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펠리샤 론드레 '두제와 다눈지오'

clint 2015. 10. 31. 11:53

 

 

 

 

 

실제의 두제와 다눈지오


위대한 두 예술가의 결합은 서로의 예술에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불꽃은 사랑의 환희나 예술적 일치감의 결과물이기 보다는 서로의 영혼을 파괴하고 파괴당한 고통과 상처의 승화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발견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내적 심리의 사실적 표현으로 현대 연기의 선구자가 되었던 이탈리아의 여배우 엘레노라 두제(1859-1923)와 작가 가브리엘레 다눈지오(1863-1938)의 만남일 것이다. 두제의 멜랑콜리한 슬픈 미소와 신비스러운 침묵, 영혼을 파고드는 시적인 연기 방식은 다눈지오에게 가장 위대한 창작의 시기를 가져다 준 영감이 되었고, 다눈지오의 야망에 가득 찬 자아도취적 성격과 가학적 성향은 두제에게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안겨 주며 그녀의 연기 예술이 영적인 차원으로까지 도달하도록 이끈 도화선이 되었다. 두제는 다눈지오와 함께 했던 시간의 고뇌와 상처를 고스란히 자양분으로 삼아 자신의 연기 예술을 더욱 위대하게 꽃피웠고, 자기만의 독특한 명상적 연기세계를 구축함으로서 후대에 영감이 되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사라 베르나르(1844-1923), 엘렌 테리(1847- 1928)와 함께 당대의 서구 무대를 대표한 엘레 오노라 두제는 유랑극단을 이끌던 배우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루이지 두제는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전통을 대표하던 유명한 희극배우였다. 가족극단이 하나의 현상을 이루던 당시 이탈리아 연극계의 풍토 속에서 루이지도 자신의 네 아들이 모두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가 주길 바랬으나, 루이지 만큼의 재능과 열정을 타고 나지 못했던 그들은 루이지가 사망한 후 극단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곧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중 셋째 아들 빈첸조 알레산드로는 아내 안젤리카와 몇몇 배우들을 데리고 마차에 소품과 의상 등을 싣고서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가는 유랑생활을 이어갔다. 엘레노라 두제는 빈첸조 알레산드로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길 위의 삶으로부터, 엘레노라 두제를 특징 지우는 이미지인 슬픔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생겨났다. 두제는 4살 때부터 그 어떤 기초적인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부모를 따라 굶주림과 방랑의 무대생활을 시작했다. 외톨이로 자라난 그녀는 공연할 마을에 도착한 새벽녘이면 마을 분수대에 앉아 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 자신의 공연이 없는 날이면 컴컴한 분장실에서 부모님이 공연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다. 처음으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엣을 연기하던 14살 생일저녁에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주던 어머니의 죽음을 들어야만 했다. 배우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할 무렵인 21세에는 30대 중반의 저널리스트 마르티노 카피에로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며칠 후 사망했고 남자는 떠났다. "나의 여배우로서의 최초의 윤곽은 고통과 피로와 열병과 증오의 상태에서 형성되었다”라는 그녀 자신의 고백처럼 인생 역정 속에서의 슬픔과 외로움은 자연스레 두제의 예술을 이루는 근원적 힘이자 미적 특성이 되었다.
인생의 기쁨이나 화려함 보다는 고통과 슬픔을 먼저 알게 되었던 두제는 자연스레 삶의 고뇌를 명상하는 취향을 길러갔다. 따라서 그녀는 비록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그 시대의 무대 관습에 익숙했을지라도. 화려한 테크닉을 자유로이 구사하며 관객을 사로잡는 관습적인 연기 방식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내면의 훈련에 몰입함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이루어 나갔다.
