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찰스 마로위츠 '마로위츠 햄릿'

clint 2016. 1. 13. 14:13

 

 

 

 

 

 

셰익스피어가<햄릿>을 사건의 흐름을 중심으로 썼다면 마로윗츠는 의식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온갖 잡다한 기사가 실려 있는 신문의 사회면처럼<햄릿>을 콜라주 형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는 20세기를 사는 우리의 자유분방하고 복선적인 의식 활동에 햄릿의 본질을 연결시켰다.

 

마로위츠는 햄릿의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관객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극의 진행에 따라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기존 관념에서 강제적으로 이탈되고, 호레이쇼의 부재를 망각해야 하며, 때론 포틴브라스와 햄릿을 동일시해야 한다. 또한 마로위츠는 햄릿의 자의식 속을 온통 헤집고 돌아다니며, 사건의 나열이 아닌 의식의 흐름을 읽으라고 강요한다. 이에 따라 마로위츠 햄릿의 공연은 햄릿에서 일탈한 자전거타기와 노래 등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며, 오필리어의 에로틱, 삶과 죽음 사이의 고뇌조차 웃음거리가 되는 현실의 냉담함을 강조한다. 만약 세익스피어가 공연을 본다면 햄릿이 과연 누구인가라고 질문할만한 이 혼돈의 무대는, 그러나 도덕적이지만 무력한 인간 햄릿과 악인이지만 유능한 클로디어스를 대비시켜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1601년의 햄릿에서는 도덕성이 강조됐지만, 현대의 햄릿은 능력과 처세술이 우선화 된다는 것이 마로위츠의 해석이자, 관객의 공감대이다. 소극장 공연의 특성상 마로위츠 햄릿은 최대로 단순화된 전면무대와 계단에서 펼쳐진다. 놀이적 요소를 부각시킨 마로위츠에 의해 배우들의 동작은 역동적이지만, 회오리가 그려진 무대를 따라 걷는 햄릿의 걸음은 그리 무겁거나 희화적이지도 않다. 인물들의 동작이 증폭되는 것에 비해 무대는 점차 좁아지며, 사느냐 죽느냐의 비장한 고뇌에 냉소를 던지는 배우들은 관객과 함께 있지 않다. 짐짓 무거워질 수 있는 햄릿의 내용을 쉽게 풀어보려는 연출의 의도가 무대 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면, 순간 너무나 가볍게도 무대가 내려앉는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는 레어티즈까지도 단지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며, 감성적 음률로 치장된 오필리어의 노래는 음악에 묻혀 애처롭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웃음이라고 모두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이 깨닫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마로위츠 햄릿의 묘미는 놀랍도록 선명하게 살아난다. 마로위츠가 해체한, 환상을 실체화시킬 능력이 없는 무력한 인간 햄릿의 모습은 바라보기에 결코 만만치 않지만, 어쩌면 해체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관객들이라도 현대적 햄릿의 의미를 쉽게 재조명할 수 있을 듯하다.

 

 

 

 <마로윗츠 햄릿>은 찰스 마로윗츠가 1960년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과감하게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후 동서의 뭇 연출가와 작가들에게 고전을 과감히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킨 화제작이다. 원래 이 작품은 찰스 마로윗츠가 세계적 연출가 피터 브룩과 함께 공연한 잔혹 연극 작업의 하나로 발표되었다. 마로윗츠는 원작에 있어서 모호하고 다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은 성격 묘사에 주목하여 일반적으로 고정화된 관념을 뒤집었다. 그리하여 주인공 햄릿은 깊은 사색의 소유자면서 정의감과 인품을 지닌 고상한 왕자가 아니라, 우유부단하며 왕자다운 기품을 소유하지 못한 못난이로 재창조하였다. 독살당한 선왕과 모반에 성공하고 왕위를 빼앗은 클로디어스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비교하듯이, 복수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레어티스와 햄릿을 대비시키고 또 왕위를 계승한 왕자로서 당당한 포틴브라스와 햄릿을 대비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부수려 하였다.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은 극구성상 점층적인 구성을 배제한 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응용한 빠른 템포의 꼴라주 형태를 채택한 데에 있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윤우영은 까다로운 대본을 치밀하게 분석 체계화한 후 좁은 무대와 배우들을 적절히 잘 활용하였다. 특히 좁은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극 진행에 활력을 보태 주었으며, 배우들 역시 충실한 연습 과정을 소화해 내어 자칫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듯 보이는 극 내용을 열연으로 소화해 냈다. 셰익스피어 원작 <햄릿>을 충분히 이해하고 분석한 후에나 맛볼 수 있는 “충돌 몽타주”기법이나 비연속적인 구성에 의한 “논리적 비약”의 절묘함과 “대사 바꿔치기”의 묘미 등을 한국 관객들이 제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웠으나, 무대의 열기가 젊은 관객들에게 진지하게 전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