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원범 '육시(戮屍)'

clint 2023. 5. 4. 15:32

 

이 시대의 우상 서향채가 콘서트 중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이는 범국민적 사건으로서 한 기자가 이를 추적한다. 사건을 맡은 검사를 찾아간 기자는 서향채를 추종하는 인구가 왕국 하나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데 대해 서로 반신반의한다. 이때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약혼녀를 납치당한 평범한 시민 정성만이 찾아와 애인 김영숙을 찾아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무력하게 꺾이고 만다. 서향채를 납치한 조직은 서향채의 팬클럽 <서서회>와 그녀를 우상시하는 사람들을 이용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정성만의 약혼녀 김영숙을 희생시킨다. 서향채는 조직의 목적을 위해 녹음을 강요당하고 점차 세뇌되어 간다.

과거의 사건1- 궁에는 왕건의 등극을 암시하는 내용의 소문이 장인에 퍼지자 왕건을 잡아들인다. 그러나 왕건은 모반자로서 자신을 용서한 궁예를 딛고 대세를 따라 왕위에 오른다.

과거의 사건2- 소설속에서 국가를 세웠다는 죄명으로 광해군은 허균을 육시한다.

서향채로 추정되는 머리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그녀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가 대중에 유포된다. 우상을 잃은 팬들이 아우성을 벌인다. 기자의 추적과 수사의 진전으로 조직은 흔들리고 내분된다. 스스로 우상이 되기를 꿈꾸는 조직의 우두머리 검사가 사체의 목을 조른다.

 

 

작가의 글 장원범

이 연극이 관객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끔찍함 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의 잔인함. 피가 되고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잔인함. 처음 이 작품을 쓰려고 했을 때 느꼈던 끔찍함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은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작품을 쓰면서 몸서리도 칠만큼 친 탓일까? 이젠 별로 끔찍하지 않다. 사람의 감각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여기서 끔찍한 그 자체만을 보여주자는 것은 아니다. 관객 여러분이 더 잘 알겠지만 끔찍함을 넘어서면 뭔가가 있지 않을까? 끔찍함으로 갈라진 마음의 틈바구니로 새롭게 세상이 보일 수 있을까? 나도 그것을 보려고 무지 노력했는데 쉽지 않다. 아마 공연으로 나타날 때는 다를 수도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분명한 것은 100년 전에는 이런 형벌이 이 땅에 있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죽어간다. 교통사고로 생중계되는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처참하게 찢겨져 죽는다. 그렇다고 해서 끔찍한 연극을 공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요즘 같이 잔인한 세상에 잔인함이 효과가 있을 것인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극장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본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고쳐졌다. 아예 집어 던지고 얘기하려고도 여러 번 마음 먹었다. 글을 잘 쓰지 못해 그렇겠지만, 기억이 정확하다면 13번을 고치셨다. 그것도 문장을 정리하거나 한 장면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앞에 쓴 대본을 모두 집어 던지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백지상태로 다시 쓴 것만해도 5번은 된다. 고개를 5번 넘으면 무엇이 남을까? 여우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서 우리를 흐린다. 그러고 보면 원래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디로 가버리고 끔찍함만 남지 않았나 한다. 작가가 이렇게 헤매고 있으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어떠했을까?

 

 

산업화 시대가 가고 민주화 투쟁시기도 간 뒤 확실히 1990년대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다. 이 시대에는 낡은 것이 좋다는 관념은 사라졌다. 오래된 냉장고나 가구를 가보로 여기고 소중히 다루는 사람은 없다. 오래된 것은 나쁜 것이고 새로운 것이 좋다는 관념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멀쩡한 가구를 내다버리고 새가구를 들여놓는다. 누가 이것을 조작해 내는가? 대표적으로는 물건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꾸 우리의 귀에 대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속삭인다. 새로운 디자인이에요. 새로운 기능이 부가되었어요. 신기술로 만들었어요. 신제품이에요. 오래된 것은 버려진다. 쓰레기 더미에 쌓인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야로 오래된 것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오래된 것 중에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것이지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역사상 지배자들이 통치이념으로 활용하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느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내려왔다느니 하는 식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상황을 바꿀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이 상황을 바꾸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소비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외칠 수도 없다. 우울하게도 우리는 이런 세계 속에서 죽도록 살다가 가는 길이 최선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자각하면서 말이다. 만약 지식인들이 소비사회의 침공을 자각하고 그것에 명민하게 대응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나타나고 있는 소비사회의 징후가 과연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신은 없고 사물만이 지배하는 사회, 갈가리 찢어져 나부끼는 정신. 이것이 유시가 아니고 무엇일까? 신세대, 신인류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의 어원은 분명하다. 새것이 좋다는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새로울 수 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새로울 수 있다. 신인류, 신세대라는 말과는 별개로 어찌되었건 새로울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장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극장에 오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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