두제가 성장하던 19세기 중 후반은 이전 세기에서 이어져 온 웅변조의 양식화된 대사법과 그림이나 조각을 모방한 자세 취하기 등을 바탕으로 한 외적인 접근방식이 전통적인 연기 스타일의 기준으로 적용되던 시기였다. 프롬프터에 의지하며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었던 배우들은 거울 앞에서 강렬하고 아름다운 포즈와 제스처를 만들거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리듬감 있는 억양을 연습하는데 주력하였고 연기교본 - 예를 들면 『낭독 및 웅변 교본』, 『무대 포즈에 관한 교과서』와 같은 제목의 - 을 보면서 감정을 외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익혔다. 희곡 문학 또한 격정적인 감정으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드라마들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그러한 작품들을 연기함에 있어 어떤 지적인 노력이나 분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대부분의 배우들은 감정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집중하면서 울부짖고, 감정을 폭발시키고, 쓰러지는 등 격정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엘레노라 두제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이나 테크닉보다는 인물의 내적 삶에 깊이 집중함으로서 자신 안에서부터 인물이 형성되고 그것이 동작과 표정과 말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흘러나오게 하였다. 두제는 모든 대사 속에서 섬세한 뉘앙스와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내고 부여했으며.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녀의 대사들은 내적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표정, 섬세하고 절제된 동작과 완벽하게 융화 되어 인물의 깊은 내면과 사실적인 심리를 표현해냈다. 두제의 예술이 외면적 요소들보다는 내적인 요소들에 더욱 바탕을 두고 있었음은, 그녀가 공연 시 분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더욱 명확히 입증되는 듯하다. “1인치 두께”로 분장을 하지 않아도 두제의 얼굴은 그녀가 무대 위에서 그려내고 있는 인물의 모든 섬세한 심리적 변화들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세계의 관객들은 이러한 두제의 새로운 연기 방식에서 영혼 깊은 곳으로 전달되는 사실과 진실의 느낌을 경험했다. 위대한 영국의 비평가이자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두제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한 여인으로서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실제로 붉게 물드는 것을 목격하였음을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1924년 두제의 마지막 공연들을 관람했던 미국의 관객들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만을 두건으로 가린 채 주름살 담긴 얼굴 그대로 무대에 오른 60대의 두제에게서 어느새 생기와 순수한 흥분으로 피어나는 20대의 시골소녀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던 경이로운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1893년 두제의 베를린 공연을 관람한 후 자신이 목격한 두제의 색다른 연기에 대하여 극찬했다.
그러나 두제의 연기가 단순히 현실적 재현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기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간의 본성을 담아내었고 당대의 비평과 공연 리뷰들은 신비스러운 경지까지 느끼게 하는 그녀의 연기에 대해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그들은 두제의 대사와 움직임이 어떠한 가식이나 과장도 없으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특히 그 녀의 독특한 침묵의 사용은 그 어떤 대사들보다도 깊고 진실 되어 인간의 영혼을 드러냈다고 썼다. 그녀를 가까이 알았던 이들은. 그러한 두제의 연기가 어떠한 정신적이며 명상적인 방법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연기에 있어서 두제의 방법론의 특징은 마치 조각가가 진흙으로 자기에게 떠오른 이미지를 빚어내듯, 그녀가 깊은 명상을 통해 떠오른 인물의 내적 외적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조형적으로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그 인물의 순간순간의 모든 감정들은 특히 그녀의 흐르는 듯 유연한 동작을 통해 그대로 표출되었다. “두제의 예술은 온전히 그리고 항상 무브먼트의 예술”라는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말처럼, 무브먼트의 조형적 미는 그녀의 연기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요소였다.

