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시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하의도>(1막)는
1948년 3월 전남 무안군 하의도에서 신한공사와 섬주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사건을 소개로 하였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가난한 소작농 김장에와 그의 아내, 그 외딸 꼴지, 그리고 꼴지의 약혼남 박종창으로, 그 중에서도 곧 혼인을 앞두고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청춘남녀 꼴지와 박종창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극중에서 박종창은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새로 땅을 개간하는 등 고군분투하지만, 소 살 돈 만원을 마련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형편이다. 하지만 장인이 될 김장에는 딸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사위될 총장에게 소를 사와야지 혼인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다. 이때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꼴지가 신한공사 직원 남가에게 온갖 수모와 희롱을 참아 가면서 생선을 팔아 소 살 돈을 마련하려 애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일제시대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이 가난을 대물림하는 소작농들 사이에서 혼사를 둘러싼 부모/자식 갈등과 남/녀의 대립 구도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전반부 설정은 막무가내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는 딸과 예비사위, 어떻게 돈을 마련할 것이냐로 대립하는 남녀의 견해 차이를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들 중심인물들은 개인적인 한계와 무력함을 넘어서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섬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며 비싼 소작료를 요구하는 신한공사의 횡포에서 일제시대처럼 자유스럽지 못하다. 이런 불합리를 타개하기 위해 가장 김장에는 전남도와 미군정청에 섬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해 보지만 아무런 대책을 듣지 못한다. 마을의 유지이자 지주인 김목사에게 부탁을 청해 보지만, 그도 농민의 편이 돼 주질 않는다. 그 결과 하의도 전체 농민 들은 폭동이라도 일으킬 상황을 극구조상 위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중심인물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반동인물군은 극의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신한공사 김계장 일행, 무력으로 소작인들을 제압하려고 출동한 목포경찰서의 공안과장, 그리고 다수의 경찰관들이 극중에서 반동인물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대 위에 드러난 반동인물들보다 더 큰 세력들이 극중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즉 가난한 농민들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 편의로 만든 법령과 무기로 농민을 탄압하려는 신한공사와 경찰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은 바로 남한 정부와 그를 후원하는 미군정이 뒤를 받치고 있다는 현실구도를 명확히 보여 준다. '당랑재후)'의 상황, 즉 '가난한 소작농 <신한공사> <경찰> <남한 정부> <미군정>의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위기 상황은 결말부에 가서 폭동으로 이어지는데, 소작농들과 경찰들의 팽팽한 대치 끝에 박종창과 김전배와 같은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맺음을 한다. 아무도 가난한 소작농들 편을 들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대안은 김전배가 전해주는 북조선에 대한 기대밖에 없어 보인다. 소작쟁의에 앞장선 김전배는 토지개혁과 같은 민주개혁을 통해 북조선의 농민들 처지가 좋아진 것은 바로 김장군의 통치 덕분임을 역설하면서, 박종창과 꼴지, 그리고 하의도 소작농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그는 ‘촉매적 인물'과, 극중 주제를 작가 대신 드러내는 '레조네'로서 극중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의도>는 실제로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남한의 농촌현실을 북한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민주개혁을 실현한 북한의 현실이 대조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형상화하였다. 더 나아가 가난한 서민들의 편이 되지 못하는 남한 정부와 미군정을 비판하면서 노동자 농민의 삶을 개선시킨 김일성의 영도력을 찬양하려는 작품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형상화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해방 후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극작가 남궁만(1915~?)의 생애와 이력에 대해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1930년대 중후반 신예극작가로 남궁민이란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36년 조선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희곡 <데릴사위>를 통해서였으며, 이후 같은 지면에 <산>을 연재하였고, 같은 해 문학 7월호에 <집>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전설>이 당선되었는데, 이 작품은 유치의 지도로 국민연극연구소에서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연극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해방기 동안 그가 창작하거나 공연한 극작품만 열거해도, <복사꽃 필 때>(1945년), <가을>(1946년), <하지도> (1946년), <제주도>(1947년), <봄비>(1947년), <홍경래>(1867년), <산주옥경>(1947년), <결혼문제>(1948년), <노동자>(1948년), <기관차>(1948년), <산의 감정>(1949년), <토성탕 풍경>(1945년), <소낙비>(1949년), <아름다운 풍경>(1949년), <임산철도 공사장>(1950년), <또 전부가 일어나는 날>(1950년) 등 16편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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