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미현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

clint 2023. 5. 9. 09:08

 

낚싯대는 집 담벼락과 대문에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쳐 놓는 폴리스 라인 테이프와 접근금지 테이프를 마구잡이로 둘러쳐 놓았다. 낚싯대가 다른 세입자들이 자신의 집을 보러 왔을 때, 겁을 주기 위해 미리 쳐놓은 것들이다. 나름 위장전술인 셈이다. (낚싯대는 이미 백발이 되어버린 한 집안의 가장이다.) 아주 오래 전에 경복궁에서 쌍화탕을 돌리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여관방에 간 게 낚싯대의 첫 동정이며 그 이후 낚싯대는 아들 군복을 낳았고, 그 뒤로 한참 후에 딸 비만을 낳았다. 경복궁에서 만난 쌍화탕을 돌리던 여자는 군복을 낳은 후, “꼭 피멍을 쏟아 놓은 것 같네"라고 하며 집을 나간 후, 몇 년만에 다시 집에 돌아와 두 번째 아이 비만을 낳고서도 "다시 한 번 피멍을 쏟아 놓은 것 같네"라는 말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현재는 북한산 밑자락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케토톱을 붙여주며 영감들을 꼬시는 늙은 꽃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낚싯대의 가족은 2년 전부터 집주인 할머니와 한 방에서 함께 살고 있다. 집주인 할머니가 치매증상이 심해져서 월세 받으러 왔다가 낚싯대 집에 눌러 앉게 된 것이다. 낚싯대는 집주인 할머니(불 쬐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을 큰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월세를 꼬박꼬박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집주인 할머니는 정신이 나간 이후부터는 불장난에 재미를 붙여, 이쑤시개나 면봉, 양말 같은 것을 요강에 넣고 끊임없이 태운다. 낚싯대와 비만은 집주인 할머니가 그렇게 불장난을 하다가 홀라당 집을 불태울까 걱정을 하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치매에 걸려 불장난을 좋아한 집주인 할머니는 군복이 사다 놓은 부탄가스를 요강에 넣고 불을 붙이는데.......


작품은 윤미현 작가가 쓴 작품이다. 부조리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터전을 지키거나 만들려고 악다구니를 쓰는 가족들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연극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는 제목과 달리 실제로 빨간 여자가 등장하진 않는다.  
작품은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가정을 꾸렸고 그 가족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와 결혼한 남자 그리고 자녀들이 이 사회에서 집을 쟁취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한 가족이 자신들이 살 집을 쟁취하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가족은 월세를 내기 어려워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월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가족들은 할머니를 집에 잡아둔다. 그리고 집 앞에 폴리스 라인을 쳐두고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한다. 살인이 일어난 집이라고 소문을 내서 사람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할 계획도 세운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망상에 시달릴 때면 할머니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치욕스러운 행동도 마다하지 않고 놀아준다. 가족의 행동은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외부 사람들이 자신들을 멀리해야 한다며 씻지도 않고 구질구질한 상태로 산다. 딸은 이미 때가 꼬질꼬질하고 벌레가 꼬일 것 같은 모습이다. 씻지 못한 몸은 소주를 넣은 분무기로 해결하는 식이다. 게다가 할머니의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맞장구를 치며 그 망상을 이뤄주려고 하는 모습도 치열하게 진행된다. 할머니가 치매에서 깨면 월세를 달라고 할 테고 자신들의 상황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할머니의 기억이 현재와 멀어지게 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확실히 이들 가족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을 넘어서 악랄해 보이고 괘씸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극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치졸하고 자존심 다 구기고 악랄해 보이기까지 해 보이는 이들의 행동이 이상하게도 전혀 혐오스럽거나 불쾌하지 않다. 집을 사수하기 위해서 지질하게 노력하는 가족의 모습이 불쾌하기 보다는 안쓰러워보인다. 그러면서 기가 막히게 웃음을 유발한다. 작품의 힘은 삶의 부조리를 기발한 역설로 풍자했다는 점이다. 
비만인 딸과 군대 전역한 아들, 그리고 빨간 여자와 결혼한 이 남자는 치졸해지고 자존심을 굽히고 악랄해지고 악다구니를 쓰는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삶의 부조리들이다.  작품이 극에 달할수록 주인공들은 악랄해지고 관객이 맞닥뜨리는 것은 더욱 악랄해진 현실이다. ‘웃픈’ 현실에 한참을 낄낄 거리다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이들 가족들이 저질렀을 때 가족에게 돌을 던질지 아니면 집 사수에 응원을 보낼지는 관객 몫이다.

 



생존의 공간을 갖게 된 가족들은 입을 모아 동요 '꽃밭에서'를 부른다. “나~를 보며 꽃같이 살자 그랬죠. 그렇다. 이 가족은 꽃같이 살고 싶었던 것이다. 뿌리 내릴 곳만 있다면 순순히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삶,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살기 위한 한 줌의 땅.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겐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한 줌의 땅, 생존의 땅.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는 꽃처럼 살고 싶었던 가족이 벌이는 한 줌의 땅을 얻기 위한 전복적 반란이자 처절한 사투이다. 땅에서 점점 분리되어가는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다 뿌리를 내릴 것인가? 뿌리를 내릴 수나 있을까? 관객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처럼 무거운 질문을 안고 돌아갈 듯하다. 비록 빨간 여자가 끝끝내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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