 

 

 

60여 년이 넘는 연기 인생동안의 두제의 예술적 변화들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겪은 삶의 내적 외적 변화들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변화들은 종종 그녀가 만났던 이들과의 치열했던 인간적 예술적 교감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탈리아 지방극단 배우로 출발한 이후, 두제는 당대의 대부분의 여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상드르 듀마 피스와 빅토리앙 사르두와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멜로드라마를 통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두제는 그러나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로맨틱한 감성과 절망, 슬픔을 다른 여배우들처럼 화려하게 전시해 보이는 대신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진실 된 감성을 과장과 꾸밈없이 "거의 벌거벗은 채로” 보여줌으로서 그 각각의 전형적인 인물들에 고유한 영혼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의 리뷰들은 한결같이 열등한 작품들을 위대한 인간 삶의 묘사로 승화시킨 두제의 천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드라마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대사)을 기다리는 두제를 보는 것은 거의 고통스럽다”라는 영국비평가 아서 사이먼스의 말처럼 두제의 예술이 완벽히 실현되기에는 피상적이고 관습적인 작품들이었다. 그녀에게는 보다 시적이며 현대적인 작품이 필요했다.
시인이자 오페라 작사가였던 아리고 보이토와의 만남과 사랑은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고자 갈망하던 두제가 보다 성숙한 차원의 예술가로 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이토는 그 시대 이탈리아 문학과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섬세하고 철저한 성격의 지식인이었다. 자신보다 20년 이상 연상이었던 보이토를 통하여 두제는 바그너와 셰익스피어와 단테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불어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두제는 보이토가 안내해 주는 모든 것들을 열정적으로 탐험해 나갔고. 명상에 더하여 독서까지 그녀의 평생의 습관으로서 갖추게 되었다. 이 무렵 두제는 멜로드라마에서 조금씩 벗어나려고 노력 하면서 보이토 번역에 의한 셰익스피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7년간 비밀스럽게 지속되었던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평생의 예술적, 정신적 유대감이 그들 사이에 남았다.
그 다음으로 두제를 찾아 온 것이 다눈지오와의 사랑이었다. 다눈지오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다눈지오의 예술 속에서 그녀가 간절히 찾고 있던 새로운 미적 가치들을 발견한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1863년, 아브루치 (Abruzzi)의 한 어촌마을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다눈지오는 10대 후반에 이미 과감하게 에로틱한 주제의 시집을 내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서, 1890년대에는 시인과 소설가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퇴폐적이고 육감적인 미, 죽음에 집착하는 주제들로써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데카당스를 대표했다. 다눈지오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 풍부한 어휘력과 언어를 다루는 탁월한 기술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다. 감각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능적인 이미지로 창조해내는 그의 기술은 탁월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의 작품은 자신의 감각과 감성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그것을 자연의 힘과 절대 미에 과장되게 대입, 일치시키는 자기도취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의 희곡들 역시 심미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나 그 속에 인간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작품들 속에서 다눈지오 자신을 반영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항상 비범한 존재들로서, 여자 주인공들은 그를 향한 숭고한 사랑으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예를 들어. 희곡 「라 지오콘다(La Gioconda)」에서 여주인공 실비아는 천재 조각가인 남편 루치오의 예술적 뮤즈이자 그가 사랑하는 여인 젊은 지오콘다와 갈등을 겪으며 지오콘다가 그녀 자신을 모델로 한 루치오의 걸작을 파괴하려 할 때, 실비아는 그것을 구하려다 오른손을 잃고 만다. 또한. 그리스의 고대도시 마케도니아의
발굴을 배경으로 하는 '죽은 도시'(La citta morta)」에서는. 남편 알레산드로가 은밀히 다른 여인 비앙카를 사랑하고 있는 걸 직감으로 이해하게 된 장님 아내 안나가 남편과 비앙카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하는 동안, 비앙카에게 근친상간 적 사랑을 품은 그녀의 친오빠 레오나르도는 질투심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다. 이러한 다눈지오의 희곡들은 극은 없고 시와 분위기만 있다는 세간의 평을 받았다.

