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지가헌은 시인이기를 자처했다. "나는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작가의 글/ 김영근
12명의 집단 탈주범 사건은 모든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준 전대미문의 희귀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만 1년이 흐른 80년대 역사에 묻혀질 사건이지만 아직도 잡히지 않은 김길호의 행방은 신화로 남을 수도 있을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둘레의 평범한 삶을 지내온 우리네 사람들이 사회와 법이라는 체계 속에서 상반된 길을 밟게 될때, 진정한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돈, 권력이 아닌 진정한 진실로 우리네 사람들이 아름다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충격과 혼란보다는 맑고 깨끗한 인간애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했으면 합니다.

 


작가 김영근(1965년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86년도에 군입대를 함과 동시에 86년 동서문학 희곡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군복무제대를 함과 동시에 한달 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이근삼교수의 심사평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대사의 끈질김과 이미지가 특이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중 인물이나 사건개요, 무대설정 등이 사실적인 언행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작품도 상징이나 은유법 같은 모호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명확한 것이다. 특히 실제 있었던 탈주사건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상황을 꿰뚫는 직접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상습적으로 발설되는 결직한 욕이나 은어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신인 작가로서 현실사회의 그늘진 삶들의 진솔한 면을 무대언어로서 예술성 높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사건 전모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본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 하지만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되는데, 알려진 것만 70여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의 막내동생)은 겨우 7년(실제론 3년 3개월 만에 풀려남)을 선고받은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한 것이다. 나중에 탈출 과정에서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하면서 흉악범이 되긴 했지만 맨 처음 교도소에 수감됐을 땐 흉악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은신처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7] 고모 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전국에 생중계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사살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자살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생존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자살
인질로 잡혀있던 고 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바로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하여 실랑이를 벌이다가, 낮 12시경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호송교도관 김○○ 교사(당시 54세), 김○○ 교사(당시 36세)[8]의 총을 빼앗아 각각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시도 직후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으로 진입해 인질로 잡혀있던 가족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리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기도를 하는데 이를 지켜본 인질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가 인질이 위험한 걸로 판단하여 즉각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에게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하였으며 몇 시간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도 못받고 사망했다. 당시 '홀리데이'를 요구한 지강헌의 요구에 경찰이 실수로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를 전달했다가 급하게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다시 전달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단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지강헌이 들었던 노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맞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질 때 지강헌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당시의 방송 녹화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10]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당시 인질 및 경찰들이 증언한 바로는 그들은 예상 밖으로 대단히 신사적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방송'이었지 '탈주'가 아니었다. 사실 지강헌 일행은 숨어 살다가 집주인이 몰래 도망친 탓에 인질극을 벌인 것이고, 그러다 보니 방송을 탄 것이다. 지강헌의 노트 그리고 인질극을 벌이기는 했지만 범인들은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금방 끝날테니 이해해달라." 면서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인질들을 배려하려 했다.

 

실제 사건의 사진. (총을 든 남자가 지강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