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클로델은 사석에서 자신은 매일 두 시간씩 작품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외교관으로서의 역학에 불충실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했고 좋은 외교관이 되고자 했다. 이렇듯 아침나절의 두 시간이 그로 하여금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 되게 했던 것이다. 상징주의자인 클로델의 작품 경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랭보의 영향, 신앙인의 모습 그리고 동양과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에게 고함』은 이 가운데 두 번째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클로델은 장 루이 바로에게 『마리아에게 고함』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단구두』에서 풍부하고 위대한 표현을 통해 극작가의 천재성이 드러났다면, 『마리아에게 고함』을 자신의 극작품 중 가장 특출한 작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910년과 1911년 사이에 프라하에서 쓰여진 이 작품은 작가로서 매우 성숙한 시기의 작품이다. 극작품 『정오의 분할』에서 보여준 고통스런 모험을 가슴에 간직한 채, 클로델은 동요를 가라앉히고 다시금 규율 속으로 들어온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민 것이다. 그리고는 영사가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문학에 더욱 전념하는 시기이다. 이때 그는 『인질』을 쓰는 동시에 자신의 삼부작 가운데 첫 극작품을 완성한다. 이렇듯 프라하에서의 문학 창작은 열정적인 것이었다. 『마리아에게 고함』을 겨우 완성해놓고 곧바로 최고의 서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삼중창의 칸타타』를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리아에게 고함』은 한 마디로 『처녀 비올렌』의 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892년에 처음 출판된 『처녀 비올렌』은 클로델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젊은 시절의 창작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공히 작가의 어린 시절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처녀 비올렌』이나 '마리아에게 고함'은 작가의 마음과 상상력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고향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 준다. 실상 『처녀 비올렌』의 새 버전은 1898년 그가 중국에 머물 때 이미 출판되었으므로 『마리아에게 고함』은 시기적으로 오랫동안 구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맨처음에 쓰여진 『마리아에게 고함』은 결정판이 아니었다. 클로델의 창작습관 상 그는 언제나 다듬고 퇴고하고 했던 것이다. 1938년에 클로델은 제4막을 다시 썼고, 공연을 보면서 작품을 전체적으로 다시 다듬기도 하였으니, 결국 죽을 때까지 이 작품의 운명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 된다. 어쨌든 『마리아에게 고함』은 1955년 2월에 프랑스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됨으로써 명작의 반열에 올라섰다.
『마리아에게 고함』은 클로델이 발표한 이듬해 1912년 12월 뤼니에- 포에 의해 외브르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1913년 독일 헬레라우에서도 공연되었다. 작자는 이 공연 당시 직접 무대에 접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무대장치라든가 배우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 작품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독인 극단의 연출가 자크 달크로즈를 만나면서 연출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작품을 수정해 나갔고 결국 그의 대표적인 극작품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된다.
『마리아에게 고함』은 특히 주제 면에서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작품 이다. 이 주제는 클로델 자신의 실존적이고 드라마의 비전에 대한 본질적인 주제이므로 작가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예견한 바와 같이, 1892년 초간 된 『처녀 비올렌』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녀 비올렌』은 작가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시골분위기, 흙에 대한 사랑, 대중적인 동시에 서정적이며 예술성이 깃든 언어로 표현되어 인간미가 넘쳐나는 작품이다. 어린 클로델은 시골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거칠면서 토속적인 드라마를 써보겠다는 생각을 했음이 분명하다. 우선 간단하나마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콩베르농의 부농인 안느 베르코트에게는 비올렌과 비비안(마리아에게 고함에서는 마라이다) 두 딸이 있다. 베르코르는 첫째 딸을 젊은 농부인 자켕 위리(자크 위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이 젊은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런데 베르코트는 결혼식을 기다리지 않고 프랑스를 순회하기 위해, 세상을 보기 위해 그리고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난다. 둘째 딸 마라는 남몰래 자크를 흠모하며 언니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비비안은 만일 자크와 비올렌이 결혼하면 자살하겠다고 어머니를 위협한다. 겁에 질린 어머니는 이를 비올렌에게 전한다. 이를 전해들은 비올렌은 아무 설명 없이 자크와 헤어지는데, 영문을 모르는 자크는 비올렌과 그녀의 사촌 보브와의 관계를 의심한다. 언젠가 비비안이 비올렌이 보브를 좋아한다고 자크에게 넌지시 일러두었던 것이다. 자크는 비올렌에게 모욕을 주고는 그녀로부터 떠난다. 이제 자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비비안은 잔인하게 언니를 비웃으며 언니의 지참금을 빼앗으려 한다. 비올렌은 화를 내기는커녕 상냥하다. 이에 격분한 비비안은 아궁이의 재를 언니의 얼굴에 뿌리고는 쫓아버린다. 