 


기록상으로 드러나는 첫 만남 이전부터 두제와 다눈지오의 서로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다눈지오가 1892년에 발표한 소설 '로마의 비가'에는 "신성한 엘레노라 두제에게” 라는 헌정의 문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1894년 영국 공연 중이던 두제는 다눈지오의 소설 '죽음의 승리'를 보내달라고 보이토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두제가 보이토에게 보낸 『죽음의 승리』에 대한 두제의 다음과 같은 감상평은. 그녀가 소설을 통해 이미 다눈지오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죽음의 승리를 다 읽었어요.… 용기의 커다란 시험, 자신의 존재를 젊어지고 나가는 위대한 미덕… 인생을 직면하는 거대한 고통의 희생은… 이 책 속에서 철저히 파괴되고 있이요. 나는 다눈지오를 혐오하고 또한 그에게 반했어요.”
두제의 이러한 기술은 앞으로 다가올 다눈지오와의 10년간에 걸친 연애 기간 동안 경험하게 될 애증의 고통스러운 이중성의 예고였다. 다눈지오는 재능 있는 작가였지만 기회주의자였고 이기적인 야심가였으며, 사치한 성향과 바람둥이 적 기질을 타고난,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자들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그들이 가진 것을 최대한 자신의 성공에 활용하였다. 한 여인과의 이별은 항상 다른 여인과의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연유되었다. 다눈지오의 사랑은 여인들의 삶을 파괴했다. 예술과 예술가를 위해 모든 것을 회생할 수 있었던 두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두제와 다눈지오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4년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 시작부터 1861년에 통일된 조국 이탈리아에 새로운 연극의 부흥기를 가져오고자 하는 공통된 예술적 열망이 더해져 더욱 강렬해졌다. 두 사람은 로마 근교의 알바노 호수 기슭에 야외 원형극장을 세우고 그 곳에서 고대 희랍시대의 비극과 시적 가치들로 가득 찬 다눈지오의 새로운 연극을 공연할 이상을 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기투합의 결과물들을 통해서 두제가 성공의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다. 두제가 연기한 다눈지오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작가를 찾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의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두제가 다눈지오의 작품들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유를 다눈지오의 작품이 온전히 외적인 미학으로 치장된 정적인 것임에 반해, 두제의 예술은 철저히 내적이며, 꾸미지 않은 순수한 "진실의 정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의 다른 예술적 취향이나 성격만큼이나 동반자적 결합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다눈지오와 두제는 서로 달랐다. 다눈지오의 예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그를 후원하였던 두제와는 달리 다눈지오가 두제에게 보인 것은 일련의 배신들이었다. 다눈지오는 두제에게 약속했던 자신의 첫 작품 「죽은 도시」를 사라 베르나르에게 준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두제를 배신하면서 그녀의 국제적 명성을 자신의 유명세를 높이는데 이용했다. 두제가 공연 투어를 떠난 동안에는 여성 편력으로 그는 두제에게 상처를 주었다. 다눈지오의 자기중심적 태도로 인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두제에게 상처가 된 사건은 그의 소설 「불꽃」의 출판이었다.
두제와의 실제 연애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진다. 눈지오의 소설 「불꽃」(1900)에는 그의 연극 철학과 그가 두제와 함께 추구했던 예술적 시도들의 이상이 자세히 담겨있다. 이 소설은 또한 두제 자신의 고백을 바탕으로 그녀의 신비로운 예술세계의 본질과 그 방법론을 뛰어난 심미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밝혀냄으로서. 구체적인 언어를 통한 묘사보다도 더욱 깊이 있는 두 제의 연기예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다눈지오는 또한 이 소설 속에서. 두제와의 은밀한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두제를 모델로 한 여주인공 포스카리나를 감정의 기복이 격심하고 육욕의 정념에 사로잡힌 나이든 여배우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젊은 연인인 스텔리오는 물론 다눈지오 자신으로서, 그는 천재적인 재능과 거부할 수 없는 성적 매력을 지닌 시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꽃」은 데카당스주의자들과 로망 롤랑 같은 작가들로부터 칭송받았으나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문학적 가치도 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여배우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외설적인 작품으로서 이탈리아 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까지 비평가들과 세인들의 혹평을 받았다.

