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정선 '해질녘'

clint 2023. 5. 3. 07:48

 

어차피 생자필멸의 법칙 속에 우주로 사라져갈 우리에게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막이 열린다. 우리의 삶과 같이 텅 빈 무대-

여기에 젊은 남녀의 싱싱한 사랑과 두 노인의 잔잔한 사랑이 채워진다.

-봄날, 병원에서

생명이 약동하는 어느 화사한 봄날, 젊은 날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던 두 사람이

이제 노년이 되어 다시 만난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당신은... 이 봄처럼 아름답소"

당신은 수줍게 피어나는 노인의 세계에 슬쩍 다가간다.

-여름, 공원에서

멋쟁이 할아버지와 새침 떼기 할머니의 화려한 외출. 뜨거운 여름날의 설레는 데이트.

"기억하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이제 당신은 빙긋 미소와 함께 자신의 지난 날을 떠올린다.

한편에서 벌이는 젊은이의 사랑이야기는 직접화법이다.

그들의 사랑은 바로 SEX와 연결된다. "여관은 정말 싫더라. 냄새가 나잖아..."

-가을, 기차여행

긴 인생 여정처럼, 이곳에서 그곳으로 함께 기차여행을 떠나는 두 노인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고, 슬퍼하고, 어떻게든 애쓰는 내가 내가 없어져?

내가 휘익 거짓말처럼 사라진다구?"

당신은 이들과 함께 인생을 관조한다. 하얀 해골을 쓰다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봄, 기차역

어디 앉을 데조차 없는 허허로운 플랫폼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윈 몸을 기대고 황혼을 바라본다.

“이리 가까이 와 봐요. 우리의 그림자가 합쳐질 수 있게..."

당신의 얼굴도 붉은 노을에 젖고 사랑처럼…. 우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연극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질녘의 울림은 아직 가슴속에 메아리 치고

당신은 이제 깊은 눈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본다.

 

 

윤정선의 원작소설을 박상현이 각색·연출한 <해질녘>이란 작품은 원작소설(‘92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작)은 대화로만 짜여진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이미 그 자체로서 연극적 변형을 용이하게 해주며 무대 작업에 깊이 있는 그 때문에 <해질녘>은 두 노인의 사색적인 대화를 통해 인생의 황혼기를 깨닫게 만든다. 즉 사랑과 죽음, 그리고 운명과 고독의 실존적 의미를 진중한 올림으로 느끼게 만들면서 감동을 준다. 서로 사랑하던 두 젊은 연인이 어떤 오해로 헤어졌다가 인생의 만년에 다시 만나 나누게 되는 사랑의 무거움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감각적인 애정과 대비되면서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한다. 요컨대 이 연극의 주제는 "젊음이 알 수 있다면... 노인이 할 수 있다면"이라는 볼테르의 경구 한마디로 모아지는 셈이다. (이 대사가 나옴) 이러한 주제를 효율성 있게 전달하는 기법으로 인생을 '알고 있지만' 쇠잔해버린 두 노인과 인생을 알지 못하지만' 젊고 분방한 연인의 장면들이 오버랩 되어 펼쳐지는 연극적으로 재미를 더해준다.

 

 

작가의 글/ 윤정선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 되는 동물은 무엇? 스핑크스가 테베의 성문에서 오이디푸스에게 던졌던 이 유명한 수수께끼의 답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네 발로 기어 다니던 몸을 곧추 세우고 두 발로 버티는 낮을 지나면 자기 몸을 버티고 설 수 없는 저녁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캄캄한 죽음에 들기도 전에 모든 욕망의 세계로부터 밀려나 소외된 약자로 스러져야 하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약자를 경멸하고 단죄한다. 노인들, 결국 모든 인간이 겪는 좌절의 드라마 속에서 삶은 그 무참한 흰 뼈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함몰하는 자기자신을 떠메고, 생사의 교차점에서 고독과 실망과 좌절을 배우는 그들의 얼굴은 피로와 원한과 무력감으로 일그러지고 빛 바래어 간다. 그러나, 무너져 내리는 육신 속에 아직도, 아니, 이제야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심장이 있다면, 젊음이 감추고 있던 수많은 것들을 드디어 보게 된 아름다운 눈이 있다면 어떨까? 그 눈이 삶의 의미와 비밀을 비로소 감지하기 시작한다면? <기차와 별>에서 우주의 무한한 시간은 유한한 인간의 의식이 교차하는 절대의 화폭이다. 어쩌면 은하보다도 먼 자신의 과거인 아기를 뱃속에 품고 기차 속에 들어있는 젊은 아내 그리고 남편. 그들은 자기 존재를 가두고 또한 지탱하는 일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애착과 불안과 꿈으로 삶의 그물을 깁고 있지만, 그들이 몸을 싣고 있는 삶의 기차 또한 창밖 멀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고 있는 시공의 광대한 그물, 별들의 까마득한 전설을 담고 달린다.

복잡하고도 단순한 삶의 여정 속에 영원과 순간이 하나로 흘러 드는 우리의 존재의 뜻... 궁극적으로 이 삶과 죽음의 놀이 가운데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든, 사랑이야 말로 인간의 마지막 지팡이가 아닐까.

죽음의 노을로 조명된 <해질녘>과 파릇파릇한 생명의 그림인 <기차와 별>, 언뜻 상반되게 보이는 두 작품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고 우리 모두의 삶 이야기를 무대 위에 풀어내며 솜씨 좋게 각색해 낸 박상현 연출, 그리고 아직은 실감하기 어려운 세계일 텐데도 훌륭한 연기로 그토록 잘 소화해내고 있는 젊은 연기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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