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성당 밖과 안)
1953년 7월 하순, 어느 토요일 오후. 치열한 격전이 한차례 지나간 폐허된 고랑포 성당에 낙오된 세명의 괴뢰군 패잔병이 잠입하여 지하실을 점령하고, 이어 국군과 종군 성직자들이 성당을 찾아든다. 그들은 성당이 무사함을 보고 환희에 넘치지만, 국군들이 떠난 후 지하실로 내려가려던 미카엘과 듀마, 누시아 세 성직자들은 괴뢰 패잔병들의 돌발스런 위협을 받는다. 그들은 누시아수녀를 인질로 하여 탈출작전을 벌리려는 것이다. 이 불의의 사태에 젊고 저돌적인 듀마는 국군의 힘을 빌리자고 하며, 미카엘은 무기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조급히 굴기보다는 여유로써 대응책을 마련하자는 대립된 의견이 고조된다.
2장 (지하실과 성당 안)
같은 날 밤. 지하실엔 부상당한 박상위의 신음 소리와 김전사의 이글거리는 눈알이 누시아를 감시한다. 중상인 박상위의 치료가 속수무책임에 당황하는 그들에게 누시아는 신앙과 인정으로 자진하여 치료에 나선다. 한편 듀마는 누시아를 구하고자, 자신이 인질이 될 것을 간청하지만, 오직 탈출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에겐 통할 리가 만무하다. 듀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야수와 같은 김전사의 행동은 더욱 더 누시아를 위협할 뿐이다. 육소위는 누시아의 수녀복을 바꿔입고 탈출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하나 탈출작전이 순조롭지가 않음을 알자, 자신들에게 가장 방해물이 되고 있는 듀마를 육소위는 여성의 육체로서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가 되고 만다.
3장 (성당 밖)
이틀 날 아침. 지난 밤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피난 갔던 마을 사람들이 신도들을 선도로 차례차례 상당 밖으로 몰려든다. 오랫동안 산 속에서 숨어 살아 온 때문에 흙과 땀으로 찌들었건만, 새로이 만난 기쁨에 서로들 춤이라도 출 듯 반긴다. 그러나 그간 놈들의 무자비한 악행에 자살을 한 길순이, 정신이상이 된 분이, 또 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간 전쟁의 비참함에 모두들 악몽을 되새기며 분노에 치를 떤다. 마을 사람들은 미사를 올리려 하지만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음에 의아해 하자, 미카엘은 지하실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박씨를 통해서 누시아가 장질부사를 앓고 있다고 얼버무릴 뿐, 그는 신앙과 현실 속에서 진정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고민한다. 이러한 가운데 괴뢰 패잔병들의 횡포는 더욱 악랄해 진다.
4장 (지하실)
죽음을 눈앞에 둔 박상위의 오열하는 외침이 처절하다. 누시아는 신의 계시를 통해 완전한 자기 희생으로 박상위를 치료하며, 그들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비판한다. 박상위는 그들의 질서와 진보를 위한 조직이라는 당을 떠날 수 없다고 하며, 누시아는 진정한 인간의 목적은 사랑으로 이룩된 국가와 민족이라고 간곡히 설득한다. 한편 탈출에 위기를 느낀 옥소위는 최후의 돌파구를 위해 수류탄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이러한 옥소위의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 앞엔 “무너져라! 무너져라!”하는 박상위의 체념된 자학과 절규만이 있을 뿐, 누시아는 더욱 절망에 빠진다.
5장 (성당 밖)
같은 날 정오 휴전이 성립된다. 미카엘과 듀마는 천주와 국가와 누시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것을 각오한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시도한 구원의 방법도 동물적으로 광분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겐 신의 제시와는 아랑곳 없이 수포로 돌아간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탈출을 위해 무자비하게 수류탄을 터뜨리고 도망가지만, 결국 성직자들은 모두 당하고 만다. 전쟁이란 살육과 멸망과 죽음이라는 것.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그들의 죽음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너무도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통곡하는 미카엘이 오열을 남기면서 막이 내린다.