 

불꽃」의 여파는 두제가 자살을 생각하게 할 만큼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제는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스위스, 스페인 등을 포함한 1900-19이년 유럽 공연 투어 동안 다눈지오의 작품들을 홍보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두제는 이미 1898년부터 다눈지오의 작품을 홍보하고 공연하는 데 자신의 재능과 재산을 투자해오고 있었으며. 매 공연 때마다 무대장치와 의상 등의 역사적 사실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에서 초연된 1901년 다눈지오의 작품 「프란체스카 다리미니」에서는 40만 불이라는 전 재산에 가까운 막 대한 자금을 들였고.「프란체스카 다 리미니」가 성공을 거두자 두제는 그녀가 다눈지오와 결별하게 된 1904년까지 다눈지오의 작품들만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두제의 희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다눈지오의 작품들은 흥행에 실패하였다. 그의 희곡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차가웠고 평단에서는 두제의 천재성이 다눈지오의 얄팍한 희곡들에 낭비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지적했다. 1902-1903년 미국 공연의 경우, 극장은 겨우 절반 정도가 차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때에도 두제는 마치 만원 관객 앞에서 매번 공연을 한 듯 다눈지오에게 인세를 지불하였다. 결국, 다눈지오의 작품 중 최고 성공작의 초연은 두제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눈지오의 1904년 작품「이오리오의 딸」은 원래 두제에 의해 초연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 누적과 건강의 악화로 공연을 할 수가 없게 된 두제는 다눈지오에게 공연의 연기를 부탁했고, 다눈지오는 이를 거절한 채, 그녀의 대역인 이르마 그라마티카를 세워 초연을 강행했다. 당시 제노아의 호텔방에 누워 몸 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두제는, 그라마티카에게 자신이 마련했던 의상을 내주었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더 이상 다눈지오의 이기심을 견딜 수 없게 된 두제는 마침내 다눈지오에게 편지로 작별을 고했다. 이별 후, 두 사람의 인생은 서로 다른 행로를 이어갔다. 두제와의 결별 후 다눈지오는 다시 예전의 무절제한 쾌락의 삶으로 돌아갔다. 「이오리오의 딸」의 성공으로 극작가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다눈지오 입장에서는 더 이상 두제가 필요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화려한 사교계 생활로 이끌어 줄 독립심 강하고 승마와 사냥을 즐기는 24세의 과부 알레산드라 디 루디니에게로 옮겨 갔다. 두제가 떠난 후 그의 새로운 동거인이 된 아름다운 과부 알레산드라는 다눈지오와 함께 사치스러운 삶을 향유하였으나 이후 모르핀에 중독되어 다눈지오에게서 버림을 받고 수녀원으로 들어가 신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알레산드라가 모르핀에서 벗어나기 위해 씨름하고 있던 1906년 경. 다눈지오는 새로운 사랑 쥬세피나 만치니 백작부인을 만났지만, 종교심 강한 유부녀였던 그녀는 부정한 사랑에 대한 죄의식으로 결국 정신 이상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다눈지오는 러시아의 백작부인. 젊은 미국인 화가 등, 많은 여성들과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고 그들 모두에게 희열과 고통을 안겼으며, 결국 그들 모두를 무책임하게 떠났다. 그들을 향한 다눈지오의 열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진실 된 것이었고, 다눈지오는 자신의 그러한 감정들을 편지 속에 담았다. 다눈지오는 여인들과 작별할 때마다 자신이 보낸 편지들을 태우지 말고 돌려 보내줄 것을 부탁했는데, 여인들에게서 받은 영감의 산물인 편지 속에 담긴 자신의 언어는 여인들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눈지오는 사랑의 굴곡 속에서도 창작 활동에 몰입하려 노력했고 계속해서 시와 희곡을 발표했지만 두제와 함께했던 시간동안 썼던 만큼의 훌륭한 작품은 발표하지 못했다.
