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門짝만 한 훈장을 받아 가슴에 단 상이군인이 한 상류집에 초대되어 온다.
이 집의 30대 젊은 부부가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양주를 들이켜며 남자와 얘기한다. 훈장을 알아보고 그를 우대하는 것에 흐믓하다.
잠시 후, 요란하게 차려 입은 부인이 들어온다.
그들은 이 훈장을 단 사람한테 그의 무용담을 듣고 싶어한다.
그는 조금 색다르게 전쟁을 연극화 해서 하자고 하는데 이 연극의 주인공은 두 남녀란다.
자기는 필요한 때 조연으로만 출연할 거라 한다.
그래서 극중극 성격의 전쟁 연극이 벌어진다.
고대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선과 악의 전쟁이 펼쳐진다.
여자를 선으로, 남자를 악으로 상징하고 상이군인이 악을 뒤에서 조정하는
거악으로 남자를 충동하고 총칼로 무장시켜 세력을 넓힌다.
여자가 반대하자, 그녀를 보석으로 꾀어 철창에 가둔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그런 악이, 선에게 역공을 당하고 지구는 멸망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2막으로 넘어가면 이전 1막은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목발을 짚고 고의 구걸하다시피 사는 상이군인과,
역시 돈 없이 구걸하는 남자, 창녀로 등장하는 여자
역시 현실은 전쟁 후의 참담한 시가지를 보여주고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훈장 역시 아무 쓸모 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앞엔 다시 이러한 훈장의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다시는 이런 폐인이 생겨나는 비극이 없도록 다 같이 기원해야 하겠습니다.” 라고 객석에 말하고 퇴장한다.
박성재의 인간과 작품 - 유민영
극단 自由劇場이 연극의 고장인 유럽에까지 가지고 가서 공연한 「무엇이 될고 하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아마 그 원작자 朴星宰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朴星宰는 프로그램 정면으로 찍은 寫眞 1장 게재한 적이 없고 또 자기 작품에 대해서 구차한 說明 한 줄, 붙이지 않았을 뿐더러 公演주변에 버티고 서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날렵하지 못하고 非社交的이며 지나치게 겸손한 그를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劇作家이기 전에 現職 敎員이지만 그러한 냄새는 外貌에서부터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시골에서 밤새껏 완행列車를 타고 막 청량리역에 내린 農村指導所員 같다. 해장국에 막소주 한잔 곁들인 사람의 얼굴 같이 검붉고 털털한 것이 바로 박성재씨다. 그는 典型的인 韓國人이고 그것도 西歐化를 拒否하는 고집센 촌사람 같다, 또한 그는 新春文藝니 뭐니 하는 것을 애초부터 거부하고 직접 연극현장을 통해서 등장한 극작가다. 그러니까 당초부터 화려하고 냄새 풍기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 演劇界에서 그를 잘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안이하고 약한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한다. 파란만장한 그의 과거가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찍이 사범학교를 나왔음에도 편안한 보다는 험난한 극작가의 길을 들어섰던 그에게 기성演劇界는 좀처럼 문이 열리지 않는 하나의 영역이었고, 그에게 수많은 좌절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워낙 뚝심이 있었던 그는 굴하지 않고 관문을 뚫고서 登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그렇듯 作品도 그러하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란 作品 제목처럼 그 자신이 신세였고 작품도 각설이처럼 설움을 받았다. 양풍이 센 연극계에서 잘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古典的인 戱曲구조인 3部5端설을 거부했고 자유 분망한 드라마트루기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題材도 「배뱅이굿」「아리랑」「살풀이 春香傳」에서 보이는 것처럼 民俗的이고 土着的이다. 그러니까 거름이 썩는 냄새가 푹푹 나는 그런 作品들이다. 이러한 題材가 기성인들에게 잘 먹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찍이 吳泳鎭 선생에게 사사받은 그는 土俗의 世界를 통해서 韓國人의 存在樣相을 부각시켜 보려 노력했다. 그것도 上流이 아닌 庶民 내지 만초들의 삶의 實相을 假飾없이 드러내 보여주려한 것이다. 上流층에 의해서 빼앗기고 짓밟히고 착취를 당하는 賤民들의 삶과 죽음이 <무엇이 될고 하니>란 작품으로 表出되었고, <살풀이 春香傳>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民衆이 짓밟히게 놓아두지 않는다. 밝히면 밝힐수록 되살아 나는 들풀처럼 강인한 民衆의 意志와 抵抗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바로 그러한 作品이다. 그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 民衆의 기개를 작품을 통해서 표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자연 朝鮮시대의 여러가지 民俗이 素材源泉으로 취택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長柱이라든가 巫俗, 民謠 등이 素材로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져서 昇華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木下順二와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민중과 民族을 괴롭히는 세력에 反抗한다. 그는 淸國을 賣倒하고 日帝를 규탄한다. 자유분방한 드라마트루기와 풍자을 통해서 그가 부단히 부르짖는 것은 民衆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말이다. 확 풀어진 것 같은 그의 作品을 읽어보면 어느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외침의 소리가 있다. 이름 붙여 自己確認의 소리다.
그가 물론 傳統的인 것만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겪었던 이들의 아픔과 사랑의 그리고 있다. <大門짝만 한 훈장>이 바로 그것이다. 戰爭이란 무엇이고 勳章이란 무엇인가?
그는 끝없는 懷疑와 憤怒, 좌절을 작품을 통해서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多樣한 것이 특징이다, 素材도 그렇지만 主題도 그렇다. 가령 「山蔘」에서 보여주는 自然主義風의 人間虛慾 비판 같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作品을 어느 한 思潮에 묶어 넣을 수는 없지만 自然主義로부터 不條理에 이르는 매우 긴 흐름 위에 놓여있는 것만은 확실성 싶다.
작가의 글 – 박성재
오늘도 이 땅의 어디선가 포성이 하늘을 덮고 있다. 오늘도 이 땅의 어디선가 사람의 손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멀리하는 者, 나를 미워하는 者, 나의 뜻에 합당치 않는 者는 모두가 敵이다. 神이 나를 인정치 않는다면 그마저 나의 敵이다. <人間은 곧 宇宙理性의 種子이다. 모든 인간은 民族, 階級, 國家의 차별없이 人類라는 동일한 전체 속에 屬하는 世界市民이다>라고 人間은 人類에게 크게 선포하였다. 그러면서도 혼돈(混沌)자라는 이름을 붙여 칼을 들었고, 例外者라는 구실을 씌워 가슴팍에 銃口를 들이댔다. 내가 너를 사랑함에는 〈目的〉이 있다. 그〈目的〉이 그에게서 상실되었을 때는 敵으로서 지적을 받아야 하는 相對性이 불가피하다.
“내가 만나는 얼굴마다 슬픔의 그림자와 피곤의 빛” Wiliam Blake가 말하였다.
과연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 굳어진 창백한 얼굴들- 이것이 現代人의 生의 모습일 게다.
오늘도 이 땅의 어디선가 포진砲塵이 하늘을 덮고 있다. 오늘도 이 땅의 어디선가 사람의 손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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