작가의 글 - 윤 조 병
스무 살 고개에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장르 불문하고 시, 소설, 시나리오, 희곡 습작에 열을 올렸다. ‘63년에 휴전직후의 상이병사와 창녀의 이상한 사랑 이야기로 전후 휴머니즘이 파괴되는 사회현실의 문제를 다룬 ‘휴전일기’가 국제영화사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 없는 가작으로 입선했다. 이때 필자는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영화적 진실(verite)에 매료되고, 영상보다 문자적 시나리오에 더 매력을 느끼는 전방 근무 사병이었다. 어렵게 외출을 얻어 설레는 가슴으로 충무로의 시상식에 참석했다. 상금 봉투를 받고 몹시 궁금한데도 촌스러워서 펴보지 못하다가 행사가 끝나고, 귀대 길에 근처 호텔의 민망한 곳에서 봉투를 펴보았다. 달랑 백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가서 사측에 확인을 하니까 관습이다, 영화화하면 영광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기능은 사물의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주는 것인데, 이 얼마나 허술한 짓인가. 시나리오를 포기, 연극적 진실을 찾기로 하고 희곡쓰기에 열중했다. 여러 번 낙선하고, ‘67년 국립극장 희곡공모에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가 당선되었다.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을 더 차지하려고 국군과 인민군이 사투를 벌이다가 인민군 잔병이 마을 언덕 성당 지하에 숨어들면서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 사이에는 신부와 수녀가 역할을 한다. 동족상쟁이라는 우리의 긴박한 문제를 성당에 설정해서 풀어보려는 구성이었다. 그러니까 시나리오 ‘휴전일기’는 휴전 직후 서울에 드리워진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이고, 희곡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는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휴전 직전 서부전선의 극한상황에서 남과 북이 대화로 화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었다. 당선 인터뷰가 중앙지 몇 곳에 나가자, “인간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어떠한 극한상황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필자의 멘트가 걸렸는지, 거주지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그 기사를 스크랩해서 직장으로 몇 번 찾아왔다. 창작의도를 설명했는데 이해가 안 된다면서 반복해서 찾아왔다. 결국에는 국립극장이 정부기관이라는 설명을 하자 그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연출과 토의를 가졌는데 의견의 차이가 컸다. 극장에서 호텔을 잡아 해결의 끝을 보고 나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사회적 연극적 스승이신 서항석 선생님은 토론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이끌어 주셨다.
여기서 잠깐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필자는 일제통치시대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신사경배와 각종 사역에 동원되고, B29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고, 이어서 분단으로 반공교육을 받고, 졸업 무렵에 동란을 맞았다. 피난과 귀가를 반복하면서 국군, 인민군, 미군을 체험했다. 당시 표현으로 국방경비대, 빨갱이, 깜둥이를 체험한 것이다. 한마디로 의외성이 많아 놀랬다. 나중에 알았는데, 필자가 만난 그들은 팔로군(八路軍)으로 항일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후에 인민해방군 주력이 되어 선발대로 나온 것이니 필자의 체험에서 그들은 신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그때 체험으로 예술 표현이라는 이상의 세계에 머물렀고, 선생님은 시대 현실에서 많은 것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다. 선생님의 뜻으로 연출과 작가는 한발 물러서고, 전세권 조연출에게 맡겨졌다. 기라성 단원들이 열연한 공연이 드디어 막을 열었다. 충남 조치원에서 상경해서 마지막 공연을 보았다. 연극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주제에서 필자가 유지해온 평형이 기울어 있어서 부끄러웠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군사적 적대 시대에 좌우평형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전쟁과 남북문제는 ‘참새와 기관차’ ‘건널목 삽화’ ‘가출기’ ‘풍금소리’처럼 비틀거나 보물찾기 준비하듯 다루었다. 어떻든 시나리오 ‘휴전일기’는 불발되고, 희곡은 주제의 상처를 입어 감췄는데, 필자의 데뷔작은 항간에서 알고 있는 ‘건널목 삽화’가 아니고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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