한편 두제는 입센의 작품에서 보다 깊어진 자신의 예술세계가 머물 곳을 찾았다. 그녀는 보이토와 함께 하던 시절부터 입센에 대한 그의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미 입센의 문제적 여주인공들의 복잡한 심리에 강렬히 매료되었고 「인형의 집」을 자신의 레퍼토리에 포함시켰었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입센의 작품들을 파고 든 시기는 이 무렵부터였다. 당시 유럽에서 실험적인 연극을 이끌던 프랑스의 연출가 튀니에 포와 함께 두제는 「인형의 집」 「로즈메르솔름」, 「헤다 가불러」, 「바다에서 온 여인」등을 차례로 완성시켜 나갔다. 입센을 깊이 존경했던 두제는 그를 잠시 동안이라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1906년 2월 튀니에 포와 함께 입센의 도시인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노 거장 입센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튀니에 포는 자서전에서 입센이 누워있는 방 창가의 맞은편에서 자신과 두제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입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길 기대하며 하염없이 서있었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입센의 작품들 속에서, 복잡한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두제의 새롭고도 심오한 연기 방식은 가장 빛이 났고, 당대의 입센 전기 작가였던 노르웨이 사람 할브덴 코흐트가 지적하였듯, 두제는 입센의 “가장 완벽한 해석자" 로 역사 속에 기억되고 있다.
마흔이 넘으면서 두제의 삶은 점점 수도자의 구도 생활처럼 간결하고 금욕적인 것이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왁자지껄한 연극계의 삶을 멀리 하였으며 그녀의 연기의 신비적인 성향 또한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의 완성도가 정점이던 1909년, 두제는 은퇴했다. 한 번 떠나면 수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씩 이어지는 공연생활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그녀는 휴식이 절 실히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의 실현에 대한 회의는 그녀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그 후 12년간. 두제는 아드리아해외 어느 작은 집에 머물며 평화로운 명상의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1921년, 두제는 다시 무대로 돌아온다. 그녀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예술은 더욱 더 단순하고 영적으로 심오해져 있었다. 1차 대전 중에 자신의 은행 계좌가 사라져 생계의 필요성에서 무대로 돌아와야 했지만. 당대의 관객들은 그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 너머로부터 전해오는 신비스러운 힘에서 가슴 저미는 투명한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1923-24년의 두제의 네 번째 미국공연은 결국 그녀의 마지막 공연 여행이 되었다. 뉴욕을 시작으로, 보스톤. 볼티모어, 시카고, 뉴올리언즈, 하바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까지, 이제는 미국 관객들에게 하나의 전설이 된 두제는 그들에게 영혼의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피츠버그에 도착했을 때, 4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여전히 차갑고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평생 동안 건강 문제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그녀는 강행군으로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공연이 있던 날, 두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차를 타고 극장으로 갔다. 그 날은 비가 심하게 내렸고, 무대 출입구를 잘못 알고 있었던 운전수는 두제를 내려준 채 성급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극장의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두제는 온 몸이 비로 젖은 채 극장 밖에서 한참 을 떨어야 했다. 공연이 끝난 후 호텔로 급히 옮겨진 두제는 폐렴의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1일 두제는 이국 땅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해가 뜨면. 우린 출발해야 해… 서둘러요, 떠나야 해…” 평생 동안 호텔에서 호텔로 유랑의 생활을 하며 자신의 영혼이 머물 예술의 이상향을 찾아 방랑 했던 엘레노라 두제는 그렇게 떠났다.
삶의 모방은 예술의 근간이지만. 예술은 또한 삶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넘어서 승화된 미적 가치의 세계를 담아낼 때 진정한 예술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두제는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꿈꾸던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으려 노력했고, 과거의 전통을 뒤집는 새로운 연기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한 두제의 연기는 당대로서는 "반(反)연기”녀로 받아들여질 만큼 과감하고 새로운 것이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러한 두제로부터 현대 연기의 위대한 개척자를 발견했다.