제 3막에서 장님이 된 비올렌은 숲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성녀라는 명성이 자자하다. 어느날 밤, 비비안이 숲을 찾아와 선천성 장님인 딸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비올렌의 열렬한 기도에 힘입어 기적이 일어나고 아이는 눈을 뜬다. 제4막이 되면 이러한 언니의 행적을 견딜 수 없는 비비안은 숨어서 비올렌을 지켜보다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버린다. 장면이 바뀌어 사람들은 비올렌의 육신을 집으로 운반한다. 잠시 의식을 되찾은 비올렌은 자크에게 언제나 사랑했었음을 고백하며, 그렇지만 동생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해야 할 것을 믿었다고 말한다. 비올렌은 죽고 돌아온 안느 베르코르는 비비안을 용서한다. 이 같은 내용의 『처녀 비올렌』은 그 뿌리가 매우 강력한 극적인 동기를 가진 민간전승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성격이 판이하며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한 두 자매를 통해 충격적인 인간성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마리아에게 고함』 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특히 사랑의 희생과 행복의 거부는 『비단구두』에서 볼 수 있듯, 클로델의 주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클로델이 『마리아에게 고함』을 쓰기 위해 작품을 다시 검토한 것은 1898년 12월부터 1899년 10월 사이, 중국에 머물면서였다. 이때는 이미 작가의 언어가 성숙해졌던 시기로 클로델은 철학자이자 신학자가 되어 있었다. 극작품의 대화는 서정적이면서도 엄숙하였고 거만한 언어로 구성되었다. 시골에 전승되어 내려온 줄거리는 대폭 축소되고 변형되었다. 예컨대 장님이 된 비올렌이,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불치병의 기적을 행하는 성녀가 아니라 속죄하는 가련한 은자로 변모 된 것, 안느 베르코므가 모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비올렌의 아버지답게 순례를 떠나는 것, 영적인 언어로 충만 되어 있는 것, 피에르 드 크라옹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 그것이다. 『처녀 비올렌』에서 비올렌의 희생은 절반은 이교적 종교를 근간으로 영웅적인 행위로 묘사된 반면, 『마리아에게 고함』에서는 훨씬 가톨릭 적이다.
『마리아에게 고함』은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건과 정확하게 연결되어있다. 1429년은 프랑스가 영국과의 지루한 백년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혜성처럼 등장한 잔 다르크의 승전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랭스에서 샤를7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때로 작품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은, 신의 부름을 받아 나라를 구한 잔 다르크와 예수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인 비올렌을 중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모두 성처녀로서 신의 부품을 받은 공통점을 가진다. 실상 작품에서 존재하지 않는 마리아가 무슨 까닭으로 제목에 나타나는가는 바로 이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처녀 비올렌』이 역사적 배경 없이 진행되는 것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비올렌의 성스런 희생이 15세기의 종교적인 분위기 및 조국애와 연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클로델은 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될 수 있기를 바랬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2년에 출판된 작품은 너무 시적이고 서정적 이며 무거웠다. 1938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을 위해 샤를 될랭과 작업을 하면서 특히 제4막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공연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비판을 받아들여 제4막을 줄여 다시 썼다. 그리하여, 첫 번째 버전을 사뭇 축소하여, 자크 에베르토에게 헌정된 '마리아에게 고함'은 1948년 3월 12일 파리에 위치한 에베토 극장에서 초연 되었던 것이다.

폴 클로델(Paul Claudel)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자의 막내로 간주되는 폴 클로델은 프랑스 문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클로델은 한국의 일반독자에게는 썩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영화 〈카미유 클로델〉의 주인공인 카미유의 친 남동생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던 동생이 누나보다 훨씬 높은 위상을 구가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영화 덕택에 카미유와 폴의 위상이 바뀐 듯 같다.
프랑스 문학계의 고독한 은둔자였던 클로델은 46년간 외교관 생활을 하년서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로 외국에 거주하였다. 그는 랭보, 파스칼,보쉬에를 좋아했던 반면 몽테뉴, 코르네이유, 스탕달, 위고는 싫어했다. 가장 즐겨 읽었던 작가는 셰익스피어, 에스킬러스, 도스트예프스키 등이며, 물론 성경은 빼놓을 수 없다.
클로델은 외교관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지리에 해박하였다. 이를 통한 현실 파악을 바탕으로 세계의 수만 가지 모습을 시로 담아낼 줄 알았던 것이다. 동시대에 그는 다른 유명 작가들, 예컨대 롤랑, 지드, 발레리, 프루스트, 페기 등과 더불어 매우 개성 있고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시대정신의 반영으로 깊은 불안감과 다양하고 강력한 반항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클로델이 직업상 중국, 미국, 체코, 독일, 일본 등을 떠돌아 다녔지만 경쟁 관계에 있던 지드와 마찬가지로 훗날 예술인, 문학인,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년에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됨으로써, 프랑스 문학의 거봉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프랑스 연극의 거목으로 연극 전공자들이 간과할 수 없는 극작가가 되었다.