자신의 예술적 여정 속에서 두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특히 다눈지오와 함께 했던 10여년의 시간은 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또한 예술가로서의 삶에 있어서 그녀에게 처절한 고통과 상처鲁 주었다. 두제는 다눈지오의 예술을 믿었으며 사랑하는 그의 예술을 자신이 무대 위에서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기와 경제적 이익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녀의 회생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그와의 사랑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눈지오와의 그러한 파괴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두제는 슬픔과 고뇌를 근원으로 하는 자신의 독특한 명상적 연기술의 개화를 이루었다. 자신이 품은 예술적 이상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을 통하여 두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감동을 주는 진정한 예술가의 표본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작가 서문
“엘레오노라 두제와 가브리엘레 다눈지오에 대 한 희곡이라구요!?!” 내게 최근의 작업근황을 물었던 친구가 외쳤다. "그거 방화막(防火幕 asbestos)) 에 다 써야할 거 같은 데요” 그 친구가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반응은 희곡을 쓰는 과정동안 나의 마음속에 머물렀고 내가 쓰려고 하는 주인공에 대한 극이 매우 치열한 열정을 무대 위에서 보일 수 있도록 나를 몰아 붙였다. 그것이 1983년의 일이었다. 26년 만에 나의 희곡을 다시 읽으면서 열정의 표현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작품이 그 다지 부끄럽지도 다시 고쳐 쓰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기분 좋게 놀란다. 만약 이 작품이 아직까지 생명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안에 들어간 자료조사의 양에 크게 기인하리라. 피로 얼룩지는 흰 장미나 프리몰리 백작의 카메라와 벽장 같은 극적 장치들과 등장인물들이 만나는 몇몇 장면들을 고안하는데 있어서 나는 작가적 상상력을 많이 개입시켰다. 그러나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의 연대기적 흐름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바탕하고 있다. 이 희곡에 착수하기 전에 나는 두제와 다눈지오 두 사람 모두에 관한 여러 전기문들과 그 시대의 이탈리아 연극에 관한 연구 자료들을 읽었다. 두 제의 순수한 성격과 자기 예술이 쉽게 잊혀지고 말 것이라는 그녀 자신의 믿음. 이 두 가지는 두 제에 관한 기록들에서 반복되는 테마였다. 희곡 속에 등장하는 다눈지오의 감정 넘치는 대사들은 다눈지오 자신의 화려한 문체에서 영감을 받았다. 두 주인공의 말과 행동양식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신비적 성향을 지녔던 두제와 지독하게 이기적인 그러나 묘하게 이성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던 다눈지오의 10년에 걸친 열정의 격렬함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나의 남편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당사자들 빼고는 다른 모두의 눈에 우습게 보이는 법이라고 자주 말한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연애는 어떤 설명될 수 없는 불가항력적 매력에 의해 서로에게 끌리는 당사자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에게 분별력 없는 행위로 밖에 보여 지지 않을지 모른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두제는 매우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하기에 다눈지오는 그녀의 성숙한 예술세계를 이루어낸 한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눈지오의 화려한 말투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그는 진실 되다. 프리몰리와 마털다에게 코믹스러운 대사들을 많이 부여함으로써 나는 다눈지오를 향해 웃고 싶어지는 충동을 조금은 상쇄시키고 싶었다. 쥬세페 프리몰리 백작과 마틸데 세라오. 조셉 셔먼의 성격창조는 약간의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보다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마틸데와 그녀의 남편 에두아르도가 결국 나중에 이혼을 했다는 단순한 지식에 기반 하여 나는 마틸데가 에두아르도를 놀랄 정도로 무시하는 대사들을 말하게 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있는 인물인 사라 베르나르는 두제에 관한 희곡 안에서는 그에 적합한 극적 요구들을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사라는 관대한 영혼의 두제와 거만하게 대조됨으로써 두제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인물이 되었다.
실제 삶에서 두제는 가브리엘레 다눈지오와의 10년간의 애정관계를 편지로 끝냈다. 그 당시 다눈지오는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들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자는 두제의 가슴 사무치는 호소를 무시했다. 나는 위대한 열정에 관한 희곡의 전환점으로는 한 통의 편지보다는 더욱 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관계의 위기의 절정의 순간에 두제를 상징 하는 이미지인 흰 장미를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부터 긴 가지의 흰 장미 다발로 두제를 피 흘리도록 후려치는 다눈지오의 모습이 나왔다. 그러한 폭력은 마침내 그녀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벌 본에서는 두제가 퇴장하기 직전에 다눈지오에게 하는 마지막 대사가 "이 딱한 남자야"였다. 객석의 여성 관객들은 누구나 이미 마음속에 담고 있었을 이 대사는 관객들의 환호를 위해 계산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희곡을 최초로 연출했던 연출가가 훨씬 더 적합한 마지막 대사를 제안했다.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양 두제에게 부여했던 애칭 기솔라벨라로 자신을 유혹하는 다눈지오를 향해 두제가 이렇게 말하도록 말이다. "내 이름은 엘레노라 두제예요.” 이 대답은 그녀가 감정적 자유로움과 함께 되찾게 될 그녀의 독자적 예술로 초점을 적절히 전환시킨다.
첫 공연 당시 연출을 맡았던 론쉐퍼 (Ron Schaeffer)는 이 두제의 퇴장 대사 이외에도 많은 부분을 발전시켰다. 1984년 미주리 레퍼토리 극단의 쇼케이스는 나중에는 삭제된 장면으로 시작되었었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공연 직후 의 두제의 분장실 장면이었는데 그것은 베르디의 작사가였던 아리고 보이토와 두제의 연애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다.
1987년 4월 「두제와 다눈지오」는 재능 있는 작곡가 제랄드 캠너(Gerald Kemner)의 곡으로 오페라로 초연이 되었다. 오페라연출가 월 그레험(Will Graham)은 함께 이 희곡을 오페라가 사로 새롭게 발전시키는 작업을 했다. 원래의 희곡에 약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나는 두제의 처음과 마지막 아리아를 위한 독백을 첨가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희곡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남겨두기로 결심했다) 나는 몇몇 장면들의 연결을 좀 더 손보았고 무대감독이었던 로스-프리스 (Ross Freese)는 좀 더 편집해야 할 곳들을 찾아냈다. 어떤 단락들은 이중 삼중 혹은 사중창으로 바뀌었다. 베르나르 장면은 매우 유쾌하고 활기차게 탄생되었는데 이는 너무나 멋진 제니 옴스가 베르나르 역할을 맡아 불렀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장면의 마지막에서 두제는 다시 돌아와 베르나르와 다눈지오의 대화를 몰래 듣게 된다. 이 오페라의 세계 초연에는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구호시설인 캔자스시티의 로즈브 룩센터를 위한 자선공연도 포함되었다.

 

 

 

작가소개
저자 펠리샤 론드레 박사는 미국 미주리 대학교 (UMKC)의 연극과 교수이다. 그녀는 'The History of World Theatre', 'The History of North American Theatre', 'The Enchanted Years of the Stage'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중견 연극사학자 중 한 명이다. '두제와 다눈지오' 외에 '아드리엔느 르쿠브뢰르' 같은 대표작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극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The Heart of America Shakespeare Festiva」의 공동 창설자이기도 한 그녀는 미국 드라마투르그 역사의 초창기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서. 미주리 레퍼토리 극단 (Missouri Repertory Theatre)을 비롯한 많은 전문극단의 드라마투르그로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