클로델은 1868년 8월 6일 에스느 지방에 위치한 빌르뇌브 쉬트-페르의 마을 상프노와에서 태어났다. 이 고장은 어머니의 고향이었으며 아버지는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보즈 출신이다. 그는 부자는 아니지만 크게 부족할 것도 없는 시골의 가정에서 태어나 흙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마음껏 뛰어 놀던 클로델은 14세가 되던 해 파리로 온다. 로댕이 연인이자 조각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누이 카미유가 가족들을 파리로 이끈 것이다. 1882~1883년에 부이-르-그랑 고등학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된다. 18세 때인 1886년은 클로델에게 매우 중요한 해이다. 이때에 아이스킬러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를 읽었고 세니카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이 해에 클로델은 평생을 좌우할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다. 하나는 랭보와의 만남이었고 또 하나는 성탄절 날,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체험한 신의 계시이다. 랭보와의 만남은 랭보의 시집 『일뤄미나시옹』과 『지옥에서의 한철』을 통해서 였는데, 사춘기 클로델은 랭보로부터 작가로서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또한 신과의 교감을 통해 그는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 된다. 따라서 많은 연구가들은 랭보와 가톨릭 신앙을 클로델의 작품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1887년 『잠든 여인』 1888년 『이른 죽음』등을 쓰기 시작한다. 대학생 클로델은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여 1890년에 합격한다. 파리에서의 학창시절은 모든 면에서 매우 풍요로운 시절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어려웠던 내적인 갈등도 겪고 문학 분야에서도 말라르메의 '화요 회 모임'에 참석하여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가진다. 이때에 『황금머리』 『도시』그리고 『처녀 비올렌』을 구상한다.
1893년 외교관으로서 클로델은 미국으로 떠난다. 이 해에 『도시』를 출판하며, 『교환』을 구상하고 『황금머리』를 다듬는다. 뉴욕에서 대리 영사직을, 보스턴에서 영사직을 수행한 후, 중국으로 향하는데, 여러 직위를 거치면서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약13년 간 중국에 머문다. 1894년에 『교환』과 『황금머리』를 탈고하고 『아가멤논』을 번역한다. 1898년 5월에 『도시』의 두 번째 버전을 완성하고, 12월에 『처녀비올렌』을 다듬어 이듬해 역시 두 번째 버전을 완성한다. 당시 프랑스는 동양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작가들은 앞 다투어 동양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자신의 작품에 이를 인용하곤 했다. 그런데 간접 경험밖에 할 수 없었던 작가들과는 달리, 클로델은 중국문화와 일본문화를 직접 여러 해 동안 경험한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의 행적에서 한국을 방문했다는 직접적인 흔적은 없다. 하지만 지리상의 여건으로 볼 때 그가 한국을 거쳤을 것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1909년 이후에 클로델은 프라하와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함부르크에 머물면서 외교관직올 수행하는 동시에 유럽의 진면목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를 끝으로 1917년 대사로 임명되어 리오로 떠난다. 이 시기에 대사직을 수행하면서도 역사와 시간의 움직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극작품을 구상하게 된다. 1910년 『인질』을 완성하고 『처녀 비올렌』을 다시 퇴고하며, 이듬해 1911년 『인질』을 N.RF에서 출간하며, 『마리아에게 고함』을 완성하여 1912년 출판을 한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지속적이며 활발한 공연이 이루어진다. 『마리아에게 고함』이 1912년 외브르 극장에서 초연되고, 계속해서 1913년 프랑크프르트 에서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와 상젤리제 코메디, 독일의 헬레라 우에서 각각 공연된다. 1914년에는 비외콜롱비에에서 『교환』이 공연되고, 『프로테우스』가 출판된다.
1919년 코펜하겐에 전권공사로 임명되던 해, 『비단구두』를 구상하고 1920년에 집필을 시작한다. 1921년에 주 일본 프랑스 대사로 임명된다. 다시 극동 아시아에 가게 됨으로써 클로델의 더욱 성숙해진 문학과 사상이 꽃피우게 될 것이다. 1923년 동경 대지진 당시 그곳에 머물렀으므로 클로델은 당시 비극의 산 증인이 된다. 일본의 전통연극인 '노오'를 연구하고 『여자와 그 그림자』의 초안을 잡는다. 1924년 아르 에 악시옹 극단에 의해 『황금머리』가 공연되고 같은 해 12월 『비단구두』가 완성된다. 미국의 프랑스 대사 (1927~1933)로 발령된 그는 바야흐로 공직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최초의 부임지였던 미국을 35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세계경세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위기를 맞은 시기였으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해 열렬히 토론하던 시기였다. 이때는 위대한 극작품 창작의 시기는 아니지만, 비평과 성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 시기이다. 1927년 1, 2월에 『아테네 성벽 아래에서』를 집필하고 10월에 공연을 한다. 7월에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의 서』를 구상한다. 1928닌 오데옹 극장에서 『인질』을 공연한다. 그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브뤼셀에서 대사직 수행을 끝으로 공직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론 강변에 있는 자신의 브랑그 성에 은거하며 평화로운 시인의 생활을 영위한다. 1939년 될랭은 『마리아에게 고함』의 공연을 계획했다가 포기한다. 1941년 클로델은 장 루이 바로를 만나 유익한 대화를 나눈다. 1943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비단구두』가 공연된다. 연출가 장 루이 바로는 난해한 클로델의 극작품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증명하면서 관객의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19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그를 회원으로 승인한다. 그의 극작품들은 프랑스 유럽에서 공연되기 시작한다.
교황청은 1950년 클로델이 가톨릭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1955년 2원 14일 조용히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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